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사랑만으로 극복하기에 만만찮은 하드보일드 ‘공드리 월드’
등록 2015.02.2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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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 류성헌의 공간으로 읽는 영화산책 ② <무드 인디고>

사랑만으로 극복하기에 만만찮은

하드보일드 ‘공드리 월드’


류성헌 회원

*다수의 스포일러가 내장되어 있습니다.


미쉘 공드리 감독의 영화 <무드 인디고>는 컬러와 공간이 만들어낸 한편의 우화이다. 영화 속 이야기 전개는 색채의 변화와 함께 스며들 듯 끊어질 듯 이어진다.


관객은 첫 장면부터 펼쳐지는 색의 향연 속에 밝게 빛나는 공간을 바라보며 따뜻한 한 편의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지만, 감독은 그런 바람을 가차없이 짓밟고 공간에서 원색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며 결국은 어두운 흑백 화면으로 쓸쓸히 끝을 맺는다. 영화 원제인 보리스 비앙의 ‘세월의 거품 (L'Ecume des jours)’은 재즈 거장 듀크 앨링턴의 제목이며 색명인 ‘무드 인디고’로 바꿨다. 이는 영화 속 그의 음악과 함께 색채가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한 꽤 영리한 선택으로 보인다.


영화 속 공간은 주인공 콜랭의 집과 그들이 방문하는 몇몇 장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 공간의 변화 역시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을 이루는 온갖 장치와 상징으로 가득하다.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 잡은 각 공간에 맞추어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유채색에서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영화 속 이야기

주인공 콜랭은 칵테일 피아노를 발명하여 부를 축적하고 덕분에 여유와 자유를 만끽하는 삶을 사는 청년이다. ‘장 솔 파르트르’(너무나 당연히 사르트르의 패러디)라는 철학자를 신봉하는 친구 시크와 함께 사교파티와 칵테일을 즐기던 그는 파티장에서 클로에(오드리 토투)를 만나 사랑에 빠져 로맨틱한 연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다. 영화의 전반부를 차지하는 여기까지는 매우 평범한 사랑이야기다.


하지만 클로에의 불치병과 함께 둘 사이의 불행이 시작되면서, 화면에서 점점 원색이 사라져 간다. 치료비에 거액을 쓴 콜랭은 이윽고 돈이 필요해 난생 처음으로 돈벌이를 하면서 비정한 자본주의 사회의 부속품이 되어버린다. 한편, 세상과 부딪히기 싫어하는 친구 시크는 그의 우상 철학자의 책과 소지품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다 비참한 파국을 맞는다.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클로에가 죽고, 화면은 완전히 탈색되어 흑백으로 끝을 맺는다. 영화 후반부는 세상에서 가장 어둡고 슬픈 이야기의 연속인 것이다.


공간으로 선명하게 표현되는 극의 희비

전반부와 후반부의 극적인 대비는 주요 공간의 밝기, 높이, 넓이의 변화와 함께 묘사된다. 전반부의 공간을 살펴보자. 경쾌한 듀크 앨링턴의 ‘Take the ‘A’ Train’과 함께 오프닝이 끝나고, ‘기차(train)’가 두 집을 허공으로 이어주는 콜랭의 집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기차의 실내는 높고 쾌적하다. 깨끗한 창을 통해 하얀 실같은 햇살이 실내에 가득 꽂힌다. 넓고 밝은 주방엔 온갖 요리를 할 수 있게 다채로운 조리기구를 갖추어 놓았다. 브라운관을 넘나드는 요리선생의 지도에 맞춰, 요리사 니콜라는 갖가지 초현실주의적 요리를 한다.


영화에서 기차는 관계를 암시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물리적 이동수단으로서 두 공간을 이어주는 것은 물론, 기차 형태의 복도 창을 통해 투과되는 햇빛의 양도 영화의 분위기에 따라 달라진다. 그뿐인가. 콜랭과 클로에는 파리 시내 철로 변에서 첫 키스를 하며 연인이 된다. 그런데 기차는 정해진 궤도로만 달리는 운명을 지녔다. 검은 터널 속으로 사라지는 기차는 둘의 거부할 수 없는 어두운 운명을 보여준다.



