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랜 회원이시라 들을 얘기가 많을 거예요. 꼭 한 번 만나 보세요.”
이번엔 누굴 만나 소식지 ‘회원인터뷰’ 꼭지를 채울까 궁리하던 내게 김언경 사무처장이 선뜻 전화번호 하나를 건넸다. 김영일 회원. 며칠 전 촛불집회에서 만난 김에 회원인터뷰 이야기를 넌지시 똥겨 놓았다고 했다. 바로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았다. 인터뷰에 응해 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에 김영일 회원은 허허허 너털웃음을 웃었고 그 웃음소리에는 민언련과 아주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사람만이 담아 낼 수 있는 깊은 울림 같은 것이 있었다.
김영일 회원은 1992년 초에 있었던 2기 언론학교에 몸담으며 민언련과 처음 인연을 맺었다. 당시 김영일 회원은 지금은 KT로 이름을 바꾼 ‘한국전기통신공사(한국통신)’에 다니는 직장인이었지만 일이 끝나면 우리문화 모임 ‘공간 소리터’에 나가 민요와 판소리, 풍물 등을 배웠다.
“그때는 포악한 노태우 정권 시기라서, 숱한 열사들이 자기 생명을 걸고 사람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해 주려고 했어요. 저는 그런 열혈 투사들처럼 살진 못했지만 대신 그런 분들의 뜻을 보고 배우며 자랐죠. 1973년 8월 제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학교 교실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라디오를 통해 들었어요. 그때 어린 마음에도 굉장한 분노를 느꼈었어요. 역사의식 혹은 정치의식 같은 게 아마 그때부터 제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을 거예요. 이후 고등학교 때는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 소식을 듣고서 격분했던 기억도 납니다.”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들어가서도 유신 체제를 향한 김영일 회원의 증오심은 가라앉을 줄 몰랐다. 그리고 대학 4학년 때 터진 광주민중항쟁은 김영일 회원에게 언론이라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쳐 주었다.
“조중동이 80년 광주항쟁을 계속해서 폭동으로 몰았잖아요. 그런 걸 보면서, 제대로 된 언론 없이는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없겠구나, 언론이 바로 서야 민주주의가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강원도 태백 탄광에서 잠시 광부 생활을 한 뒤 1987년부터 한국통신에 다니기 시작한 김영일 회원은 그해 여름을 뜨겁게 달군 6월 항쟁을 온몸으로 겪으며 다시금 민주주의 국가를 열망하게 되었고 이후 1988년에 창간된 ‘한겨레’의 창간 주주로도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언론과 사회 문제를 향한 끊임없는 관심은 김영일 회원을 마침내 언론학교(당시 교장이 정동익 선생님이었다)로 이끈다.
“언론학교 2기 강사진에는 리영희 선생님, 김중배 선생님, 임재경 선생님, 강준만 교수, 손석희 아나운서 같은 분들이 계셨죠. 좁은 공간에 한 백여 명쯤 되는 사람들이 강의 들으러 가득 들어찼었어요. 지금 언론학교도 비슷하겠지만 그때도 언론 보도의 의제 설정이나 시민언론운동의 중요성 같은 것들을 많이 이야기했습니다.”
당시엔 같은 기수 동기들끼리 자주 만나 놀면서 끈끈한 관계를 만들어 갔다고 했다.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른 수강생들은 언론학교가 진행되는 동안 그렇게 자연스럽게 친해지며 민언련 회원이 되었고 회원이 된 수강생들은 자연스럽게 민언련 분과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실제로 2기 언론학교가 끝나고 나서 김영일 회원은 신문모니터분과에 참여하여 초대 분과장(당시는 반장)으로 활동하며 ‘언론 바로잡기’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른바 시민언론운동의 출발이었다. 그리고 92년 총선과 대선에 앞서서는 여러 민주 단체들과 함께 조직된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에 언론학교 동기들과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는 신문, 방송, 영화 이렇게 3개 분과가 있었어요. 그중 신문 분과가 가장 활성화됐었죠.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민언련 사무실에서 만나 2시간이 좀 넘도록 이야기하고, 제가 그때 정규직 직장인으로서 뒤풀이를 유도하면서 지내다 보니 다들 밤 12시 넘어서 집에 들어갈 때가 많았죠.
