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40주년, <오! 꿈의 나라>에서 <김군>까지
우리 민언련은 해마다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광주 순례를 다녀온다.
광주행 버스에서 2003년 5월 18일 방송한 KBS 일요스페셜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를 관람한다. 다큐멘터리 주인공‘위르겐 힌츠페터’는 당시 서독 제1공영방송 ARD 일본 특파원이었다. 위르겐은 신군부가 저지른 참혹한 학살 현장을 취재해 세상에 알렸다. 한국 신문과 방송 어디에서도 광주 관련 보도는 없었다. 1980년 5월 22일 서독 제1공영방송 저녁 8시 뉴스에 처음으로 '광주'가 등장했다. 같은 해 9월 위르겐은 《기로에 선 한국》이란 다큐멘터리를 내놓았다.
1986년 11월 서울 광화문에서 시위를 취재하던 위르겐은 사복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했다. 목뼈와 척추가 부러진 중상을 입고 고국으로 돌아가 1년여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렸던 위르겐은 2016년 1월 별세했다.
‘5·18 묘역에 묻히고 싶다’는 소망을 기리기 위해 고인의 머리카락과 손톱, 유품을 구묘역 입구에 안치했다.
2017년 8월 2일, 서울에서 위르겐을 싣고 광주까지 달려간 택시기사 김사섭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 <택시운전사>가 개봉했다. 배우 송강호가 택시 운전사 만섭을, 안젤리나 졸리가 주연한 할리우드 액션 영화 <원티드>에서 주인공 웨슬리(제임스 맥어보이) 친아버지를 연기한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기자 피터로 등장한다.관객 1,200만 명이 위대한 목격자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보도한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의 한 장면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모두 들었다.
너무 슬퍼 눈물을 흘리면서도 나는 기록했다.
한국 언론에서 거짓을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모든 것은 내 눈 앞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
피할 수 없는 진실이기 때문이다.
- 위르겐 힌츠페터
올해는 5·18민주화운동 40주년이다.
신군부에 맞서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사수하려 했던 광주시민의 항쟁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곡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 됐다. 신군부를 향한 대한민국 시민의 격렬한 저항은 1987년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졌다. 광주에서 불붙어 정당성을 토대로 확산한 민주주의 투쟁은 신군부가 세운 정권을 조속히 무너뜨리는 데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1989년 16mm 장편 극영화 <오! 꿈의 나라>를 시작으로, 30여 년간 5·18 광주를 모티브로 삼은 영화 이십여 편이 개봉했다. <오! 꿈의 나라>는 가슴 아픈 광주의 진실과 거대한 장막을 뒤집어쓴 미국의 실체를 고발했다. 영화는 성조기 위로 미국 국가가 흐르며 끝난다. ‘광주항쟁을 최초로 다룬 장편 극영화, 진정한 민족영화’라는 수식어가 붙었지만, 1989년 1월 27일 신촌 한마당 예술극장과 신선소극장에서 1회씩, 겨우 2회 상영할 수밖에 없었다. 누적 관객 38명. 당시 문화공보부와 서대문구청은 이 영화를‘불법영화’로 규정하고 정상 상영을 탄압했다. 한마당 극장장(유인택)에 대한 세무 사찰과 소방 점검, 사법 고발 등 치졸한 수단을 동원해 압력을 행사했다. “현대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공유하자”는 기치를 내세운 민족영화 제1탄은 당국이 휘두른 칼바람에 잠시 주춤했지만,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5·18민주화운동을 대중에게 전면적으로 소개한 첫 번째 작품이다. 한국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절대 꺼지지 않은 도화선을 스크린에 옮겼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 영호가 절망에 휩싸여 울부짖는 모습
2016년 4월 30일 광주트라우마센터와 5·18기념재단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치유시네마 토크_박하사탕’을 열었다. 1980년 5월 계엄군으로 투입된 영호(설경구)가 쏜 오발탄을 맞고 한 소녀가 죽었다. 순수했던 청년 영호는 걷잡을 수 없이 쇠락하며 폐인이 된다. 영화는 1999년 봄 현재부터 94년 여름, 87년 봄, 84년 가을, 80년 5월, 79년 가을을 거스르며 한 사람의 파멸을 세밀하게 살핀다.
토크에 참가한 이창동 감독은“박하사탕이 영화로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며“단순히 영화라고 받아들이면 폭력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수 있다. 영화를 만들 때 관객들이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이라고 느끼게끔 신경을 썼다.”라고 말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절망에 휩싸인 김영호가 울부짖는다. 후회해도 이젠 소용없다. 가해자이며 피해자였던 남자의 삶은 비극으로 끝났다.
2015년 극우 논객 지만원은 광주 항쟁 당시 현장 사진 속 한 남자를 지목해 ‘북한특수군 제1광수’라고 주장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 얼굴에 번호를 붙이고 ‘광주 북한특수군(광수)’라며, ‘광수’ 600여 명이 광주로 내려와 5·18에 개입(!)했다고 말했다.
2019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김군>은 당시 거리에 섰던 사람들, 시민군 인터뷰를 근거로 사진 속 남자의 행방을 좇는다. 울분과 두려움, 슬픔과 공포, 40년이 지나도록 그날의 아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부디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한다.
2017년 작가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강은 따로 발표한 수상 소감문 <그 말을 심장에 받아 적듯이>에서 “광주는 결코 끝난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무엇이다.”라고 말했다.
40년, 여전히 5·18은 현재 진행형이다.
광주에선 진상 규명을 위한 제보와 시민 고백, 증언을 구체적으로 총화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유튜브를 중심으로 난동질하는 각종 왜곡에 대한 모니터링과 법률 대응도 ‘5·18 진실조사’작업에 힘을 싣는다.
글 김현식 회원
[날자꾸나 민언련 5월호 PDF 파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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