기차 형태의 복도가 있는 영화 속 집(위, 아래)


클로에의 발병 이후 창문은 점점 두꺼운 먼지와 지울 수 없는 이상한 거미줄로 더러워지고, 문은 조그마한,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나 보일 법한 아주 낮은 문으로 변한다. 기차의 천장은 성인이 허리를 구부리고 지나가야 할 정도로 낮아진다. 매달린 펜던트 조명만이 기이한 형태로 크게 남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를 가격한다. 심지어 콜랭의 침실은 듀크 엘링턴의 곡 ‘클로에’가 흘러나오면서 좁고 답답한 원형으로 변해버린다. 이제 그의 집은 더는 ‘집’으로 보이지 않고, 마치 커다란 무덤처럼 변해간다. 마치 인간의 행복과 불행, 생로병사를 ‘집’이라는 단어를 통해 풀어가는 문학작품이 과장된 영화적 언어로 구현된 듯하다.



결혼식(위)과 장례식(아래)이 거행된 성당


전반부의 결혼식과 후반부의 장례식이 치러진 고딕풍 성당의 대비도 눈여겨볼 만하다. 결혼식이 끝나고 물에 잠긴 성당은 몽환적인 분위기이다. 부부가 키스를 하던 이 결혼식장에는 행복이 넘쳤다. 그러나 장례식장이 된 성당은 ‘가난뱅이의 장례식은 끔찍하다’는 신부의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어둡고 칙칙한 공간으로 변해있다.


자본주의의 비정한 모습을 묘사한 온실 속 스케이트장과 총기 공장이라는 두 공간의 극적인 대비도 충격적이다. 콜랭과 클로에가 사랑을 속삭이는 즐거운 스케이트장은 시원한 천창으로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즐거운 자본의 소비공간이다. 그러나 벌거벗은 콜랭의 체온으로 흙더미 속 총을 ‘배양’하는 총기 공장은 음침한 유리 온실로, 뿌연 빛이 스며들어 음울한 자본의 착취 공간을 연출한다.


모순으로 가득 찬 공간, 하드보일드 ‘공드리 월드’

영화 전반에 걸쳐 감독은 매우 과장되고 기이한 공간을 통해 “세상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 만큼 만만하지 않아”라고 우리에게 외쳐댄다. 공간의 스타일은 복고적이지만 아방가르드하고, 아날로그적이지만 첨단기능을 갖춘 모순된 역설로 가득하다.



온실 속 스케이트장(위)과 총기공장(아래)


클로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그녀의 폐 속에 내려앉은 수련을 보여주는 몸속 공간은 인체의 미니멀한 요소들로만 구성되어 있지만,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그런 충격적인 모습은 그녀가 어떤 치료에도 살아남지 못할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 둘의 불행이 시작됨을 암시하는 신혼여행에서의 소풍은, 화면 절반은 맑은 날씨지만 절반은 폭우가 쏟아지는 대비를 통해 감독의 의중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너무 직설적이라 새롭기까지 하다.



클로에의 폐 속 묘사(위), 신혼여행에서의 소풍(아래)


영화는 공간적인 부분 외에도 갖가지 시각적 상상력을 전달한다. LP가 연주될 때 흐르는 음악이 회오리치는 빛으로 묘사되는 장면이나 파티에서의 군무장면에서 사람들의 다리가 기이하게 길어지며 흐느적거리는 장면은 끊임없이 우리를 비현실적 공간으로 데려간다. 하지만 이것은 역설적이게도 얼마나 현실이 비정하고 세상은 잔인한지를 직시하게 만든다.


자신의 영화 속 모든 소품을 직접 제작하는 것으로 유명한 미쉘 공드리는 <무드 인디고>를 통해 마술적이고 예쁜 동화책의 첫 장을 펼쳐주었다. 그러나 마지막 장에서는 우리 귀에 ‘세상은 좀 그래…’라고 한숨 섞어 이야기하면서 잔혹 동화의 끝을 맺는다.


그래…. 세상이 뭐 그렇지… 사랑 따위가 다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