우선 신문마다 담당자를 정하고 모니터 용지에 1차로 모니터 내용을 적었어요. 나중에 모니터 보고서 작성할 사람에게 모니터 용지를 모아서 주면 그걸 바탕으로 그 사람이 보고서를 작성했죠. 완성된 보고서는 언론사에 팩스로 보냈고요.”
22년 전의 신문 분과도 모니터 보고서를 쓰는 과정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래된 사진첩을 뒤적거리던 김영일 회원은 1994년에 나온 낡은 자료집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신문분과 새내기를 위한 <새내기 교육 자료집>이었다.
“조중동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의협심이랄까, 그런 걸로 뭉친 분과원들끼리 의기투합할 수 있어서 그랬는지 분과 활동이 참 재미있었어요. 뒤풀이 때마다 술 한 잔 걸치며 노래 한 자락씩 부르기도 하고...(웃음) 제가 분과 활동을 ‘92년부터 ’94년 봄까지 했는데요. 그게 아마 한국에서 최초로 생긴 신문 모니터 집단이었을 거예요.”
1994년 봄, 김영일 회원은 어용노조가 판치던 한국통신에서 ‘민주노조’ 전산사업단지부 지부장이 되었고 노조에 집중하기 위해 신문 분과 활동을 접었다. 3년 뒤 새 지부장 선거 때 사측에서 내세운 어용 후보가 당선되기까지 김영일 회원은 지부장으로서 꿋꿋이 노조를 지켰다고 했다.
“노동운동이란 뭘까? 노조가 발전한다는 건 또 뭘까? 그런 고민을 많이 했어요. 노조 활동을 통해 복지 혜택이 늘어났지만 거기서 더 받아 내야 한다는 쪽으로 사람들이 쏠렸죠. 분명 한국통신 노조로서 통신시장개방 반대를 외치며 정부와 싸워야 했지만 그걸 우리가 왜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어요. 결국 개방은 못 막았죠. 그 뒤로 통신개방이 되면서 SKT가 생기고 모토로라 같은 외국 자본이 들어왔어요.”
3년 동안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매달린 노조가 조금씩 망가지는 꼴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김영일 회원은 지부장에서 물러나며 적잖은 상처를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도시에서 벗어난 ‘대안적 삶’에 부쩍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귀농운동본부 귀농학교의 1기생으로 들어가 농사일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때는 완전히 농사일에 꽂혔어요. (웃음) 다 때려치우고 농사지으려 내려가고 싶었는데 아내도 처갓집도 다 반대했고 애들 학교도 보내야 해서 결국 다니던 한국통신을 그냥 다니기로 했죠. 근데 제가 노조 지부장을 하면서 회사에 비타협적인 인물로 찍혔는지라 승진도 제대로 못하는 신세였어요. 그러다가 결국 2009년에 정리해고를 당했죠. 그때 잘린 사람들 보면 거의 다 예전에 민주노조 활동을 했던 친구들이었어요.”
한국통신은 2002년에 민영화되면서 한국통신이라는 이름을 거쳐 ‘주식회사 KT’라는 새 이름을 달았고 민영화 이후 그곳에서 여러 번에 걸쳐 해고된 노동자들의 숫자는 내가 아는 것만 3만 명이 넘는다. 그리고 지난 4월 30일에는 8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새롭게 명예퇴직자 명단에 올랐다. 해고자들이 회사에서 자살할까 봐 KT 건물 옥상 문을 잠갔다가 소방법 위반이라는 말을 듣고 부랴부랴 다시 문을 열었다는 뉴스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김영일 회원은 바로 그런 곳에서 노조 활동을 했고 노동자로 살았으며 끝내 해고당했다.
