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언론시민연합의 회원들은 모두 민언련이 주최하는 기자회견, 집회, 농성에 사실 함께 하고 있다. 일상이 바빠 몸이 못 가도 마음이라도 보내는 것이 회원들의 심정이다. 고 김용균 노동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 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투쟁 현장에 무려 44년 간 자리를 지킨 ‘민언련 회원’도 있다. 그가 발걸음 한 현장이 곧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였고 그가 시민들과 함께 든 촛불이 보수 정부의 국정농단과 언론장악을 끝냈다. 전 민언련 공동대표, 직업이 ‘공동대표’인 박석운 회원이다.
민주언론시민연합 회원으로서의 일상과 생각을 나누는 ‘회원 인터뷰’ 자리에 불과 1년 반 전까지 민언련의 공동대표였던 박석운 회원과 마주 앉으니 잠시 어색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습니다. 김언경 사무처장은 “우리 군기가 든 것 같아”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민언련의 일원이 된 사연부터 함께 회상하면서 인터뷰는 시작됐습니다. 대부분의 회원들이 아마도 잘 모를 ‘박석운 민언련 공동대표’의 역사는 어떤 그림일까요? 엄혹했던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그때, 박석운 회원은 민언련의 ‘구원투수’로 등판했습니다.
이봉우 : 2008년 3월부터 2018년 3월까지, 딱 10년을 민언련 공동대표를 역임하셨는데요. 처음에 어떻게 ‘섭외’가 되신 건가요?
박석운 : 2008년 2월 25일 이명박 정권이 출범했고 그 때 민언련도 어려웠어요. 그래서 좀 도와달라고 요청이 왔죠. 언론 문제에 늘 관심이 컸고 또 제가 워낙 문어발처럼 아무 운동이나 다 하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언론에 대해 조금밖에 모르는데 괜찮겠나 걱정했죠. 연대운동을 늘 계속 해오셨으니 와서 도와달라해서 구원투수 정도로 생각하고 수락했어요.
김언경 : 시기가 좋지 않았어요. 엄혹했던 시절이예요.
박석운 : 구원투수로 왔는데 제가 오니까 일거리가 막 터지더라구요. 공정 언론 투쟁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광우병 촛불이 시작됐고, 그래서 광우병 촛불에 언론 문제를 접목시키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했어요. 그 때 촛불시민들이 조선일보 앞에 가서 조선일보 신문을 쓰레기통에 던지는 그런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죠. 그 때 시작해서 어쩌다보니 공동대표를 5번 연임해서 2018년, 이른바 ‘돌마고’, KBS‧MBC 정상화 투쟁을 끝으로 10년만에 제가 졸업을 했어요.
어렵게 되찾은 ‘공영방송’, 사회적 약자 대변해야 ‘진짜 정상화’
이봉우 : 긴 시간 동안 민언련 공동대표로 활약하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이슈는 어떤 걸까요?
박석운 : 아무래도 ‘돌마고 투쟁’(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이죠.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 때 시민들이 ‘재벌도 공범, 검찰도 공범’이라고 얘기했거든요. 거기에 ‘언론도 공범’이라고 추가한 것이죠. 그래서 그 당시 촛불집회에서 언론 이슈를 가장 중요한 ‘3대 개혁 과제’로 상정해서 촛불 시민들이 공감해주셨어요. 고 이용마 MBC기자도 연설을 하고 ‘언론 개혁’도 시급한 과제라는 여론을 이끌어낸 것이죠. 그래서 참 보람이 있었어요.
이봉우 : 그런데 사실 공영방송 KBS‧MBC는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박근혜 정부 부역자들이 물러나지를 않았잖아요.
