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언론시민연합 대표 얼굴이 바뀌었다. 3월 20일 제23차(통합 34차) 정기총회에서 김서중 성공회대 교수와 김언경 전 사무처장이 신임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공동대표를 맡게 된 김언경 전 사무처장은 1992년 언론학교 수강생으로 인연을 맺은 후 때로는 회원으로, 때로는 사무처 활동가로 민언련에 기여했다. 언론학교 수강생으로 시작해 신문·방송·주부모니터분과 회원활동을 거쳐 모니터부장, 협동사무처장, 사무처장까지 경험한 김언경 공동대표에게 민주언론시민연합의 과거와 현재, 앞으로 과제를 들어봤다. 이번 인터뷰는 5월 13일(수) 민언련에서 진행되었다.
수강생으로 만난 민언련, 공동대표가 되기까지
신미희(민언련 사무처장) 김언경 공동대표를 처음 본 게 1992년 1월입니다. 뽀얀 얼굴의 젊은 분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주언론시민연합 전신)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그때 제가 사무처 간사(지금의 활동가)로 김 공동대표에게 언론학교와 막 시작한 신문모니터분과 활동을 권했죠. 이제 세월이 흘러 공동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오게 되었나요?
김언경(민언련 공동대표) 부모님이 대학교 다닐 때 데모를 못 하게 하려고 엄청난 간섭과 협박을 하였어요. 그래서 어디 적을 두고 제대로 운동을 할 엄두도 내지 못했는데 졸업하면서 나름 결심을 했어요. ‘이제 어른이 되었으니 경제적‧정신적으로 독립하자, 부모님에게 더 간섭받지 않고 반드시 어떤 활동을 하자, 대학 때 열심히 활동하지 못한 대신 평생 변절하지 말자’ 뭐 이런 것이었어요. 그러려면 어딘가 소속되어 꾸준하게 활동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이런저런 단체를 찾아봤어요. 그중 실제 활동하게 된 곳이 바로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후원회였습니다.
민언협에 오게 된 건 지금 남편이 된 남자친구의 역할이 컸는데요. 제가 교육문제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남자친구가 ‘교육은 언론이 바뀌면 해결된다’고 말하고,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면 ‘환경문제는 언론이 바뀌면 해결된다’며 자꾸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어요. 그전에는 언론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언론운동 쪽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렇게 찾아간 곳이 민언협이었고, 언론학교를 듣고는 굉장히 감동했습니다. 강의를 안 빠지고 열심히 들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사회문제가 사실은 언론 때문이었다’고 깨닫게 되죠. 미디어를 가끔 드라마 보는 정도로 가볍게 소비하고 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고요. ‘언론 모니터를 하다 보면 계속 깨어있을 수 있고, 회사 다니면서 자기계발하기도 좋은 운동’이라고 생각하여 민언협 신문모니터분과에 들어갔습니다.
공시형(민언련 활동가) 공동대표가 된 소감을 공식으로 남긴 게 없더라고요. 이 자리를 빌려 소감을 부탁드립니다.
김언경 공식소감이라고 할 만한 게 있을까요(웃음). 사실 공동대표가 되기엔 제가 부족하죠. 이번에 대표 제안을 받았을 때도 여러 번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제게 대표란 우리 사회의 어른이라는 느낌이거든요. 그런데 제 자신이 아직 어리고 철없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김서중 상임대표가 함께하시니 나는 묻어가도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으니까요(웃음). 그럼에도 사무처장을 그만두고 공동대표를 맡은 것은 민언련 규모가 커지면서 단체가 성장하는 시기인데 징검다리 역할을 해서 잘 이어주고 가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제가 대표를 할 만한 깜냥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징검다리 역할을 잘 해야겠다는 각오는 있습니다.
민언련 ‘신문시장 정상화, 종편문제 알리기’ 큰 역할
공시형 민언련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는데요.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때 민언련이 얼마나 발전했다고 보는지요?
