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 인터뷰 | 이유경 국제분쟁 전문기자
그녀는 왜 이토록이나 용감할까
인터뷰 김은주 이사
정리 최영민 회원
사람이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용기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 걸까.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껏 얼마의 용기를 써왔고 얼마의 용기가 남았을까. 내가 아는 사람을 통틀어, 가장 많은 용기를 쓴 사람이 아닐까 싶은 ‘국제분쟁 전문기자 이유경’. 그녀의 바이라인 위엔 늘 피 흘리며 고통받는, 혹은 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오버랩 된다. 헌데 그 한복판에 서 있는 그녀가 겁에 질려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작고 검고 깡마른 이유경은 늘 거대하고 거침없었다. 당차고 씩씩했다.
모두가 도망쳐 나오려는 곳으로 왜 걸어 들어간 걸까. 그녀가 아낌없이 꺼내 쓰는 용기의 근원이 궁금했다. 할 수만 있다면, 대부분의 순간에 ‘불편한 용기’보다 ‘편안한 비겁함’을 택하느라 새것처럼 쌓여 있는 내 부끄러운 용기를 나눠주고 싶다. 그러려면 우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내가 나눠준 용기가 그녀를 통해 어떤 곳에서 어떻게 빛을 발하게 될지 알고 싶었다.
이유경은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 민언련 상근활동가로 언론개혁 운동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국제분쟁 전문기자로 버마, 스리랑카, 아프가니스탄, 라오스, 인도, 네팔 등 아시아 전역을 누빈지 올해로 10년째다. 지금은 태국에 머물고 있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나? 지난번 서울 왔을 땐 너무 말라서 마음이 아팠다.
특별히 건강이 나쁘진 않은데 체력이 달리는 건 느껴져요. 몸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은 듭니다. 살이 빠진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데,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는 아니고 워낙 활동량이 많은 데다 어쩔 수 없이 끼니를 거르게 되는 상황들이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먹는 건 최대한 신경 쓰려고 노력해요. 단골 식당 만들어 두고, 내 식성에 맞게 최대한 구해서 먹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분쟁지역이다 보니 환경이 많이 열악할 텐데, 버티게 하는 힘은 뭔가. 그야말로 ‘깡’인가?
사실 취재 현장이 바깥에서 상상하는 것만큼 극도로 위험하진 않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곳을 누비고 다닐 거라고 상상하기 쉬운데, 실제로 늘 그런 건 아니에요. 물론 위험은 존재하죠. 그래서 취재 나갈 때 정보 체크를 철저히 하는 편입니다. 정보가 곧 내 목숨이니까. 프리랜서 기자로 사는 것도 점점 더 녹록지 않아요. SNS도 너무 발달했고. 실제로 현장을 떠나는 기자들이 많습니다. 이래저래 힘든 건 분명하지만, 칭얼대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선택한 일이니까, 즐겁게 감수하려고 해요.
# 국제분쟁 전문기자로서의 삶
벌써 10년이다. 왜 하필 아시아 분쟁지역이었는지,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지역에 제한을 특별히 두고 있지는 않은데, 하다 보니 아시아만 돌게 됐어요. 민언련 간사 그만두고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게 됐는데, 거기서의 경험이 ‘아시아 길거리 기자’로서의 삶을 살도록 이끌었죠. 호주에서 난민들을 많이 만났거든요. 인도네시아 아체, 버마 등에서 온 난민들. 현실적으로 보더라도 아시아가 전체 세계 인구의 60%를 차지하고 있고, 세계 분쟁의 대부분이(서남아시아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발생하고 있잖아요.
2004년, 프리랜서 외신기자로서 첫 취재지였던 태국-버마 국경 정글. 버마학생민주전선(ABSDF) 대원들과 국경에서 카렌주 파푼(Papun) 전선(Front Line)으로 이동 중. 정글의 우기는 발 한걸음 딛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정글 게릴라들의 삶을 '혁명의 낭만'으로 추상화하던 나는 '뒤통수'를 바로잡고 그들이 수십년 겪었을 현실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간 많은 지역을 누볐는데, 가장 애착 가는 곳이 어디인가? 아직 못 가봤지만 가고 싶은 곳도.
아프리카 대륙엘 아직 한 번도 못 갔어요. 중동은 생각은 많은데 여러 사정상 아직까지 다시 못 가고 있고. 2007년, 레바논 취재를 하면서 시리아에 잠깐 머물렀었어요. 한국에 <아시아의 낯선 희망들>(2007년, 인물과사상사)이라는 책을 내러 오면서 다시 돌아가야지 했었는데, 그즈음 버마에서 승려들 시위(샤프란 혁명)가 발생하는 바람에 방향을 바꿨죠. 버마는 내 첫사랑과도 같은 곳이라 외면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고선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가장 애착이 가는 나라는, 물론 버마도 있지만 스리랑카! 버마가 첫사랑이라면, 스리랑카는 내 전생에 살았던 곳 같아요. 2009년 스리랑카 대학살 당시에는 심하게 우울증도 앓았어요.
버마 로힝야 무슬림 보트 난민 인터뷰 중 / 말레이시아 (사진 제공 : 마웅 마웅 Maung Maung)
우리가 속해있는 대륙이지만, 아시아에 대해 전반적으로 무관심하고 무지하다. 기사에 관심 두는 언론사도, 독자도 적어서 어려움이 더 클 것 같은데 취재를 계속하는 이유는 뭔가.