박석운 : 촛불정부는 들어섰는데, 방송은 안 바뀌는 거죠. 여전히 적폐 세력들이 KBS‧MBC를 틀어쥐고 있던 것이죠. 그래서 촛불정부 출범하고 적폐청산 중 가장 중요한 이슈로서 공영방송 정상화를 내세우고 우리 민언련에서 ‘돌아오라 마봉춘 고봉순’, 줄여서 ‘돌마고’라고 작명을 했죠. 그렇게 민언련이 제안을 해서 KBS, MBC, 언론노조와 함께 일을 했죠. 그때 제가 ‘내부에서만 투쟁해서는 안 된다, 줄탁동시를 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줄탁동시’는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안에서 쪼고 밖에서도 쪼아서 깨고 나온다는 뜻이거든요. 공영방송 정상화도 내외부에서 함께 투쟁이 었어야 한다는 의미예요. 그래서 시작했는데 그렇게 오래 갈지 몰랐어요.
김언경 : 거의 1년이었는데 참 힘들었죠. 제가 먼저 사퇴할 뻔 했어요(일동 웃음)
박석운 : 2017년 7월에 시작을 해서 2018년 3월까지 갔죠. 촛불항쟁도 이미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한 두 세 달 하면 끝날 줄 알았거든요. 어떻게 보면 죽은 권력의 하수인들이 마지막까지 KBS‧MBC를 움켜쥐고 있는 상황이어서 쉽지 않았어요. 적폐들이 그만큼 질기다는 걸 모두가 다시금 깨달았죠. 우리도 더 이상은 밀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강했고 이렇게 촛불항쟁 승리의 기세를 올라타고 진행하는 투쟁이라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지만 완성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공영방송이 장장 10년 가까이 망가졌으니까.
이봉우 : KBS‧MBC가 망가진 세월이 길어서 회복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입니다.
박석운 : 너무 멍이 많이 들었고, 미디어 환경도 급변했죠. 그러는 동안 KBS‧MBC 언론인들이 오랫동안 유배지로 쫓겨나 있다 보니까 많이 무뎌진 것 같아요. 앵커 얼굴만 바뀐 것 아니냐, 이런 지적을 피할 수 없어요. 물론 PD 저널리즘은 굉장히 빠르게 회복이 되어서 정말 보람도 느끼고 감동하기도 했지만 보도를 보면 정말 실망이 큽니다. 저널리즘은 실종되고 흔한 양비론, 중계방송 수준을 벗어나지를 못해요. 일본 아베의 망동을 보도할 때도 당연히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이 뭔지 그걸 먼저 보도를 해줘야 하는데 각 정당이나 아베 등 일본의 입장을 그냥 읊조리는 보도만 너무 많았지요. 공영방송만이라도 이런 입장, 저런 입장들 중 저건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렸다, 이런 문제점이 있다고 분명하게 보도를 해줘야 해요. 즉, 시시비비를 해줘야 한다는 것이죠.
또 하나, 이용마 기자가 얘기했죠. 어려운 사람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하고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긴 보도를 해줘야 합니다. 그게 사회 공공성을 담보하는, 저널리즘 관점에서 질 높은 보도예요.
민청학련부터 코리아게이트까지…현대사와 함께 한 청년 시절
다시 ‘회원 박석운’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박석운 회원은 무려 44년 간 시민‧노동자들과 함께 투쟁 현장에 섰습니다. 그 역사는 곧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였습니다.
김언경 : 오랫동안 시민운동을 해오셨는데 어떻게 이 판(?)에 발을 들이게 되셨나요?
박석운 : 거의 빨려 들어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운명 같은 것이죠. 처음엔 학생운동을 했죠. 1973년에 대학 입학하고 곧바로 민주화 투쟁을 했어요. 그렇게 1983년까지는 학생운동을 하고, 그 이후엔 노동운동을 하고 1996년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 저지투쟁을 시작으로 사회연대 운동을 했죠. 요약하자면 그래요.
이봉우 : 처음으로 경험한 본격적인 투쟁 현장이라고 하면 어떤 걸까요?
