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8월호] [영화이야기]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
등록 2020.08.10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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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5일의 일이다. 미국 중북부에 위치한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의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위조지폐 사용 혐의로 그를 검거하는 중에 경찰은 그의 팔을 뒤로 돌려 수갑을 채우고 도로에 엎드리게 했다. 이어서 무릎으로 그의 목을 찍어눌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숨쉬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그는 경찰에게 “목을 풀어달라”고, “아프다”고, “죽겠다”고, “살려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경찰은 9분 가까이나 무시했고, 의식을 잃은 그는 결국 질식사했다. 당시 경찰의 과잉 제압을 목격하던 행인들 중 일부는 경찰에게 그를 일으켜서 경찰차에 태우라며 항의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다음 날인 26일부터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고 외치는 항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미국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굳이 인종차별적으로 볼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동안 백인 경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흑인만이 아니라 백인도 많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흑인이 죽임을 당했을 때마다 인종차별이라고 공분했던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사건’은 인종차별로 인한 것이었다고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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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과 놀랄 만큼 유사한 사례가 이미 2009년에도 있었다. 2009년 새해 첫날 동트기 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의 한 전철역에서 흑인 청년이 백인 경찰에게 총을 맞고 사망한 사건이다. 그로부터 4년 후 사망 사건이 벌어진 전철역 이름을 그대로 딴 영화 <Fruitvale Station>(한국어 제목은 <오스카 그랜트의 어떤 하루>)이 관객에게 선보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당시 27세의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오스카 그랜트의 백인 경찰에 의한 총격 사망이라는 바로 그 사건’은 미국 사회 내에 공고하게 구축되어 있는 인종차별 때문에 발생했다는 메시지를 이 영화에 담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오스카 그랜트(마이클 B. 조던)는 동거 중인 여자친구 소피나(멜로니 디아즈)를 포함한 친구들과 함께 2008년 제야에 샌프란시스코 시내에 나가 새해맞이 불꽃놀이 축제를 구경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축제가 끝나자 전철을 이용해 귀가하는데, 객차 안에서 우연히 교도소에서 앙숙 사이였던 백인과 맞닥뜨린다. 그는 오스카를 보자마자 시비를 걸면서 주먹을 휘두르고, 오스카도 주먹질로 응대하면서 전철 안에서는 소동이 벌어진다.

 

신고를 받은 경찰들이 다음 정차 역인 프루트베일 역(Fruitvale bart station)으로 출동한다. 경찰들은 폭행과 관련된 사람들을 색출하는데 잡혀 내린 이들은 오스카의 친구들로 모두가 흑인이다. 소동을 일으킨 백인은 체포되지 않았다. 오스카 일행은 흉기를 소지하지 않았고,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계속 주장했다. 경찰들은 오스카 일행의 신원을 조회해보기 전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카 일행을 전철 안에서 소동을 일으킨 범인들이라고 단정 지었다. 그리고 체포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오스카가 죄가 없다며 항의하자 백인 경찰은 그를 차가운 플랫폼 바닥에 엎어뜨리고 뒤로 수갑을 채웠다. 그리고는 정말 거짓말같이 순식간에 총을 빼어 오스카의 등을 쏘았다. 2009년 1월 1일 02시 15분의 일이다. 오스카는 입에서 피를 흘리면서 의식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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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들의 과잉진압은 오스카 일행에게만 향했다. 출처 네이버 영화

 

쿠글러 감독은 흑인 청년 오스카의 죽음을 차에 치어 죽어간 떠돌이 개의 죽음과 연결시켜 의미화한다. 오스카는 2008년 마지막 날, 소피나에게 새해에는 새로운 인생을 살 거라며 그동안 하던 마약 판매에서 손을 떼겠다고 공언한다. 소피나는 진작부터 바라던 일이었으므로 반겼다. 그러나 오스카가 소피나에게 숨긴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오스카는 일하던 마트에서 지각과 무단결근을 이유로 2주 전에 해고된 상태였다. 오스카는 사장에게 찾아가 ‘돈을 구하러 다니느라 결근했다’는 사정을 이야기하면 일자리를 다시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소피나에게 이를 숨겼다. 그러나 사장은 오스카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동생이 월세를 빌려달라고 부탁해왔다. 오스카 자신의 월세 지불도 코앞으로 다가오자, 마약을 파는 일 외에는 돈을 장만할 방법이 없겠다 싶었다.