김언경 제가 처음 왔을 때는 민언협이 해직언론인 중심에서 시민언론운동으로 막 전환하던 시기였는데요. 당시만 해도 해직언론인들이 주축으로 활동하는 다소 ‘엄중한 운동단체’ 분위기였죠. 제가 사무처 활동가 제안을 받은 건 2006년 ‘민언련’ 시절인데요. 그때 민언련은 시민언론단체로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사무처 활동가들의 보수는 지금보다 적었지만, 사명감과 헌신은 대단했어요. 저도 나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3년을 일하니 과하게 소진되더라고요. 그만둘 때는 지쳐서 ‘다신 돌아오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다 2014년 사무처장을 맡게 되었죠. 그동안 민언련은 재정적으로 열악한 데 비해 해야 할 일은 끝도 없어서 활동가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힘들게 운영되었던 것 같아요. 다행히 2016년 회원들이 많이 늘면서 민언련 상황도 좋아졌어요. 사무처장으로 6년을 보내면서 운이 좋아 우리 단체 상황이 나아졌다는 것을 보람 있게 생각합니다.
공시형 회원분들이 민언련을 후원하고 활동하는 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이것은 민언련 덕에 바뀌었다’ 하는 게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김언경 언론이 바뀐 게 없어서 효능감이 떨어지긴 하네요(웃음). 최민희 전 대표님 있을 때 신문시장 정상화 촉구 활동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문시장은 ‘자전거일보’ ‘비데신문’ 등으로 불릴 정도로 정말 무질서했어요. 민언련이 신문의 불공정거래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신고하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요. 제가 모니터부장으로 들어왔을 때도 민언련은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한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어요. 그때 속으로는 ‘모니터부장이어서 다행이다. 저 일을 안 해서 다행이다. 저건 너무 힘들겠다’고까지 생각할 정도로 당시 활동가들이 진짜 고생했어요. 신문시장 불공정 문제는 민언련 활동으로 많이 시정됐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편 문제를 많이 알리는 데도 민언련 역할이 있었죠. 우리가 종편의 폐해를 계속 감시해오고 있다는 것 자체가 회원들에게 효능감을 준다고 생각하고요. 무엇보다 언론문제를 국민들이 훨씬 많이 알게 되고, 공감하게 된 것도 민언련 역할이 컸다고 자신합니다.
신미희 민언련 초기에는 ‘말’지 발행이나 한겨레신문 창간 등 대안매체 운동과 해직언론인·연구자 등 전문 언론인 중심의 운동을 했습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는 시민언론운동으로 전환되면서 언론학교 등 시민교육을 통해 시민들이 언론운동 중심에 자리 잡도록 하는 데 민언련이 큰 역할을 했죠. 이 시기에 신문시장 정상화를 위한 감시활동, 안티조선운동 등을 민언련이 활발하게 펼쳤고요. 2000년대 초반부터는 민언련이 언론보도 감시운동을 체계화했고, 김언경 공동대표가 사무처장으로 오면서 종편 감시운동으로 발전해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언론개혁운동 한가운데 민언련이 항상 있었던 것이죠.
‘종편때찌 프로젝트’ 민언련을 키우다
공시형 종편의 등장도 민언련 활동에 많은 영향을 준 계기가 됐는데요. <종편때찌 프로젝트>로 민언련 인지도도 높아지고 후원회원도 늘었습니다.
김언경 사실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때가 2016년 총선미디어감시연대(총감연) 활동을 하기 전이었어요. 선거보도 모니터를 진행할 돈이 없던 중에 <한겨레21>이 선거 직전 자료조사비로 100만 원 정도를 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종편 시사토크쇼를 집중 모니터해달라고 했어요. 신문, 방송분과 출신 회원들을 모아 한 달 치 분량의 종편 시사토크쇼를 모니터했죠. 이걸 보고서로 내고, <한겨레21>이 특집기사를 실었는데 반응이 좋았어요. 많은 분들이 ‘정말 종편이 심각하다’는 인식을 하게 된 것 같아요. 이후 종편감시 활동이 필요하다는 공감이 생겼고, 언론노조 등의 도움으로 총감연 예산에 종편감시 비용이 포함되었어요. 이런 비용으로 2016년 총감연은 종편 시사토크쇼를 집중 모니터할 수 있었죠.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총감연 결과를 보고 출연 요청을 해왔습니다. 처음엔 <파파이스>를 몰라서 안 한다고 했어요. 유튜브나 팟캐스트를 잘 몰랐던 거죠. 처음 방송은 총감연 활동 전반을 이야기하는 가벼운 토크였는데, 다음날 김어준 씨가 만나자고 하더군요. 김어준 씨는 “종편을 집중 감시해야 한다. 그걸로 <파파이스>에 고정 출연해서 이 문제를 계속 알려보자. 그렇게 종편을 제대로 모니터하려면 얼마가 필요하겠냐”고 물었어요. 저는 소심하게 한 달에 300~400만 원이라고 할까 하다가 큰마음 먹고 800만 원 정도면 할 수 있겠다고 했죠. 김어준 씨가 그걸로는 부족하다면서 1,200만 원을 모아보자고 했어요. <종편때찌> 이름도 김어준 씨가 지었고요. 그 후 1년 반 동안 <종편때찌> 코너를 매주 했어요.
