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언련 새 보금자리 옥상 위에서 웃고 있는 김시연 회원(왼쪽)과 이기범 회원(오른쪽)
2020년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2009년부터 자리 잡은 서울시 마포구 공덕동 일대가 재건축정비사업 지역으로 확정되어 철거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이주를 결정하며 어느 때보다 다사다난한 시간을 보낸 민언련은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회원’ 분들이다. 오랜 세월 민언련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장기 회원’ 분들, 그 무한애정의 뿌리가 궁금했다. 2020년을 마무리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초기 회원을 찾아 나선 이유다.
“우리가 나설 때가 아닌데….” 두 회원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훨씬 오래된 ‘고생대’ 회원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아직 순서가 되지 않은 ‘중생대’ 회원이라며 머쓱해 했지만, 20년 넘는 동안 ‘후원’과 ‘회원’을 중단한 적이 없다. 1997년 언론학교 21기로 인연을 맺은 김시연 회원, 1999년 지인 소개로 신문분과에 들어와 다양한 활동을 벌여온 이기범 회원과 수업과제를 위해 이메일을 보냈다가 방송분과에 들어온 정은경 회원이 그 주인공이다. 정은경 회원은 일정상 참석하지 못해 이메일 인터뷰로 대신했다. 파릇한 대학생들이 이제 OB(Old Boy)가 되었다. 이사를 앞둔 11월 12일, 공덕동 시절 ‘마지막’ 회원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내가 몸담은 곳을 지탱하는 ‘돈’
신미희(민언련 사무처장) 며칠째 타임머신을 타고 20~30년을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에요. 오래된 회원 분들을 모시기로 하고, 1990년대부터 민언련과 함께하고 있는 분들에게 연락을 했거든요. 심지어 019 번호로 등록된 노래분과 회원은 바뀐 번호를 찾아내서 통화도 했어요. 살아있으면 어떻게든 만나게 되나 봅니다(웃음). 오늘 김시연 회원과 이기범 회원을 모셨습니다. 자기소개 해주시죠.
김시연 1997년 여름, 대학교 4학년 때 언론학교 21기를 다녔어요. 언론학교를 계기로 신문분과 활동을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회원 가입도 했습니다. 지금은 <오마이뉴스>에서 기자로 있고요.
이기범 저는 1999년에 들어왔어요. 대학교 3, 4학년쯤이었는데 “뭔가 재밌는 걸 좀 해보자” 생각하던 차에 인권캠프에서 만난 김종민 회원이 신문분과 회원이었어요. 그 친구가 민언련이란 곳이 있는데 신문분과를 해보라고 권하더라고요. 이후 <노동일보> 기자를 하다가 지금은 전국언론노동조합 조직쟁의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신미희 민언련에 처음 오게 된 이야기도 했는데요. 1997년, 1999년이면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강산이 두 번 변한 시간이에요. 계속 민언련 회원으로 활동을 이어간 계기가 궁금하네요.
김시연 특별한 계기는 없어요. 당시 기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언론학교에 들어왔는데요. 언론학교 MT도 가고, 그때 김시창 간사님과 이유경 간사님, 김유진 간사님 등과 교류하면서 회원이 됐어요. 언론학교 수강생 상당수가 신문분과나 방송분과, 노래분과, 산악회 등 회원활동에 참여했죠. 언론학교가 끝이 아니라 민언련 회원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통로였던 거예요. 저도 그렇게 회원이 됐고요.
이기범 사실 저는 학교생활에 별 재미를 못 느끼고 있었어요. 공대를 다녔는데 맞질 않아서 공부는 재미가 없었던 거죠(웃음). 분과활동이 더 재밌고 언론 모니터도 재밌고, 무엇보다 뒤풀이가 즐거웠고요. 사진분과, 산악회, 매체사진비평분과 활동도 했어요.
신미희 대학생 때부터 후원회원이었던 거네요? 학생이면 용돈도 넉넉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후원을 한 번도 끊은 적이 없어요?
김시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동이체가 되니까요(웃음). 장난이고요. 회원활동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어떤 단체를 회비후원 또는 기부만 하게 되면 사정에 따라 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민언련은 하나의 가족, 친정 같은 느낌이에요. 활동가는 아니었지만 어디 가서 민언련 출신이라고 말할 정도로 마음의 고향이기 때문에 단순한 후원개념이 아닌 거죠. 내가 몸담은 곳을 지탱하는 돈을 어떻게 끊을 수 있겠어요?
종로구 청운효자동에 위치한 민언련의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신미희 사무처장, 이기범 회원, 김시연 회원(왼쪽부터 순서대로)이 웃음꽃을 피우고 있다.
잊지 못할 그 사람 ‘이룰태림’
신미희 인터뷰를 위해 연락한 회원 분 이름 옆에 ‘김시연’이라고 적혀 있는데 혹시 아내인가 싶었는데요(웃음).