다른 이유 없이, 재미있어요.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향, 가치에 부합하는 일이기 때문에 머뭇거리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는 거죠. 이슈를 발굴하고, 취재하는 과정 모두가 오롯이 내 성취로 남아요. 그게 뿌듯하고 좋아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과정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죠. 피할 수 없는 심리적인 우울함, 정신적인 힘듦을 극복하는 게 과제입니다. 일을 계속하게 하는 에너지는, 극렬한 상황을 온몸으로 버텨내는 사람들에 대한 동시대인으로서의 죄책감, 책임감인 것 같아요. 바로 옆 동네에서 배가 뒤집어지고, 사람이 매매되고,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개 취급’받다 죽어 나가는데 어떻게 모른척하고 삽니까. 그곳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만 안전하게 사는 것, 그게 불편하고 부끄러워요.
2009년 방콕 반정부 시위강화로 배치된 군 촬영 중 (사진 제공 : Karnt Thassanaphak)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나. ‘아, 내가 정말 잘하고 있구나’라고 느낀 때가 언제인지.
2008년도에 한 국제인권단체 군사전문가 제보로 한국이 집속탄(Cluster bomb)을 생산, 수출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집속탄은 모탄 하나에 수백 개의 자탄이 들어 있어서 파괴력이 엄청나게 큰 괴물 같은 무기입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이 라오스에 쏟아 부은 2만 톤의 집속탄 중 터지지 않고 남은 불발탄이 아직도 라오스 산골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있죠. 국제사회가 ‘집속탄 금지 협약’을 채택하던 시기에 터진 일이었는데, 제 기사 <집속탄 생산국, 수출국, 수입국 KOREA>가 나간 이후에 여러 단체에서 일인시위도 하고 평화 반전운동의 의제로 다루기도 했었어요.
# 민언련과 이유경
민언련 활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간사를 그만두게 된 계기도 듣고 싶다.
민언련에서 활동한 건 8~9년 정도입니다. 회원활동 2~3년 정도 하고, 간사로 6년을 보냈네요. 1993년도에 언론학교 듣고 바로 신문분과에 가입했죠. 고등학교 때부터 기자, 언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기자는 모두 씩씩하고 정의로운 줄 알았는데, 대학 가서 보니까 아니더라고요. 죄다 받아쓰기하느라 바쁘고… 그때 한국 언론에 대한 환상을 버렸어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반대의 언론 행위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기존 언론의 반대편에 서서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방식으로의 또 다른 언론활동도 가능하단 걸 알게 된 거죠. 사회의 억압구조에 굴복하지 않고 자유롭게, 눈치 볼 것 없이 내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 무엇보다 좋았어요. 간사를 그만둔 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기자생활을 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겨레 정문태 기자가 자극제였어요. 내가 꿈꾸는 기자 생활을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구나. 그게 영 불가능한 일이 아니구나. 그럼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 대한 반골 기질, 호기심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일이 이 일이고 그걸 시작해보자 했던 거죠.
성유보 이사장님에 대한 각별한 기억이 많을 것 같다.
천으로 된 장바구니 같은 걸 어깨에 걸치고 사무실로 들어오시던 모습이 트레이드마크처럼 기억에 남아있어요. 어린 간사나 회원들의 맞담배질도 개의치 않으시고 동료처럼 일상을 나누시던 친구 같은 어른이셨죠. 재작년 리영희 재단 프로젝트에 지원할 때 추천서도 이사장님께서 써주셨어요.(리영희 재단의 지원으로 2013년 7월부터 2014년 5월까지 버마, 버마-중국 국경,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태국의 종족/종교 갈등을 취재해 <한겨레21>에 연재했다) 제 일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거의 비슷해요. “왜 그러고 사냐”, “개고생한다”, 아니면 “대단하다”. 세 반응 모두 불편하고 부담스러운데, 이사장님은 한결같이 쿨하게 지켜봐 주셨습니다. 제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잘 알고 계셨고,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셨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추억이 있다면?
간사들 순번 정해서 점심 해먹던 기억! 각자의 개성이 담긴 식탁이 재미있었어요. 일이 너무 많아서 남은 일거리 싸들고 퇴근해야 하는 날이 부지기수였지만, 모니터 모임 끝나고 새벽까지 술잔 털던 신문분과 하드코어 멤버들과의 추억은 절대 잊을 수 없죠. 1998년 금주 선언 후 2003년 한국을 뜰 때까지 술을 한 방울도 안 마셨는데, 분과 모임 뒤풀이는 물잔으로 빠짐없이 사수했어요.
민언련 활동이 이유경과 이유경의 삶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하죠. 9년 가까이 매일 모니터를 하다 보니, 어떤 현상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능력이 자연스럽게 길러진 것 같아요. 그냥 그렇구나, 맹목적으로 흡수하는 게 아니라 아무리 사소한 문제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토론하게 된 것. 그런 능력과 습관을 체화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큰 소득입니다. 기자를 비판하던 입장에서 지금은 비판받는 위치의 기자가 됐는데… 내 기사도 누군가에게 ‘당연히’ 비판받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어떤 지적이든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려고 해요.
우리, 언제 다시 얼굴 볼 수 있을까?
지금 계획으로는 2015년 12월 정도에 한국에 갈까 해요. 겨울에, 눈이 그리워서 맞춰서 가려고요. 11월 버마에 중요한 선거가 있는데, 이슈가 생겨서 발목 잡히면 못 가겠지만….
올해 첫눈이 오면 제일 먼저 그녀가 생각날 것 같다. 국제면 뉴스를 뒤적이며, 혹여라도 그녀의 한국행을 가로막는 뉴스가 없나 노심초사할 것이다. 그녀에게도 우리에게도, 겨울을 기다려야 할 이유가 생겼다. 올해 눈 내리는 풍경은 특히 더 평화롭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