“해고당한 뒤에 팔순 아버지가 계신 고향 부안에 내려가 집을 얻어 거기 딸린 텃밭에서 농사를 시작했어요. 콩이랑 참깨를 주로 심었죠. 아내랑 자식들은 서울에 남고 저만 내려갔어요. 가족들을 부르려고도 했지만 그런 소박한 농사로는 도저히 생계를 이을 수 없었고 애들 교육 문제도 있고 해서, 가끔씩 가족들이랑 처갓집 식구들 초대하는 게 전부였죠. 그냥 거기서 저 혼자 피땀 흘리며 농사지었어요.”
이야기 중에 방에 들어갔다 나온 김영일 회원이 시집 두 권을 슬쩍 건네주었다. 시집 겉표지에 찍힌 김영일이라는 이름을 보고 설마 하는 마음에 고개를 들자 수줍게 웃는 김영일 회원의 얼굴이 보였다.
“제가 고3 때부터 시를 썼어요. 국문과에 가고 싶었지만 사정상 경영학과에 진학했고 대신 문학 동아리 활동을 했죠. 그러다 2007년에 시인으로 등단했고 이듬해 시집과 한시집을 냈습니다.”
알고 보니 ‘문학청년’이기도 한 김영일 회원은 고향 부안에 있는 석정문학관의 초대 사무국장으로 8개월 동안 일했고 (석정문학관은 부안이 고향인 신석정 시인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다.) 그 뒤에는 내소사라는 절에서 불교 초심자들을 위한 ‘길잡이’ 일을 하면서 한 달쯤 머물다가 서울에 올라와 지금에 이르렀다고 했다. 그럼 요즈음은 먹고사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고 물어 보니 김영일 회원은 다시 방에 들어갔다가 웬 원고 뭉치를 들고 나왔다.
“마땅한 고정 수입이 없던 판에 작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인물 평전 공모에 선정되어 강은기 선생의 평전을 쓰게 되었어요. 그분은 박정희 정권 때 ‘세진인쇄’라는 인쇄소를 운영하며 수많은 민주단체들의 유인물을 거의 도맡아 제작하신 분입니다. 그분 평전을 집필하며 작년을 보냈는데 사정상 출판을 못해 묻힐 뻔하다가 이번에 천만다행으로 운주사라는 출판사에서 내 주기로 했습니다. 아마 조만간 나올 거예요. 지난 1년간 제 수입은 이 원고료로 번 게 전부입니다. (웃음)”
민언련 신문모니터분과 초대 분과장으로서 요즈음의 언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는 거창한 물음을 던져 보았다. 사람 좋은 웃음을 순식간에 거둔 김영일 회원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안타깝고 답답할 뿐입니다. 수구 언론 세력의 왜곡 보도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막상 거기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는 너무 약해져 버렸어요. 가장 기본적인 것, 민주주의부터 다시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신문분과원이자 민언련 회원으로서 더 나아진 언론 현실을 볼 수 있었으면 했는데 그러지 못하는 상황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옛날 같진 않겠지만 저도 어떻게든 다시 힘을 모아 보고 싶네요.”
김영일 회원은 인터뷰가 끝난 뒤에도 20여 년 전 신문분과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추억이 담긴 자료들을 이것저것 보여 주었고 나는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껏 살아남은 자료들을 보며 어느 개인의 역사와 한 사회의 역사가 이렇게도 만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비록 모래알보다 작은 접점일지라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더 큰 역사와 만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을까 생각하니 백 년도 못 사는 사람들의 한살이가 허무하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하물며 언론운동이라는 가시밭길을 걷는 사람들의 삶은 어떨 것인가. 동아투위, 조선투위,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언협, 언론노조 같은 이름들과, 뉴스타파, 고발뉴스, 팩트TV, 국민TV 같은 이름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사하며 고개를 숙이는 내 앞에서 김영일 회원은 또 다시 허허허 너털웃음을 웃었고 그 깊은 울림 속에는 꼭 이런 말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곧게 꾸준히 가는 길이 곧 역사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