그때 5,000여 명이 민언련 회원으로 가입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으로는 고민도 들었죠. 회원분들에게 대선이 끝날 때까진 민언련이 실망스럽더라도 후원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회원분들이 빠져나가지 않은 걸 보면 그래도 민언련이 실망을 주지는 않았구나라고 생각해요.
<종편때찌>가 종편만 감시하던 프로그램은 아니었어요. KBS, MBC 보도사례도 갖고 나가서 언론개혁 관련된 주제도 이야기했죠. 덕분에 언론의 문제점을 계속 알리는 효과를 얻었고요. 나중에 종편에 출연한 당사자들이 민언련을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고 들었어요. 누가 감시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불안감을 주잖아요. 우리에게 직접 항의하진 않았지만, 자기들끼리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도 종편의 문제는 심각하지만, 종편 초기에 비하면 확실히 종편의 막말이 줄어들긴 했죠.
공시형 우리 감시 덕분에 종편 재승인 점수가 올라가는 게 아닌가 싶어요(웃음).
김언경 그런가요? 그렇게 생각하면 안타깝다고 하겠지만, 실제 방송이 나아졌다면 그것대로 의미는 있다고 봐야죠. 그런데 종편이 나아졌다고 보기엔 아직 한심한 방송이 많으니 문제입니다.
공시형 종편이 처음 등장한 계기가 미디어법 날치기 사건이었잖아요. 당시 민언련은 어떻게 대응했나요?
김언경 그때는 민언련을 퇴사하고 재택근무로 방송독립포럼이란 작은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었어요. 제가 집에서 토론회 기획하며 편하게 지낼 동안 민언련은 몸으로 미디어법 날치기를 막기 위해 여기저기서 시위를 펼치며 고생스럽게 일했죠. 민언련이 ‘조중동방송 반대운동’ 같은 소책자를 만들었는데 내용이 참 좋았어요. 그걸 100장인가 한 묶음씩 사서 제가 사는 공동체마을 카페에 갖다 놓았던 기억이 나요. 미디어법이 날치기로 통과되는 과정을 보면서, 세상에 무슨 저런 일이 다 있나 하는 허탈감이 들었어요. 게다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에 방송 ‘하나’ 정도 허가해주려나 했지, 조중동에 매경까지 4개의 종편이 한꺼번에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정권의 탈법적인 언론장악 태도가 이렇게 뻔뻔한가, 그런 분노가 있었죠.
공시형 아무리 나쁜 제도도 한번 생기고 나면 없애기가 힘이 드니 무섭습니다.
