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늦가을 아침, 박석운 대표가 숨이 넘어가는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거두절미. 민언련 30주년 기념식에 맞춰서 ‘민언련사’를 써내라! 저 역시 거두절미. 못합니다! 그때 저는 적어도 1년간 치열한 백수의 삶을 살겠노라 선언하고, 이번에는 또 어디로 떠나볼까 여행책자를 뒤적이던 중이었어요. 무위도식의 삶이 반년 이상 계획되어 있는 사람에게 책을 쓰라니요…. 게다가 30주년 기념식이면 겨우 두 달 남았는데 어떤 대문호도 그 기간에 ‘민언련사’를 쓸 수는 없어요.
그런데 박석운 대표같이 저돌적이라고 알려진 분들은 오히려 단호한 거절이 통합니다. 진짜 무서운 존재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집요한 분들이죠. 당시 신태섭 대표와 김경실 부이사장은 그런 점에서 민언련 투톱이라 할 수 있었어요. 저는 점심 한번 먹자는 두 분의 꼬임에 넘어가서 인도카레 한 접시를 얻어먹게 됩니다. 그리고는 ‘1년 전부터 준비한 일인데 사고가 나버렸어요’, ‘지금은 유진 씨밖에 쓸 사람이 없어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등등 조용조용 주문과도 같은 설득에 넘어갔습니다.
좋아요, 쓸게요. 그런데 30주년 기념식까지는 불가능해요. 대신 내년 3월 총회까지 ‘민언련사’의 1부를 쓸게요. 민언련이 시민단체로 전환하기 직전, 그러니까 1990년 이전의 역사를 꼼꼼하게 써볼 수 있을 것 같아요. 30주년 기념식에는 화보집을 내는 걸로 하시죠. 제가 사진을 고르고 캡션 다는 일 정도는 도와드릴게요.
협상이 성사됐고 저는 다섯 달 정도 미친 듯이 ‘민언련사’에 매달렸습니다. 빨리 쓰고 다시 놀아야 했기 때문이죠. 약속한 시간에 칼같이 원고를 넘겼어요. 비용 문제 때문에 ‘민언련사’의 실제 발간은 늦어졌지만 어쨌든 저는 마감을 지켰습니다.
원고를 쓰고 책이 나오기까지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있었지만 덕분에 저는 생각지 못했던 큰 것을 얻었습니다. 비로소 민언련과 정서적 심리적으로 분리될 수 있었던 거예요. 1995년 스물다섯에 민언련 간사로 들어온 이후, 저에게 ‘민언련의 일’과 ‘나의 삶’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민언련이 비난을 받으면 내가 비난을 받는 것처럼 괴로웠고, 민언련의 이름으로 나가는 모든 것은 오류가 없어야 했고, 그래서 활동가들에게 미움 받는 선배가 되는 게 두렵지 않았으며, 조직 안의 작은 문제에도 지나치게 몰입하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역사를 쓴다는 것은 큰 흐름을 보는 일이더군요.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역들도 언젠가는 무대에서 퇴장하고 당시에는 격렬한 논쟁거리가 지금의 시각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도 느껴지고요. 무엇보다 민언련의 첫 번째 역사를 남기는 일에 온힘을 다 쏟고 나니, 이제 나는 이 조직에 할일을 다 한 듯싶고 일말의 미련이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 좀 떨어져야 할 것 같았어요. 실제로 민언련에 대해 객관적인 시각이 생기기 시작했고 회의 때 격론을 벌이는 일도 줄어들더군요.
말하자면 이것은 힘껏 민언련을 사랑했던 저만의 이별 방식입니다. 물론 지금도 저는 민언련 이사로서의 작은 역할을 맡고 있고 대외적인 활동을 할 때면 조직에 누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제 ‘민언련의 일’과 ‘나의 삶’은 각각 다른 차원에 있어요. 언젠가 민언련에서 해야 할 작은 일마저 없어지면 그 때가 우리의 해피엔딩입니다.
민언련 35주년이 다가옵니다.
저는 회원 여러분들이 지치고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민언련을 사랑해주시기 바랍니다. 민언련의 잘못이 내 잘못처럼 부끄럽고, 민언련이 욕을 먹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민언련의 작은 일에도 간섭하고 싶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사랑하다가 어느 날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자, 나는 너에게 모든 걸 쏟아 부었어, 새로운 사람들과 행복하렴 하면서 쿨 하게 헤어지시기 바랍니다.
제가 보기에 민언련은 지금 시민운동, 언론운동의 전환점을 맞고 있습니다. 미디어환경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미디어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성숙한 시선은 전문가의 논평을 우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민언련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디로 가야할까요? 회원님들이 민언련을 치열하게 사랑하기엔 지금이 딱 좋은 때입니다.
덧붙여 여러 가지 사정상 ‘속성’으로 민언련에 사랑을 쏟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민언련사’ 제2권에 참여하시길 권합니다. 진하게 사랑하고 아름답게 거리두기를 하실 수 있을 거예요. 1990년대 이후 민언련의 모습을 과장하지도 미화하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 복원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약간의 개인적인 부탁을 드리자면 이 시기부터는 저도 등장인물이니까 잘 좀 써주셨으면 합니다.
김유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