김시연 어휴, 큰일 나죠(웃음). 그분은 아니지만, 저도 부부 회원이에요. 신문분과 OB모임에 나갔다가 당시 활동을 하고 있던 옆지기를 만나 결혼한 지 13년이 넘었죠. OB모임은 20~30년째 꾸준히 이어지고 있어요. 아, 오늘도 몇 분이 망원동에서 한잔하고 있어요.
신미희 민언련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나 사연이 있다면요?
김시연 워낙 많지만 성유보 이사장님을 꼽고 싶어요.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제가 민언련 활동을 시작할 때 이사장이셨어요. 엄혹한 1970년대부터 언론민주화운동을 하신 대단한 해직기자였는데, 강한 인상과 달리 푸근한 동네 아저씨 같았어요. 언론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회원활동에도 직접 참여하고, MT도 함께 갔던 기억이 나요. 그분의 존재 자체가 크게 기억에 남아요.
이기범 저도 성유보 선생님을 말하고자 했는데(웃음). 특히 그 모습이 잊히지 남아요. 헐렁한 바지 차림으로 손가락에 재킷을 걸어 어깨 뒤로 걸치고선 천천히 걸어가던 모습. 그리고 민언련에 오면 항상 글을 쓰고 계셨죠. 반갑고 맞아주시고, 그게 굉장히 좋았어요. ‘명랑운동회’라는 민언련 운동회가 있었는데 신촌 창천초등학교에서 했거든요. 회원들이 직접 프로그램을 짜고 준비과정 하나하나가 재밌었어요. 박을 만들어야 했는데 안을 채우려니 색종이를 잘라서 해도 안 되고, 마침 가을이라서 단풍을 긁어다가 넣었죠. 그랬더니 운동회 날 박이 깨지지 않아서 작대기로 사정없이 내리치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죠(웃음).
1999년 친구 추천으로 들어와 신문분과부터 사진분과, 산악회, 매체사진비평분과까지 다양한 활동을 한 이기범 회원
1999년과 2020년, 언론은 바뀌지 않았다
김나래(민언련 활동가) 제가 기억하는 ‘암흑 속 언론’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사건이에요. 그때 언론보도가 심각하다고 느끼면서 언론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두 분은 1990년대 언론이 어떤 측면에서 문제라고 봤나요?
김시연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인데요. 그나마 1990년대는 군부독재가 끝나고 문민정부 시대로 접어든 때였는데도 여전히 ‘레드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뭐만 하면 ‘빨갱이’란 말이 난무했고요. 지금은 보수 야당도 빨간색을 쓰잖아요? 그땐 빨간색만 쓰면 빨갱이고 용공분자였어요. 그런 프레임을 언론이 만들었죠. 지금이야 누가 ‘공산주의자다’ 그러면 웃어넘기잖아요? 그땐 ‘공산주의자’라고 언론에서 낙인찍는 순간, 그 사람은 간첩으로 찍혀버렸어요. 언론의 힘이 막강했죠. 그런 프레임을 깬 사람이 노무현 대통령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대선 기간 언론과 보수세력이 장인의 좌익전력을 빌미로 사상공세를 하니까 노무현 후보가 ‘나는 이 사실을 알고 결혼했고,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다.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이냐’고 받아쳤죠. 전세가 역전되었고요. 과거였다면 ‘가족 중 부역자가 있다’며 도매금으로 공격받고, 대통령은커녕 후보가 되기도 어려웠을 거예요. 그런 중심에 언론이 부정적 역할을 크게 했죠.
이기범 기억에 남는 언론보도 제목이 있어요. “이 가뭄에 웬 파업”. 그런 프레임은 반복되고 있는데요. “월드컵에 웬 파업”도 마찬가지고요. 파업은 노동자의 권리이지만, 오죽하면 파업까지 하겠어요. 그런데 가뭄에 파업까지 하느냐면서 언론이 파업은 무조건 나쁘고 시민을 불편하게 한다는 프레임을 만들었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죠.
신미희 그때와 지금, 언론은 달라졌는가요?
김시연 지금은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굉장히 낮잖아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언론에 대한 불신은 그렇게 높지 않았어요. 현재와 비교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었죠. ‘팥으로 메주를 쑨대도 곧이듣는다’는 말처럼요. 지금이야 기레기란 단어도 있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언론이 거짓말을 하겠어?”, “언론이 지어냈겠어?” 하는 분위기였어요. 시민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보도가 있더라도 언론 자체는 신뢰한 거예요. 그런데 민언련은 거기다 대고 “쟤네 거짓말하는 거예요”, “사실을 왜곡하고 있어요” 지적하니까 수상한 단체로 보이기도 했죠. 언론보도 품질은 오히려 지금이 더 나을 수도 있어요.