박석운 : 대학교 2학년 때 민청학련 사건(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1974년 발생한 박정희 정부의 대표적인 공안 조작 사건으로서 무려 8명이 사법 살인으로 희생됐다. 2009년 이후 관련자들에 대한 무죄선고가 잇따랐다_편집자주)으로 감옥에 갔어요. 그런데 감옥을 가서 보니까 내가 소년수였어요. 아직 생일이 안 돼서 대학생인데도 만 20세가 안 됐더라고요. 그래서 군법회의에서 기소유예가 됐는데 기소유예인데도 4개월 동안이나 잡아 뒀죠. 미성년이어서 저들이 군대를 보낼 수 없었지요. 저는 다시 복학해서는 학교를 조심히 다니다가, 졸업시험까지 마친 상태였는데, 박동선 뇌물사건(일명 코리아게이트, 1976년 박정희 정부가 공작원과 사업가를 동원해 미 의회의 대규모 돈로비를 벌이다 적발된 사건_편집자주)이 터져서 진상을 규명하라고 요구하다가 법대 동기 4학년 3명이 감옥에 갔어요. 당시가 박정희 정부의 ‘긴급조치 9호’가 내려졌던 시기여서 국내에서는 이 코리아게이트가 전혀 보도도 안 됐죠. 오히려 일본 등 해외에서 저희들 데모사건이 크게 보도가 됐다고 하더라고요.
이봉우 : 역사적 사건이 다 등장하네요. 노동운동은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하셨죠?
박석운 : 학교를 13년 만에 졸업을 하고 지금은 고인이 되신 조영래 변호사 사무실의 시민공익법률상담소에서 일했어요. 노동 상담을 한 5년 반 정도 했죠. 그 후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 권인숙 씨가 국가로부터 받은 손해배상금으로 만든 노동인권회관에 초대 소장으로 일했죠. 그렇게 노동법 상담, 교육 등으로 노동운동을 지원했는데, 1996년에 노동법 개정이 추진되면서 노동관계법개정위원회(노개위)를 정부가 만들어서 노⦁사⦁공익 모두 참여하게 했지요. 그 때 각계 시민사회단체들이 연대해 구성한 ‘올바른 노동법개정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에 집행위원장을 하게 됐죠. 그런데 그 해 12월26일 새벽에 당시 여당(신한국당)이 야당들에게 연락도 안 한 채로 국회의사당 별관에서 노동법⦁안기부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어요.(당시 여당 단독으로 강행한 개정안에는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파견근로제, 정리해고제 등 노조 탄압‧쉬운 해고‧외주화를 촉발시킨 내용이 대거 포함됐다_편집자주) 그래서 민주노총은 총파업에 돌입하고 시민사회단체들은 ‘노동법⦁안기부법 개악저지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를 출범했는데 제가 거기 집행위원장을 맡게되면서 본격적으로 사회연대운동에 나서게 됐죠.
잊을 수 없는 ‘소년 문송면’, 그리고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태’
이봉우 : 많은 투쟁 현장에 계셨는데, 특히 마음이 아팠던 현장도 있을 것 같아요.
박석운 : 문송면 군이라고 있어요.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는데 1988년 7월 2일에 사망했어요. 제가 문송면 군을 상담했거든요. (여기서 박석운 회원은 잠시 눈시울을 붉히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_편집자주) 집이 충남 서천이었고 중학교 3학년 졸업반이었어요. 그 때는 집안형편이 어려운 소년들이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문송면 군도 야간고등학교 다니려고 교감 선생님 손 잡고 친구들 한 11명이랑 같이 서울에 올라온 거예요. 그런데 고등학교는 입학도 못했어요. 12월에 상경해서 ‘협성계공’이라는 온도계, 압력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죠. 수은을 취급하는 일인데 안전교육도 못 받았어요. 결국 두 달도 안 돼서 몸이 아팠던 겁니다. 몸이 아파 고향에 내려갔는데 집에서 발작을 했어요. 병원에서도 원인이 뭔지 몰랐다고 합니다. 그 당시만 해도 수은 중독이 생소해서 어떤 대학병원에 갔는데도 수은중독인지 뭔지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어요. 결국 나중에 서울대 소아병동까지 가서야 수은 중독인 걸 안 거예요. 기준치의 몇 십 배 수은 중독, 또 시너와 같은 유기용제 중독도 나왔어요. 그런데 노동부에 산재 신청을 하니까 노동부가 인정을 안 했어요. 사업주확인 도장이 없다는 이유였어요.
