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케빈에 대하여>가 아니라 케빈과 그의 엄마의 ‘관계’에 대하여
등록 2015.03.23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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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가 아니라 

케빈과 그의 엄마의 ‘관계’에 대하여


염찬희 영화평론가


언제부터인가 내게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오랜 시간 집중을 요하는 힘든 정신노동을 끝내고 나면, 나는 자신을 칭찬하는 의미로 영화를 보는 시간을 가진다. 하루 이틀을 아무것도 안 하면서 영화만 몰아서 보는 것이다. 지친 머리를 달래기 위해서 가능하면 말랑말랑한 로맨스 류를 선택하는데, 더러는 봐야만 했으나 놓친 것들에도 손이 간다. 




이번에 나의 눈길은 봐야 했지만 놓쳤던 <케빈에 대하여>(린 램지 감독, 2011)에 닿았다. 그런데…잘못 골랐다! 이 영화는 지친 나를 달래주기는커녕,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영화가 끝나는 순간, 이야기와 이미지, 사운드가 더욱 강렬해져서 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고, 나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들볶였다. 


‘괴물’이 된 아들, 불행한 엄마

이 영화는 복잡한 플롯 구조로 되어 있지만, 요약하면 주인공 에바(틸다 스윈튼)의 현재 불행의 기원에 대한 탐구이다. 영화에서 에바는 아들 케빈(이즈라 밀러)이 학교친구들을 학살한 ‘괴물’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감독은 영화의 플롯을 현재와 과거, 대과거를 불규칙하게 오가는 방식으로 구축한다. 이런 방식을 선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이는데, 우선은 에바의 의식의 흐름을 드러내기에는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하되 과거로, 다시 현재로, 다시 과거 혹은 대과거로 불규칙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러한 구조를 선택하는 것이 현재 에바가 얼마나 불행한지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만약 이 영화가 과거에서부터 현재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짚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관객은 에바에게 가해진 잔혹함을 정확하게 전달받기 어려울 것이다. 현재의 에바는 남편과 딸을 아들 케빈에 의해서 잃었다. 그래서 그녀는 현재 학교친구들 수십 명을 학살하고 수감되어있는 케빈의 엄마로만 사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 살인자의 엄마라는 이유로, 지역주민들은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폭언·폭행을 가하는 것을 꺼리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녀의 상실을 아파해주는 이는 없다.


칠흑 같은 어둠 속 푸르스름한 빛이 닿는 곳,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이 있다. 커튼에 서서히 다가가던 카메라는 갑자기 화이트아웃, 그리고 이어지는 쇼트는 붉은 토마토를 온몸에 뒤집어쓰고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는 장면을 머리 위 원사(롱쇼트)로 잡는다. 카메라가 점차 다가가면 그들은 즐긴다기보다는 다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마침내 그들 중 한 명인 에바의 괴로운 표정이 쇼트로 이어진다. 


이런 일련의 불편한 이미지들의 바탕에는 긴장을 고조시키는 각종 효과음이 깔리는데, ‘악마’, ‘빠져나와’, ‘살인마’, ‘달아나’ 등 공포를 연상시키는 대사도 한몫을 한다. 그렇게 영화의 도입 3분여는 불행이라고 밖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렇지만 강렬한 느낌을 전달한다. 이런 느낌의 실체는 바로 주인공 에바의 꿈이고, 동시에 에바의 과거 경험이 뒤섞여 있다. 그 과거의 끝에서 에바는 지옥 같은 현재를 산다. 


실존적 고독 속에서 과거를 곱씹는 주인공

플롯은 복잡하지만, 불규칙적으로 오가는 현재와 과거의 시점에서 관객이 현재의 사건들을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에바의 머리 모양 차이 덕분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에바의 머리는 과거 쇼트커트에서 현재의 긴 머리로 점점 길어진다. 긴 머리를 한 현재의 그녀는 지독하게 단조로운 삶을 철저하게 외롭게 산다. 그녀는 집, 새로 얻은 여행사 일자리, 차, 아들이 수감된 교도소 사이를 반복해서 오가는데, 거의 혼자 있다. 설령 그 장소에 다른 사람들이 있다 할지라도, 잔인한 현실에 짓눌려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그녀는 실존적으로 혼자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그리고 집과 이동하는 차 안이라는 현상적으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에서 그녀는 과거를, 특히 아들이 ‘악마’가 된 이유를 곱씹을 수 있다. 그로써 아들을, 그리고 자신과 아들의 관계를 객관화시키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자유로운 여행 작가로 살던 에바는 원치 않던 임신의 결과 아들을 출산하면서 좋아하던 여행을 그만두어야 했다. 또한, 아이의 양육에 좋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도시 뉴욕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기억 속에서 그녀는 아이를 보살펴야 하는 엄마의 역할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말이 또래보다 늦자 자폐를 걱정하며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하고, 늦도록 변을 가리지 못해도 강요하지 않는 등, 아이를 방치하거나 학대하지 않았으며 관심을 가지고 양육을 했다. 




문제는 모자지간이건 부부지간이건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감정은 감추려 해도 전달된다는 데에서 온다. 더 큰 문제는 그 관계에서 둘의 사랑의 정도가 크게 다를 때 발생한다. 하필 ‘그 둘’이 만난 것이 문제였다. 원치 않았다는 감정은 서툰 양육이라는 행동을 동반하고,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던 케빈은 좌절하면서 비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케빈이 진정으로 원한 것

잔인했던 기억들이지만, 들추어보면서 에바는 자신이 케빈을 사랑한 적이 없으며, 케빈이 못된 행동을 보일 때면 관심 끌기 위해서라고 잘못 생각했다는 것을, 케빈이 진정 원한 것은 사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방 하나의 벽면을 자신이 여행하면서 수집했던 지도들로 가득 채운 후 흐뭇해 하던 에바가 자리를 비운 사이, 케빈은 장난감 물총으로 붉은 물감을 쏘아 지도들을 모두 망쳐놓는다. 이때 에바는 케빈이 자신의 공간을 망쳤다고만 생각했지, 엄마로부터 버림받을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그러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케빈이 친구들을 죽이는 일을 벌이는 것은 그의 생일 며칠 전인데, 그 사건이 있기 며칠 전에 케빈은 부모가 이혼하면서 양육권이 아빠에게 갈 것을 알게 된다. 그 두 사건은 마치 별개인 것처럼 보이지만, 앞의 물총 난사 사건과 같다. 즉 쏘아서 망쳐놓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감독은 화살 난사 사건을 케빈이 엄마로부터 버려지는 것에 대한 극도의 공포에서 나온 이상행동으로 해석하도록 유도한다. 


케빈의 학살이 자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기 전인 영화 초반에 나오는 교도소 면회 장면은 영화 후반의 면회 장면과 대조적이다. 초반에 둘은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시선도 피한 채 비스듬히 앉아만 있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는 진심으로 아들에게 마음을 연 에바가 비로소 케빈과 눈을 맞추고, 진짜로 ‘함께’ 있는, 급변한 모습이 담긴다. 이전까지 늘 케빈의 생각을 예단했던 에바가 처음으로 케빈의 생각을 묻는다. “왜 그랬니?” 그리고 에바와 케빈은 처음으로 서로를 진심으로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