신미희 언론개혁이 안 되고 있다는 시민들의 분노는 여전해요. 언론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김시연 비슷한 맥락인데요. 언론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건 없고, 오히려 수용자인 독자들이 바뀌었죠. 지금은 인터넷과 포털 등을 통해 정보가 개방돼 있잖아요.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되었죠. 수용자들의 눈높이는 높아졌는데, 언론은 변함이 없으니까 당시 눈치 채지 못한 게 이젠 보이는 거고요. 그만큼 더 불신이 높아진 거죠. 저는 언론이 더 나빠졌다고 보진 않아요. 문제는 수용자 눈높이에 맞춰서 언론도 변해야 하는데 속도가 느린 거예요.
이기범 가장 큰 문제가 ‘무보도’라고 봐요. 언론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이 이슈잖아요. 잘못된 보도는 그렇게라도 견제할 수 있는데, 언론이 아예 보도하지 않는 건 처벌할 수도 책임을 물을 수도 없어요. 택배노동자 분들이 2020년 올해 지금까지 15명이 돌아가셨어요. 분명히 보도해야 마땅하지만, 보도되지 않은 분들이 더 많을 거예요. 이렇게 아예 보도조차 되지 않는 건 어떻게 책임을 묻느냐는 거죠.
1997년 언론학교 21기, 이후 신문분과 활동으로 민언련과 인연을 맺은 김시연 회원
민언련이 걸어갈 길, 언제나 회원과 함께!
신미희 두 분은 언론계에 몸을 담고 있어요. 김시연 회원님은 <오마이뉴스> 기자, 이기범 회원님은 <노동일보> 기자 생활을 하고 지금은 언론노조에 있잖아요. 언론 내부에서 볼 때 “언론개혁이 왜 안 되는가? 왜 이렇게 더딘가”라는 시각이 언론 밖에서 보는 것과 다른가요?
김시연 언론은 진보나 보수를 떠나 비슷한 속성이 있어요. 대다수가 민간기업이잖아요. 사기업이고 수익을 내야 하죠. 후원을 받는 언론매체도 생겨나고 있지만, 유료화로 성공한 매체는 흔치 않고요. 대부분 광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죠. 광고주와 언론의 유착은 더 심해지고, 솔직히 이 연결고리는 쉽게 끊기 어려워진 거죠. 콘텐츠를 돈 주고 사서 보는 언론, 후원자를 위한 언론 등 대안미디어가 많이 나와야 그걸 기반으로 바뀔 수 있지 않을까요? 광고에 연연하는 수익구조 아래선 언론이 바뀌기 어렵다는 걸 절감해요. 그래도 희망적인 건 광고에 기대 언론사를 유지하는 모델 자체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거예요. 매체끼리 경쟁하고 플랫폼도 다양해지면서 언론사가 과거처럼 광고에 의존하기 힘든 환경이 됐거든요. 언론이 유료화나 후원회원제 등 다양한 모델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아요. 종이 신문을 발행하는 이유가 광고라는 점을 생각하면, 유력지 중에서 종이신문을 없애는 곳이 나올 수도 있고요.
이기범 종이신문에선 생각이 좀 다른데요. 외국에선 ‘민주시민’ 요건 중에 ‘신문을 한 부 구독한다’라는 게 있다고 해요.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은 편향성이 강해요. 다양한 정보를 습득한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누군가를 통해 가공되고 선택된 정보를 본다는 거죠. 신문도 장난칠 수 있지만, 시민들이 신문을 읽어야 그런 편향성 등을 간파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생각해요. 미디어 리터러시에서 최고 교과서는 종이신문이라고 보고요. 종이신문은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 같아요.
신미희 미디어환경이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데 이런 변화 속에 민언련은 어떻게 언론개혁운동을 펼쳐야 할까요?