 

오스카는 집에 숨겨두었던 마약을 팔기로 결심한다. 접선 장소로 가던 중, 차에 기름을 넣으려 주유소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주인 없이 떠도는 개를 발견하게 된다. 낯선 오스카에게 꼬리를 흔드는 개를 쓰다듬으면서 예뻐해 주다가 오스카가 주유를 마무리하러 자리를 뜬 순간, 그 개는 자전거 우선 도로를 폭주하던 차에 치여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대낮에 차로 개를 쳐놓고도 그냥 달아나버린 그 누군가는 ‘주인 없이 떠도는 개는 응당 그런 대접을 받아도 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일면식 없었던 길거리 개의 죽음에 오스카는 눈물을 쏟는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오스카는 마음을 바꾼다. 팔려던 마약을 바다에 쏟아버리고, 어렵더라도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그렇지만 그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인격적으로 모욕 받으면서 이유도 모른 채 차가운 전철역 플랫폼 바닥에 엎어져 입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병원에 급히 이송되었지만, 폐를 관통한 총상으로 인한 내출혈 때문에 오스카의 소생은 장담할 수 없다고 의사는 말한다. 오스카의 엄마 완다(옥타비아 스펜서)는 하느님께 간절히 빌고 또 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그 아이를 살리시어 그의 웃음을 다시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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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 수감된 오스카를 찾아간 완다. 출처 네이버 영화

 

그러나 오스카는 끝내 사망한다. 다가가서 만질 수 없이, 유리 벽 너머로 보는 것만 허락된 상황에서 엄마의 눈에 들어 온 아들은 덩그러니 흰 시트를 덮고 누워있었다.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던 아이였는데….” 이어서 엄마는 자책하기 시작한다. “차를 가져가겠다는 아이에게 내가 지하철을 타라고 했어요.”

 

마약 판매로 1년 전 교도소에 갇힌 아들을 면회 갔을 때, 네 살 된 손녀 소식을 전해주자 아들 오스카는 맥락 없이 투정을 부리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똑똑하다고 인정받는 자기 딸, 그 애만큼은 교복 입고 다니는 초등학교에 보내 영어와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교육을 받게 하겠다고. 이 말은 엄마 완다의 심장에 비수로 꽂혔다. 아들이 힘겹게 살아가는 것이 모두 자신의 탓 같아서다.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더 많이 벌었더라면, 아들을 제대로 교육시켰을 것이고, 그러면 아들은 마트 비정규직이 아닌 보수가 더 좋은 번듯한 직장에 다닐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아들은 마약을 파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아들은 교도소에 들어가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그리고 지상 전철이 굉음을 내며 오가는, 흑인들이 주로 사는 가난한 동네에서 지금처럼 살지 않고 지하철이 다니는 번듯한 동네에 집을 구해서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들이 그렇게 살게 된 책임을 인종차별이 구조화된 모순적인 사회에 조금도 묻지 않고, 가난한 자신과 가난한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특출나고, 바르고, 똑똑하게 자라주지 못한 자신의 아들에게 책임이 온전히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가 경찰의 총에 세상을 등졌을 때도, 하찮게 취급되다가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해 가해자 집단에게 따져 묻고 분노하기보다, 자신의 책임으로 끌어안고 여생을 지옥처럼 살아내야 할 미국 시민, 평범한 흑인 완다‘들’이 2020년 현재도 여전히 적지 않다.

 

염찬희 회원(영화평론가)

 

 

▼날자꾸나 민언련 2020년 7.8월호 PDF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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