[2021년 2+3월호] [음악이야기] 노래가 그려내는 봄
등록 2021.03.25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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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 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가만히 눈감으면 잡힐 것 같은

아련히 마음 아픈 추억 같은 것들

봄은 또 오고 꽃은 피고 또 지고 피고

아름다워서 너무나 슬픈 이야기

 

•김윤아 작사, 김윤아 노래 <봄날은 간다>, 2001

 

오는 봄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눈으로 만물의 변화를 보고 피부로 대지의 기운을 느끼면 알 수 있겠지만 도심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라디오를 듣는 이들이라면 성급한, 혹은 틀에 박힌 피디나 작가 덕에 봄이 옴을 알 수 있다.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 이들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니 한국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의 첫머리에 놓이는 그것, 중고 LP 매장에 가면 품절 되는 일 없이 늘 재고가 충분한 비발디의 <사계> 덕분이다.

 

봄, 노래가 사랑하는 계절

클래식 음악이 아니더라도 봄이 저 남쪽 바다 어디쯤 머무르고 있을 때부터 봄 노래는 라디오에서 넘쳐난다. 긴 겨울에 지친 이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서이기 때문이겠지만 다른 데서 이유를 찾을 수도 있다. 노래가 사랑하는 계절을 물으면 누구나 가을을 떠올리겠지만 아니다. 노래 가사를 뒤져 보면 봄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제목에서는 겨울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이 등장한다. 노래가 사랑하는 계절은 가을이 아니라 봄이다.

 

[제목]

 

[가사]

봄(79)

봄(51), 봄날(14), 봄비(9), 봄바람(5)

 

봄(1572)

봄(1004), 봄날(218), 봄바람(111), 봄비(82), 새봄(43), 봄봄(14), 봄철(13), 봄맞이(12), 봄볕(9), 봄소식(8), 봄빛(7), 봄아가씨(6), 봄버들(6), 봄노래(6), 봄여름(5), 봄눈(5), 봄가을(5), 봄처녀(4), 봄밤(3), 봄꽃(3), 늦봄(3), 올봄(2), 봄새(2), 봄기운(1)

여름(57)

여름(46), 여름날(3), 한여름(8)

 

여름(1,001)

여름(813), 한여름(84), 여름밤(70), 지난여름(13), 초여름(6), 봄여름(5), 여름빛(4), 여름휴가(1), 여름철(1), 여름잠(1), 여름새(1), 여름내(1), 늦여름(1)

가을(44)

가을(43), 늦가을(1)

 

가을(541)

가을(446), 가을바람(28), 가을비(16), 가을날(11), 늦가을(8), 봄가을(5), 올가을(2), 가을빛(2), 초가을(1), 가을철(1)

겨울(90)

겨울(87), 겨울밤(2), 겨울비(1)

 

겨울(1281)

겨울(1061), 겨울밤(55), 지난겨울(37), 한겨울(33), 겨울날(24), 겨울비(23), 올겨울(10), 겨울바람(9), 겨울바다(9), 겨울잠(7), 초겨울(6), 겨울나무(4), 겨울옷(1), 겨울새(1), 겨울눈(1)

대중적 사랑을 받고 있는 노래방 책에 실린 2만6천여 곡의 어휘를 분석한 통계 중에서 제목과 가사에 계절이 나오는 횟수 정리=한성우 교수

 

노래가 사랑하는 계절은 왜 봄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계절의 시작이라는 봄의 상징성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계절은 순환하지만 인간 생활의 주기를 따져보면 시작은 역시 봄이다. 추위에 웅크렸던 몸이 기지개를 켜는 시기, 대지에서 트는 싹과 마찬가지로 숨죽여 있던 몸의 싹도 틔워야 하는 시기가 봄이다 보니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봄은 다른 단어들과 결합하기가 너무도 좋다. 한 음절짜리 봄은 어떤 단어와도 잘 어울리고 봄이 들어간 모든 단어에서 봄내음이 진하게 느껴진다. 계절의 시작이라는 봄 자체의 특성만으로도 노래가 사랑할 특별한 이유가 되지만 어떤 단어와 결합해도 봄내음이 물씬 나니 온갖 이야기를 꾸미기에 적절하다.
 

인생의 봄은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봄 노래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심상치 않다.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도 그렇다. 제목도 가사도 ‘오는 봄’이 아니라 ‘가는 봄’을 가리키고 있다. 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도 지는 것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고 있다. 노랫말 속에 이미 ‘이별’이나 ‘추억’ 같이 슬픔을 자아내는 요소들이 아련하게 깔려 있다. 아름답지만 슬픈 봄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고 있다.

 

어른들이 듣고 부르는 봄 노래가 죄다 이렇다. 대지의 생명을 일깨우는 봄비마저도 노래에서는 처절하기만 하다. 노래의 기본적인 정서가 ‘청승’이라지만 <봄비>의 청승은 너무 심하다. 인간에게만 내리는 비가 아닐 텐데 철저히 슬픔에 가득 찬 인간의 감성만 노래하고 있다.

 

이슬비 내리는 길을 걸으며

봄비에 젖어서 길을 걸으며

나 혼자 쓸쓸히 빗방울 소리에

한없이 적시는 내 눈 위에는

빗방울 떨어져 눈물이 되었나 한없이 흐르네

 

•신중현 작사, 박인수 노래, 〈봄비〉, 1967

 

희망에 가득 차 있어야 할 봄이 노래에서는 왜 이리 슬픔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다가올 날보다 지나간 날들을 그리는 노래의 속성이 그 이유 중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이들의 노래는 앞으로 맞이할 희망을 노래하지만 어른들의 노래는 이미 떠나보낸 날들의 아쉬움을 노래한다. 꽃이 한창이었을 때는 스스로 그 향기에 취해 모르다가 그 짧은 시기가 지나고 나면 영원한 그리움으로 남는다. 그러니 슬픔으로 가득 찰 수밖에…….

 

순환하는 계절과 달리 외줄 철길처럼 내닫기만 하는 인생은 돌아오지 않는다. 계절의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는데 인생의 봄은 이미 지나가고 다시는 오지 않으니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는다.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시절, 그러나 한순간이었던 시절에 대한 아쉬움을 봄이 주기적으로 깨우니 봄을 사랑하면서도 슬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환갑이 넘은 노래지만 봄이 되면 늘 소환되는 이 노래를 곰곰이 뜯어보아야 한다. 제목도, 가사도 ‘봄날은 갔다’가 아닌 ‘봄날은 간다’이다. 그러니 지금이 봄이다. 노래를 듣는 이 계절도 봄이고, 이 노래를 듣는 이들의 삶 역시 봄이다. 어쩌면 모두가 알아서 더 슬프지만 그렇게 믿고 봄날을 보내며 ‘봄날은 간다’를 곱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서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꽃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딸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손로원 작사, 백설희 노래, 〈봄날은 간다〉, 1954

 

 

한성우 인하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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