김시연 단체는 역사에 따라서 변화해가잖아요. 민언련도 마찬가지일 것 같아요. 초기에는 상근 활동가가 많지 않았죠. 그땐 신문분과, 방송분과 같은 회원활동이 활발했고요. 지금 민언련 활동가는 예전보다 늘었어요. 상대적으로 회원활동은 줄었고요. 이게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하나의 방향인가 싶기도 해요. 과거엔 회원들이 몸소 활동하며 뭔가를 얻어갔다면, 지금은 후원자로서 단체가 존재할 수 있게끔 지원해주는 단계로 바뀌고 있어요. 그럼 회원들이 민언련을 후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을 바라고 후원할까를 생각해봐야죠. 저는 민언련 활동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더 나아가 자체 미디어로서 역할도 하면 좋겠어요. 유튜브 장점은 누구나 방송사가 될 수 있는 거잖아요. 우리 사회 주요 스피커로서 활동을 강화할 때가 아닌가 싶어요. 기존 언론에 기대할 수 없는 미디어 역할을 민언련이 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이기범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다 보니 공동체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민주언론시민연합이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는 회원들이 움직여줘야 하거든요. 회비를 내는 것 자체도 큰 힘일 수는 있지만, 여기에 그쳐선 안 돼요. 매번 노동조합 교육을 할 때 “조합비만으로는 절대 안 된다”, “직접 조합원이 활동해야지 그 노동조합이 지켜진다”고 강조해요. 민언련 회원활동 역시 마찬가지죠. 직접 나와서 뭔가 활동할 수 있는 장이 없으면, 회원들은 한 발짝, 두 발짝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아요. 그래서 민언련 공동체를 위해서 회원들과의 장(場)이 많아지면 좋겠고요. 두 번째로 교육도 활발하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미디어 리터러시만큼은 대중적으로, 예전 언론학교처럼 꾸준하게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미희 오늘 두 분과 인터뷰하면서 따뜻한 옛날 이야기만 할 줄 알았는데 결론은 언론운동으로 돌아오네요. 언론을 어떻게 개혁할 수 있는가, 민언련이 언론개혁 한가운데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무거운 이야기로 마치게 되는데요. 이 주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것 같습니다. 더 많은 회원 분들과 소통하며 길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민언련을 ‘배반’할 수 없던 이유
안녕하세요, 정은경 회원입니다. 1999년 저는 언론정보학부 대학생이었어요. 과제 때문에 당시 방송분과 강정훈 회원님에게 무턱대고 메일을 보냈죠. 저였다면 그런 메일을 씹었을 텐데(웃음). 강정훈 회원님이 방송분과 활동에 초대했어요. 그렇게 인연이 닿았고 언론학교 29기, <오연호의 기자만들기> 1기를 수료했죠.
<미디어오늘>과 <미디어스>에서 기자로 일했고, 지금은 시민들의 마을공동체미디어 활동을 지원하는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 센터장으로 있어요. 돌이켜보면 민언련은 제가 학교에서 사회로 나올 수 있도록 만들어준 징검다리였죠. 민언련 회원활동이란 스펙(!) 덕분에 <미디어오늘>에 입사했다고 생각하거든요. 회원분들과 간사님들과 교류하며 학교에선 몰랐던 사회를 민언련을 통해 배웠죠. 회원활동을 꾸준하게 이어온 것도 그런 소중한 기회를 준 민언련을 감히 ‘배반’할 수 없어서고요.
많은 추억이 있지만, 불교방송 건물에 있을 때가 생각나요. 특히 마포역 뒷골목 호프집은 잊히지 않아요. 분과회의를 마치면, 언론학교 수업이 끝나면 매번 그곳에서 뒤풀이를 했거든요. 언론학교 MT는 우이동으로 갔는데 새벽에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조난당할 뻔한 적도 있죠.
회원활동을 활발히 했던 그때는 참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마 상식이 통하던 시대였거든요.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민언련 사무처가 많이 힘들 때 후원회비 내는 것밖에 하지 못한 게 미안하기도 했어요. 미디어 업계를 떠난 지 꽤 되어 지금 언론문제를 명확하게 정의내리긴 어렵지만, 언론의 보수적인 태도가 큰 문제에요. 정치적 성향을 지적하는 게 아니고요. 언론 소비자를 대하는 태도에서요. 모든 분야에서 트렌드가 바뀌고 있는데 주류언론만 여전히 고고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거든요. 콘텐츠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 언론이 독자, 시청자를 ‘고객’으로 모시는 태도전환이 필요해요.
이런 변화 속에서 민언련의 언론운동 방향도 고민해보면 좋겠어요. 표현의 주체, 소통의 주체, 발언의 주체로서 시민들이 등장하고 있잖아요? 이런 분들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場)을 만들어주는 일을 민언련에서 해야 하지 않을까요? 시간이 갈수록 벌어지는 세대 차이를 좁히며 새로운 세대와 기성세대가 교류하고 소통하는 접촉면을 넓히는 활동도 모색해야 하고요. 저는 묵묵히 지켜주는 시민들 덕분에 민언련의 언론운동도 조금씩, 계속해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언련 회원으로 언제나 함께 할게요. 회원님들! 앞으로도 함께 나아가요.
※ ‘민언련 타임머신’은 온·오프라인을 가리지 않았다. 회원인터뷰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마음만큼은 함께한 또 한 명의 ‘응답하라 90년대’ 멤버, 정은경 회원을 서면으로 만났다. ‘이메일’로 민언련을 처음 조우했다는 그의 인터뷰는 이번에도 ‘이메일’로 이뤄졌다. |
인터뷰·정리 신미희 사무처장 김나래 활동가
사진 이병국 이사
동영상 고은지 활동가
▼날자꾸나 민언련 2020년 12월+2021년 1월호 PDF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