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과 다리
박해부 회원 l oilrock@naver.com
민언련과 인연을 맺은 지 벌써 20년이 넘었다. 20대 중반 혈기왕성한 나이에서 지금은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언론학교를 통한 보통의 민언련 회원과 달리 나는 ‘방송모니터 1기’라는 거창한(?) 타이틀로 민언련과 인연을 맺었다. 그동안 영화분과에서 주로 활동했고 광주순례를 마치 성지순례라도 하는 것처럼 열심히 참석했던 것 같다.
이런 상투적인 글을 적다가 초등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걸어서 외갓집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원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기차를 타고 갔던 길이었다. 그러나 기찻길 옆에 외갓집이 있으니 기찻길을 따라 가면 외갓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무모하게 만들었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서 3km를 걸어서 기찻길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많이 지쳐 있었지만 저 너머에 다다르면 외할머니가 나를 와락 안아주실 것 같은 생각에 용기를 내서 기찻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면 갈수록 외갓집은 우주의 행성만큼 멀게 느껴져 이제 그만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나를 반겨주실 외할머니를 기대하면서, 기차가 오면 기찻길 옆 논둑으로 피하면서 걸어갔다.
그런 나를 처음 좌절시킨 건 기차 터널이었다. 터널 안은 대낮인데도 무척 컴컴해서 그곳에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암흑과 온갖 괴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기차를 타고 터널을 통과했던 기억이 났고, 걷다 보면 금방 터널 밖이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나를 터널 안으로 밀어 넣었다. 기차를 타고 통과했을 때는 저기 터널 밖이 환하게 나를 반겨 줄 것 같이 가까이 있었는데 직접 걸어 들어가 보니 전혀 달랐다. 내가 집에서 온 거리의 백 배쯤 멀게 느껴졌지만 용기를 내서 터널을 벗어날 때 느꼈던 기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힘을 내서 다시 길을 걷는데 이번에는 기차 다리라는 복병을 만났다. 장마 때 불어난 물은 성난 파도 같았고, 침목사이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외갓집까지 걸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안드로메다로 사라져 버렸다.
결국 외갓집도 못가고 집으로 다시 갈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지자 후회가 밀려와 눈물이 났다. 그러나 다행히도 지나가던 선로반 아저씨의 도움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민언련(언협)과 처음 인연을 맺을 때만 해도, 정권교체만 되면 민주주의도 정착되고 노동자와 농민과 사회 소외계층도 민주주의의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생각에 마치 내가 투사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어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엔 마치 내가 당선된 것처럼 기뻤고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이 생겼다. 마치 어릴 적 기차 터널을 벗어났을 때의 느낌이었다.
오랫동안 독재정권이 다져 놓은 부조리한 지배구조는 10년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도리어 민주정부의 무능함만을 입증하는 꼴이 돼 버렸다. 이명박 정부의 무능과 부조리을 보면서 ‘설마 다시 독재자의 딸에게 정권을 주겠어?’ 싶었지만 그건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었다. 독재자 딸의 대통령 당선이 현실로 다가오자 나는 기차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느낌이었다.
세월호 사고와 구조과정, 진상규명 과정을 보면서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됐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요즘에야 비로소 사람들이 언론의 역할에 대해 조금은 인지하기 시작한 것 같다. 세월호 사고가 민언련에도 새로운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진실을 감추려는 정부와 기득권층에게 당당하게 맞서 싸울 수 있는 세력이 없다는 것과,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왜곡과 은폐에만 몰두하는 언론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민언련의 책임감을 가지고 분연히 일어나야 하는 이유 같다.
지금까지 민언련과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민언련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언련 활동가와 이사들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많은 민언련 회원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한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끝으로, 큰 소리로 외치고 싶다.
“저에게도 지치지 않고 민언련 회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