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8월호] [책이야기] 피해자의 말은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등록 2020.08.10 18:24
조회 307

고통받는 사람의 곁에 서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고통이 강렬할수록 그렇다. 마음이 산산이 찢겨진 사람은 차분하게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지 못한다. 고통받는 사람의 감정과 언어, 행동은 일목요연할 수가 없으며, 종종 모순적이기도 한다. 그는 지금 고통을 꾸역꾸역 삼키고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어기제를 동원하는 중이다.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의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그 말 뒤에 숨겨진 마음을 읽어야 한다. 실연당한 친구가 “다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다가 “그 XX가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면서 오락가락할 때, 우리가 그 모순된 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은 말 너머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인권운동(교보문고).jpg

 

 

‘피해자 중심주의’는 그런 게 아니다

인권운동가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렇게 고통받는 사람 곁에 오래오래 서는 일이다. 인권운동가들은 피해자의 고통을 세상에 드러내고 가해자와 사회구조를 고발한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여론을 바꾸고 제도를 만든다. 우리 사회는 그렇게 조금씩 진보해왔다. 우리는 덕분에 조금이나마 나은 사회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사회는 그렇게 바뀔 것이다. 다른 길은 없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세상에 드러내는 인권운동가의 일은 언제나 어렵고 위험하다. 업무는 많은데 급여는 적다거나 운동을 해도 사회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활동가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에 대한 어려움이다.

 

어떤 사람은 ‘피해자 중심주의’의 이름을 빌려 “피해자의 말은 옳다. 피해자의 의사를 거스르는 것은 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물론 피해자의 의사를 존중하려는 태도는 당연히 모든 활동가가 갖출 기본 소양이다. 그러나 피해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곧 운동은 아니다.

 

일단 피해자는 그렇게 단일한 주체가 아니다. 어떤 피해자는 금전적 보상을 바라고, 어떤 피해자는 명예회복을 바라고, 어떤 피해자는 진상규명을 바라고, 어떤 피해자는 당장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어떤 바람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문제다.

 

게다가 피해자의 말이라고 늘 옳은 것도 아니다. 허무맹랑한 음모론이나 모순적 과대망상에 빠진 피해자, 어떤 타협안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한 피해자도 종종 있다. 가해자나 사회구조를 옹호하는 피해자들도 많다. 각자의 생존방식이지만 그렇다고 운동이 이를 그대로 따를 수는 없다.

 

또한 이처럼 피해를 발언권으로 연결하는 방식은 피해자 간의 위계를 만든다. 더 고통을 받는 피해자가 더 많은 발언권을 갖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덜 고통받았다고 여겨지는 피해자는 소외되기 쉽다. 때로는 이로 인해 피해자 집단 사이에서 큰 갈등과 반목이 발생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말은 늘 옳다”는 말은 얼핏 보면 피해자에 대한 존중 같지만, 자칫 ‘피해자다움’의 이데올로기로 이어지기 쉽다. 피해자의 말이 일부 틀릴 경우, 피해자가 보상을 바라는 경우, 피해자의 말이나 입장이 바뀌는 경우 우리는 바로 그의 정체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며 더 나아가 그를 증오한다. 순결한 피해자 서사가 만들어지는 것은 우리가 그런 피해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피해를 드러낸 사람들,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

계간지 <인권운동 창간호(2018년 겨울)>의 주제는 ‘고통은 어떻게 이야기가 되는가’이다.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정의연 사태’ 때문이다. 결국 가장 핵심적인 질문은 ‘피해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피해자의 언어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바로 그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담은 책이다. 몇 구절을 미리 보자.

 

“정체성이 오히려 고착화되어 피해자가 피해에 붙잡히도록 만들거나 ‘피해자이기 때문에 피해가 정당하다’는 환원론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피해자와 피해자 정체성을 공유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성찰이 필요하다. (중략) 어떠한 요구와 그것의 정당성이 진짜 피해자이기 때문이라고 여겨질수록 검증의 대상은 피해자 자체, 피해자 정체성으로 집중된다.”

 

“누구의 입장에서 무엇을 위해 그 고통을 ‘말하느냐’와 고통을 ‘소비하느냐’의 간격은 늘 아찔한 절벽이다. (중략) 피해자의 말이나 특정 사건을 어떤 운동의 대의를 위한 ‘재료’로만 취하지 말자. 그 이야기를 우리가 공유하는 경험이자 같이 다뤄야 할 공적인 문제로 만들자.”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씨의 기자회견을 다룬 기사의 댓글란에서는 “할머니를 울리다니 윤미향은 무조건 나쁜 X”이라는 사람들과 “OOO 말에 넘어가서 운동을 배신한 할매”라는 사람들이 싸우고 있었다. 피해자의 증언을 각자 저 좋은 방식으로 해석한 셈이다. 갑자기 ‘피해자 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공격의 선봉에 선 정치인도 있다. 이야말로 피해자를 이용하는 착취이다.

 

피해자의 말을 제대로 듣는다는 것, 피해자의 곁에 선다는 것은 절대로 이런 방식이 아닐 것이다. 지금은 어설프게 내 방식대로 한 마디를 얹을 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제대로 듣고 함께 행동할지 고민할 때다. 그 고민을 누구보다 열심히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피해자의 말을 온전히 듣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공감한다면, 용감하게 피해를 드러내는 사람들과 그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행동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를. 피해자를 지지하며 그의 말을 제대로 들으려 힘쓰는 것, 더 이상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은 인권운동가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몫이니까.

 

권박효원 작가

 

▼날자꾸나 민언련 2020년 7.8월호 PDF 보기▼
https://issuu.com/068151/docs/________2020__7-8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