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동가 이야기] 성유보 선생님은 이미 큰 숲이었다 - 조영수 협동사무처장(2014년 10호)
등록 2014.10.23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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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보 선생님은 이미 큰 숲이었다


글 조영수 활동가 l ccdm1984@hanmail.net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실감나질 않는다. 

10월 8일 저녁 신문분과 모임 중인데 김언경 사무처장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성유보 선생님이 별세하셨다는 것인데. 바로 전화를 거니 본인도 믿기지 않는 듯 우선 일산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순간 이게 뭔가하는 생각이 머리를 때리고, 우선 부고 문자부터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여러 차례 부고 소식을 보냈지만 이렇게 손이 떨리고 지웠다 썼다를 반복한 적은 없었다. 간단한 부고 문자를 보내는 것인데 머릿속에 계속 다른 생각이 들어 ‘황망’하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이라는 걸 절감했다. 


그도 그랬던 것이 요즘은 건강 괜찮다고 하시지 않았던가. 문자 발송 후 휴대전화와 사무실로 전화가 빗발쳤고,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어 문자 내용 외에는 어떤 말씀도 드릴 수 없었다. 



  이날 밤 선생님을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으로 모신 후 9일부터 본격적인 장례절차에 들어갔다. 장례절차를 의논하기 위한 자리에는 스무 분 넘게 참석했다. 모인 분들을 보니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성유보 그 이상의 ‘성유보’가 있었다. 


몇 해 전부터 한반도와 대륙을 잇는 철도사업을 펼치는 ‘희망래일’ 이사장을 맡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또 올해부터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도 맡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언론을 넘어 남북화해와 통일을 염원하는 활동을 몸소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밖에도 민주노총과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곳에서도 선생님을 고이 모시기 위해 함께했다. 비로써 선생님이 언론운동뿐만아니라 통일운동과 한국사회 민주화운동 전반에 남긴 족적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자연스레 ‘민주사회장’으로 결정했고, 그에 맞춰 장례위원 모집과 영결식 준비가 시작됐다. 



  나흘이라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갔다. 선생님을 마석 모란공원 민주민족열사묘역에 모시고 난 후 끝까지 함께했던 분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은 본인들과 선생님의 인연과 추억을 풀어 놓는 자리가 되었다. 


사실 선생님이 2003년 이사장을 그만두셨기 때문에 2004년에 민언련에 들어 온 나로서는 추억이라고 할 게 별로 없다. 그저 민언련 행사나 기자회견 등에서 반갑게 인사드리고, 그저 좋은 어른 정도도 생각해왔다. 그랬던 것이 올해 한겨레에 연재하셨던 ‘길을 찾아서’를 통해 한 층 가까워졌고, 나흘은 성유보 선생님을 알아 온 11년보다 선생님의 삶을 좀 더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성유보 선생님이 황망히 가셨지만 그래도 민언련에는 작별 인사를 남기셨다. 지난 9월호 회원 소식지 ‘민언련과 나’라는 꼭지를 통해서다. 다시 읽어보니 민언련을 향한 작별인사와 같다.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 초대 사무국장으로 시작한 민언련 30년 역사를 “가슴 뿌듯한 감격”으로 회상했고, 무려 70여명의 이름을 들며 전현직 임원과 회원들을 추억하셨다. 마지막은 모든 회원들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광범한 회원들이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새로운 민주언론운동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하는 것을 보고 싶다”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많은 회원들이 빈소를 찾았다. 특히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영화분과와 신문분과 회원들은 성유보 선생님과 맺었던 인연에 또 하나의 추억을 더하는 자리가 되었을 것이다. 성유보 선생님이 이들을 기억했듯 이들 또한 성유보 선생님을 기억할 것이다.


선생님을 통해 많은 분들을 만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숙제도 주고 가셨다. ‘길을 찾아서’를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늘 갈대처럼 이리 흔들 저리 흔들리고 있는 39세 민언련 활동가에게는 나침반 같은 글이다. 



  선생님은 큰 숲을 이루고 싶다는 ‘이룰태림’으로 불러달라고 하셨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미 큰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