이봉우 : 회사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박석운 : 두 달 만에 무슨 수은에 중독됐냐고 인정을 안 했죠. 농약 치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니냐는 말부터 시작해서 심지어 진단을 내린 의사한테도 회사가 행패를 부렸다고 해요. 그러다가 소개를 받아서 저와 상담을 하게 됐어요. 저는 언론 보도를 통해 공론화를 해야 해결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아는 기자 후배에게 상황을 자세히 설명해주기도 했어요. 결국 동아일보에서 보도를 해줬고 보도가 나자 노동부도 움직여서 역학조사, 정밀조사를 했죠. 그게 또 한 달 반이 걸려서 수은 중독이 확인됐고 산재 처리도 결정이 됐어요. 그런데 당시 문송면 군이 있던 서울대병원이 산재 지정병원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산재 적용이 되는 가톨릭대학 성모병원으로 옮겼는데, 옮긴 지 이틀 만에 죽었어요. (박석운 회원은 다시 한 번 눈물을 훔치며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굉장히 충격이 컸어요. 다행히 언론에서는 동아일보, KBS 등 유수의 매체에서 모두 크게 보도를 해줬어요. 최초로 KBS 9시 뉴스에 직업병이 보도가 된 사례죠.
이봉우 : 문송면 열사 사건 이후에는 ‘직업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좀 달라졌을까요?
박석운 : 곧바로 불거진 사건이 원진레이온 직업병 참사예요. 원진레이온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받은 돈으로 지은, 비스코스레이온 실을 만드는 공장이었어요. 기계를 일본 도레이사에서 들여왔는데 녹이 슨 기계에 페인트 칠을 해서 보냈어요. 일본에서 이미 직업병 때문에 굉장히 문제가 됐던 기계를 아무 정보도 받지 못한 채 가지고 온 것이죠. 우리 노동자들은 모르고 가동을 했는데 다 환자가 됐고 직업병으로 사망한 사람만 200명이 넘어요. 장애 판정 받은 사람도 900여 명이 되는 그런 사건인데 처음엔 노동자들이 직업병인지도 모르고 중풍, 신경계통 마비 등으로 고통을 겪었어요. 당시에 9시 뉴스에서 문송면 군 직업병이 보도되니까 원진레이온 피해자들도 ‘이게 직업병이구나’ 싶어서 연락을 한 것이죠. 상담을 하고 보니까 상황이 너무 심각했어요. 당시에 고 노무현 의원이 초선 시절이었는데 제가 도움을 요청해서 문송면 군 사건에도 나서줬거든요. 노무현 의원이 원진레이온 현장을 갔다 왔는데 노동가요 가사에 나오는 ‘죽음의 지옥같은 노동 현장’이라고 했어요. 1988년 1차 투쟁, 1991년 2차 투쟁까지 거쳐서 결국 산업재해를 인정받았어요. 원진레이온 직업병인정 투쟁도 힘겨웠죠. 1991년 2차 투쟁 때는 산재 인정을 안 해줘서 부득이 장례식을 회사마당에서 하겠다고 영구차를 몰고 갔는데, 회사 측이 막아서 영결식을 못하고 자연스럽게 관을 공장 앞에다 안치하고 137일 간 농성투쟁을 하기도 했어요.
김언경 : 그 피해자 분들이 지금도 계속 고통을 받고 있죠?
박석운 : 계속 치료를 받고 있어요. 원진레이온이 결국 1993년에 폐업했는데 이를 계기로 원진직업병관리재단을 만들었어요. 직업병 피해자들에게 재해위로금을 드리고, 직업병 전문 병원, 직업병 전문 연구소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기금을 조성했어요. 그렇게 해서 설립된 게 현재의 녹색병원, 그리고 노동환경건강연구소예요. 저는 지금도 그 재단과 녹색병원에서 역할을 하고 있어요.