김언경 한 번 만들어지면 나중에 없애기가 정말 힘들죠. 저는 종편이 이렇게 보도와 시사를 엉망으로 한다면 종편 승인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굳이 방송을 계속 하고 싶다면 일반PP(방송채널사용사업자‧Program Provider)로 전환해서 <미스터트롯>이나 <하트시그널> 같은 것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종편 기자들도 그렇지만, 제 친구마저도 노동자의 생계를 걱정하는 이야기를 해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어요. 종편 기자도 노동자고, 노동자의 권리는 중요해요. 그런데 한번 이상한 방송사를 만들고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방송이 개선되지 않아도 노동자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국민이 계속 봐줘야 하고, 다 용서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언젠가는 나쁜 방송, 나쁜 신문이 끝날 때가 있을 것
공시형 지금 전임 사무처장과 후임 사무처장 모두 있는데요. 후임 사무처장에게 남긴 과제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김언경 사무처장으로 있으면서 좀 불안했어요. 민언련이 과도기라고 생각했거든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분이랄까요. 열심히 하는 것을 멈추는 순간 후원이 끊길 까봐 불안했던 것 같아요. 민언련의 현재 활동을 유지하려면 후원 규모도 유지되어야 하거든요. 저는 회원 배가에는 성공했지만 안정화를 못 한 측면이 있는데요. 후임 사무처장이 민언련을 안정화시키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단체로 발전시켜주면 좋겠어요. 회원에게는 더 후원하고 싶은 단체, 활동가들에게는 더 다니고 싶은 단체이자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단체가 되도록 힘써줬으면 좋겠습니다. 민언련 활동가 중에 그만두는 사람이 많은데요. 언젠가는 민언련 활동가가 되면 동네잔치를 할 정도로, 훌륭한 곳에 들어갔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조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공시형 요즘 총선 보도도 그렇고 쏟아지는 김정은 사망설 보도를 접하다 보면, 언론개혁에 성공해서 우리 단체가 소임을 마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언론이 먼저 망해서 우리도 같이 망하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김언경 글쎄요. 그런 일이 없어서 걱정 아닌가요? 물론 언론이 국민의 알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런 책임 없이 정말 엉망인 보도를 하고, ‘찌라시’ 파는 회사처럼 행동하는 언론사까지 보호할 필요는 없죠. 자격 없는 언론사는 망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반면 언론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언론사에게는 구독과 후원이 몰리면서 건강한 언론이 더욱 많아지도록 하는 것도 시민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나쁜 신문, 나쁜 방송이 끝날 때가 있을 거라 믿어요.
최근 윤미향 당선인과 정의기억연대 관련 보도를 보면 참담한데요. 새벽이 오기 전이 가장 어둡다고 하잖아요. 언론사들이 지금처럼 계속 나쁜 행동을 하다가는 국민에게 버림받는다는 걸 보여줘야 하고, 그들의 문제를 꾸준히 알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책임한 ‘김정은 사망설’ 보도로 갑자기 언론이 망하진 않겠지만 그들의 힘이 약해져 저런 몰상식하고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보도를 할 때 국민들이 좀 더 빠르게 이건 아니라고 태클을 걸 수 있는 힘이 생기면 좋겠어요. 그런 큰 힘이 결집될 수 있을 때까지 민언련이 역할을 하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신미희 우리나라가 자본주의 사회잖아요. 자본주의 관점으로 보면 불량제품을 생산하고 소비자에게 해를 끼치면 소비자들은 그 제품을 자연스럽게 안 사게 되어요. 그런데 언론이 불량 기사를 내고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보도를 계속 하는 데도 그런 언론 상품을 만드는 언론사가 망하지 않고 오히려 잘 되는 것은 뭔가 비정상적인 힘이 있는 것이죠.
공시형 광고비 때문이겠죠. 열독률과 구독률이 떨어지는데 매출이 오르니까요.
신미희 그걸 바로잡는 세상이 되어야죠. 열망만 가질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를 만들면 그런 세상이 오지 않겠어요?
김언경 최근 언론소비자주권국민캠페인(언소주)에서 조선일보 광고주 불매운동을 다시 하고 있는데요. 언소주가 2008년 보수언론 광고주를 상대로 불매운동을 벌이면서 임원진이 투옥되는 등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민언련도 불매운동을 열심히 함께하다가 활동가가 기소되기도 했어요. 요즘 언론 상황을 보면 광고기업 불매운동 수준 이상의 실질적으로 언론사들이 타격을 입을 만한 운동방식을 고민하고, 그런 법제도를 만들어야 된다는 생각도 듭니다. 뭔가 이런 결정적 핞방을 날리지 못하더라도 민언련의 노력으로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단 국민이 언론을 옛날처럼 믿지 않는 것, 언론개혁을 위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만으로도 좋은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공시형 민언련 공동대표로서 꼭 하겠다는 것이 있으면 말해주세요.
김언경 사무처장을 그만두면 민언련 후원회장 같은 걸 하고 싶었어요. 유명한 사람들, 민언련의 얼굴이 될 사람들을 찾아보면서 회원이 되어달라고 조르고 다니는 일을 해보려고 했죠. 언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 언론개혁이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꼭 민언련 후원회원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요. 민언련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원과 문화적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회원배가운동을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인터뷰·정리 신미희 사무처장·공시형 활동가
사진 이병국 이사 영상편집 고은지 활동가
[날자꾸나 민언련 6월호 PDF 파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