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약속이 필요한 때
유정아 회원 l loveanalog@naver.com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종이배를 접는 시간>의 맨 뒤에는, 그들이 2009년부터 벌인 4년간의 투쟁을 기록한 일지가 부록으로 들어 있다. 주요 사건을 빼곡하게 정리한 이 일지에는 우리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단어들이 여럿 보인다. 85호 크레인과 김진숙 위원장, 희망버스와 촛불 문화제 같은. 우리는(적어도 나는) 이런 사건들을 앎으로써 한진중공업 문제를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일지가 본편이 아닌 부록이듯이, 내가 사태의 전말이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은 긴 이야기 속 한 부분일 뿐이었다.
삶의 터전이 걸린 싸움을 하면서 한진의 노동자들은 4년 간 모든 일상을 전쟁 치르듯 살아내야 했다. <종이배를 접는 시간>은 ‘주요 사건’들의 간극에 있는 이 절박한 싸움들을 담아낸다. 그러기 위해 이 책은 다른 어떤 기록보다 한진 노동자들의 입장과 감정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고공농성이 가져온 사회적 파장보다 크레인을 오르기까지 김진숙 위원장이 겪어왔던 고뇌와 그를 올려다보는 동료들의 심정을 이야기하고, 세상이 희망버스를 바라보는 시각보다는 그 버스에 탄 이들을 맞이하는 한진 노동자들의 반가움을 조명한다.
이야기에서는 그간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겪었을 외로움이 짙게 배어나왔다.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온 가족이 살던 사원 아파트에서도 쫓겨나야 하는 상황. 의지할 곳은 같은 처지의 동료들뿐이고 세상은 이들의 억울함을 보지 않았다. 가족들이 모여 다 같이 밥 한 끼 먹는 것이 소원이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생활고와 절망이 한데 합쳐진 상황은 노동자들을 절벽 끝으로 몰아붙였다. 결국 한 사람이 다시 크레인에 올랐다. 여기에 ‘희망버스‘라는 이름의 기적 같은 응답이 돌아왔다.
경찰과 용역들이 무자비한 진압에 나섰지만, 긴 투쟁에 지쳐 있던 이들에게 희망버스는 말 그대로 ‘희망’이 되었다. 바깥세상에서도 누군가 자신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설렘으로 다가온다는 이와 행사를 마치고 떠나는 희망버스를 볼 때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어 눈물이 났다는 이의 말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시달려온 고독감이 가슴 시리도록 생생하고 날카롭게 다가왔다. 그들은 투박한 손으로 종이배를 접어, 자신들을 찾아와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 모든 눈물을 단지 몇 백 글자로 정제된 기사로 접한 후에 감히 이들을 ‘이해’한다 생각했던 것은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는지.
만약 이 투쟁이 승리로 끝난 뒤였다면, 글을 쓰는 마음이 그래도 조금은 가벼웠을 것이다. 하지만 외로움과 절망과, 또 몇 사람의 목숨을 딛고 세월을 이겨냈음에도 이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간 노동자들을 끊임없이 속여 왔던 회사가 또 한 번 이들을 기만한 탓이다. 한진중공업은 해고자의 전원 복직을 약속했었지만 복직 후 세 시간 만에 무기한 휴직이라는 기막힌 술수를 부렸다. 이 바람에 약속과 기대와 배신의 끝없는 순환에 지친 또 한 명의 젊은 노동자가 스러져갔다. 이 책의 편집자는 에필로그에 한진중공업의 배신을 기록하며 ‘여기서 이 르포는 멈췄어야 했다’고 허망함을 드러냈다. 이들이 얼마나 큰 절망을 가지고 있을지, 읽었지만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시 싸우고 있다. 사람과 힘은 많이 줄어들었고 복직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지만, 동료의 장례식에서 눈물로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다리며 버티고 있다. 세상은 그들과의 약속을 여러 번 어겼음에도. 이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제 누군가는 이들에게 새로운 약속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지난 투쟁의 기록이지만 이제껏 함께 하지 못했던 미안함, 앞으로 이들에게서 결코 시선을 거두지 않겠다는 다짐을 담아서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