‘박근혜 퇴진 비상국민행동’의 시작은 ‘민중총궐기’
오랫동안 민언련 공동대표를 역임하시고 시민운동에서 워낙 잘 알려진 박석운 회원이지만 이렇게 현장 하나하나 구체적인 사연을 꺼내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민언련 활동가들도 처음 듣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박석운 회원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입니다.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획을 그은 그 촛불항쟁의 현장에도 박석운 회원이 있었습니다.
김언경 : 퇴진행동(박근혜 정권 퇴진 범국민행동)에서도 공동대표셨는데, 그 이야기도 해보죠.
박석운 :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촛불항쟁은 그 이전의 민중총궐기투쟁이 선도했던 측면이 있어요. 2015년 11월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청년들이 힘을 모아서 “못살겠다. 갈아엎자”라는 구호로 민중총궐기투쟁을 시작했죠. 당시 격렬하게 투쟁했고 그때 경찰의 물대포 직사로 결국 백남기 농민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또 1년 간 백남기 농민 진상규명 투쟁 등을 이어가면서 2016년에도 민중총궐기투쟁을 준비하던 와중에 최순실 사태가 터졌어요.
이봉우 : 박근혜 퇴진 촛불의 시작이 민중총궐기투쟁이었군요?
박석운 : 그렇죠. JTBC 태블릿PC 보도를 보면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바로 다음날 긴급회의를 해서 이거는 제대로 한 번 투쟁해보자고 얘기를 했고 민중총궐기투쟁본부에서 곧바로 장소 물색해서 그 주 목요일 저녁부터 촛불집회를 했어요. 그렇게 예열을 해서 토요일에 집중촛불집회를 했는데 장소가 섭외가 안 돼서 청계광장에서 했죠. 그렇게 급하게 만든 1차 촛불집회가 그야말로 빵 터진 겁니다. 최대 5000명 정도 오실 걸로 생각해서 앰프 등을 준비했는데 그 날만 2만 명이 오셨어요. 워낙 많이 오시다보니까 신고된 행진 경로를 이탈하게 됐어요. 경찰들이 막아서 멈추게 되니까 많은 시민들이 자연발생적으로 신고가 안 되어 있던 광화문광장까지 치고 나간 것이죠. 아마도 광화문 사거리의 경찰저지선이 돌파된 게 4⦁19혁명 이후로는 그날이 처음이었을 겁니다. 당시 경찰도 이렇게 많이 모일 것이라 예상을 못했는지 뒤늦게 부랴부랴 세종대왕상 쪽에 견고하게 저지선을 쳤어요. 우리 주최측은 신고된대로 행진하려 했는데, 말 그대로 시민들이 그냥 돌파한 거예요.
이봉우 : 그래서 촛불집회가 처음부터 크게 화제가 됐죠.
박석운 : 그럼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백남기 농민 장례식을 광화문광장에서 하면서 2차 촛불집회도 광화문광장에서 하게 됐습니다. 그 때도 사전에 기자들이 몇 명 올 것 같냐고 물었는데 제가 5만 명 쯤 올 것 같다고 제 나름대로는 많이 불렀어요. 그런데 2차 촛불집회에 20만 명이 왔어요. 너무 놀라운 장면이예요. 심지어 행진을 하고 광화문광장에 돌아왔을 때 30만 명으로 더 늘어나 있었죠. 모두가 놀랐어요. 행진을 청와대로 가려다가 방향을 틀어 시내로 간 것도 굉장히 우연적인 사건이었어요. 그 때 대학원생 한 분이 왜 행진하면 늘 청와대로만 가느냐, 국민들 속으로 가야 한다고 SNS에 글을 썼거든요. 그게 또 화제가 됐어요. 회의하면서 제가 그 말이 맞다고 했어요. 미선이‧효순이 촛불 때부터 제 로망이 가족들 모두 손잡고 나오는 그런 집회거든요. 행진을 ‘국민 속으로, 민중 속으로’ 하면서 드디어 그게 된 거예요. 그래서 3차 촛불을 또 준비했는데 사실 그 3차 촛불이 우리가 몇 달 간 준비한 민중총궐기 전국 집중 집회 날이었어요. 그 때 다른 시민사회단체들도 많이 합세하면서 ‘퇴진행동’이 만들어진 거예요. 2차 시국회의를 하면서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이른바 ‘퇴진행동’으로 이름을 정하고 범국민 촛불을 하겠다고 선언했죠. 그리고 그 3차 촛불에서 100만 명을 넘긴 겁니다. 3차 촛불 이후에는 정말로 흔히들 알고 계시는 그 범국민촛불이 됐죠.
가장 시급한 개혁은 ‘사회 공공성 확대’
인터뷰는 어느덧 2시간을 넘겼습니다.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 비하인드 스토리는 너무 많아 추후에 따로 인터뷰를 해 ‘민언련 단독 보도’로 내기로 약속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 박석운 회원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는 무엇일까요?
김언경 :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개혁을 딱 하나 뽑아주신다면 무엇일까요?
박석운 : 사회 공공성 강화입니다. 저는 이번에 조국 법무장관 후보자를 두고 자유한국당과 언론이 쏟아내는 공세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하지만, 시민들이 실망하고 불만을 표하는 그 토양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건 분명해요. 적폐들의 가당치 않은 공세가 한 쪽에 있다면 그와 함께 짚어봐야 할 것이 바로 사회공공성이 부족한 우리 사회의 기본 토양이예요.
김언경 : 공공성 강화,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세요.
박석운 : 첫째, 비정규직 문제가 있어요. 같은 일을 하는데 형편없는 차별과 무권리, 죽음의 외주화에 노출되어 있죠. 둘째,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자조가 나오는 부동산 문제도 심각합니다. 이 부분은 혁명적 수준으로 혁파해야 해요. 주택 보유율은 100%가 넘는데 자가 보유율은 절반 밖에 안 돼요. 사회 지도층 인사들, 고위 관료들, 정치인들이 다 집을 몇 채씩 가지고 있는 것이죠. 아이들 꿈이 건물주라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어요. 셋째, 교육, 이른바 ‘스카이캐슬’의 특징은 전문직 진입 장벽이죠.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 언론인, 교수 등 전문직 집단에 들어가는 코스를 공영화해야 합니다. 지금은 사실상 시장에 맡겨져 있어요. 공공적 관리를 통해 공정성, 공공성을 확보해야죠. 이건 입시 제도를 고치는 수준을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지, 그 중에서도 노인 문제가 너무 심각해요. 대다수 노인이 복지 사각지대에 빠져있는데 옛날과 다르게 지금 자녀들은 봉양을 할 수가 없어요. 마음이 없는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봉양할 경제적 형편이 안 되어서 어려운 것이죠. 그런데 노인 복지가 지금 시장에 맡겨져 있어요. 노인돌봄 서비스는 아이들, 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꼭 공공화되어야 합니다. 지금 시장에 맡겨져 있다 보니까 시설들이 굉장히 열악해서 수용소 수준입니다. 이렇게 서비스를 공공화하면 그게 청년들도 전문직으로 일하는 양질의 일자리로도 연결이 됩니다.
언론이 약자를 대변해야 사회 공공성도 확보된다
인터뷰는 이렇게 마무리됐습니다. 마지막으로 민언련 회원들께 전하는 말씀은 우리 민언련 회원들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계신지 새삼 깨닫게 합니다.
“사회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언론이 제대로 서서 약자와 소수자, 공동체를 대변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가 공동선이라는 가치를 공유하면서 상생을 해야 좋은 사회가 되는데, 우리 민언련이 거기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널리즘의 발전에 있어 민언련이 더욱 역할을 해주길 바랍니다”
(진행 김언경 사무처장, 인터뷰‧작성_이봉우 정책팀장, 사진 이병국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