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류성헌의 공간으로 읽는 영화산책 ③ <버드맨>
등록 2015.06.03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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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류성헌의 공간으로 읽는 영화산책 ③ <버드맨>

<버드맨> 혹은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

 


인간이 시각으로 본다고 ‘느끼는’ 공간은 그저 각자의 시신경에 반사된 빛의 투영일 뿐 그 공간이 가지는 체적의 절대치수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내는 마음속 공간이 어쩌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눈에 보여지는 공간보다 더 사실적이고 때로는 절박한 공간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버드맨은 일종의 극중극 형식을 취하며 대부분의 이야기가 닫힌 극장 내부 공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극장의 복도는 방향을 알 수 없을 만큼 미로처럼 뻗어나가다 갈라지고 꺾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 공간을  이동하는 주인공과 그를 쫓는 카메라의 흐름, 그리고 내부를 채우고 있는 빛은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맞물려 정교하게 연기하는 한 명의 훌륭한 배우 몫을 해낸다. 

 

극 중 주인공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역)은 90년대를 풍미하던 히어로물 ‘버드맨’의 주인공으로 큰 인기를 얻었지만 3편 이후 배우로써의 삶은 내리막길을 치달아 이제는 헐리웃에서 잊혀진 퇴물취급을 받고 있다. 블럭버스터급 출연작은 없지만 대중들은 그를 여전히 ‘버드맨’으로 기억하고 사랑하는데 이것이 그의 딜레마이다. 저물어버린 옛날의 영광도 그립지만 버드맨이 아닌 배우로써 인정받고 싶은 그의 욕망은 연극의 연출과 주연이라는 무리한 시도를 하게 한다. 모두가 우려하는 지점은 그가 선택한 작품이 미국 현대문학의 극과극을 오가는 다양한 논란의 중심,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이라는 것. 평범한 작품이 무대에 올라도 사건사고가 빈번한 연극 작업에 정통 브로드웨이 출신도 아닌 헐리웃 블럭버스터 출신 배우의 데뷔는 순탄치 않다. 대타로 들어온 조연 연기자는 정통극 연기에 대한 텃새로 신경을 긁어대고 개막일이 다가올수록 펜 끝으로 흥행을 좌지우지하는 저명한 연극 평론가는 그에게 견딜 수 없는 부담감으로 다가온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상상 속 버드맨의 불안한 음성은 초조한 그를 극한으로 몰아간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도피로써 파국을 택한 그의 행위는 이 영화의 부제인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이 되어 그에게 (열린 결말적인) 자유를 선사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촬영 카메라는 주인공 리건의 의식을 고스란히 훑어내듯 공간을 움직이고 거기에 입혀지는 빛과 음악은 마치 뇌신경을 흐르는 내시경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극장의 복도는 두사람이 지나치기에 불편할 정도로 좁고 동선은 미로처럼 꼬불꼬불하여 리건의 분장실을 중심으로 무대와 분장실, 스탭실을 순례한다. 눈썰미가 조금 있는 사람들은 느꼈겠지만 이 동선은 건축적으로 거의 맞지 않는 매우 혼란스럽고 움직일 때마다 다른 동선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각 장면에서 리건의 분장실과 무대로 가는 동선은 신마다 다른 궤적을 그리고, 그것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어느 장면에서는 목적지까지 매우 쉽게 도달하기도 하지만 대화의 양이나 주인공의 심리상태에 따라 빙빙 돌기도 하고 계단으로 요동치듯 오르락 내리락 하기도 한다. 이는 마치 피라네시의 그림 속 계단이 마술처럼 움직이는 해리포터적 설정이다. 멕시코 출신 이냐리투 감독은 정교하고 사실적이지만 공허한 허구의 공간을 통해, 직선적이기도 하고 둘러 둘러 꼬이기도 하는 다양한 상황을 부감의 들고찍기와 롱테이크로 구현한다.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며 심지어 컷 수를 세어보게도 만드는 페이크 롱테이크는 매우 훌륭하다. 엔딩부를 제외하고 언뜻 보면 영화는 마치 전체가 한 신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원테이크 영화로 보여진다. 영화의 끊어짐은 극장 뒷편 그늘이나 건물의 모서리, 혹은 정지화면에서 밤과 낮이 바뀌며 이어진다. 고정되지 않은 카메라는 허공을 떠다니며 상황을 이어간다. 이는 마치 히치콕의 60분짜리 원테이크(를 가장한) 영화 <로프(Rope 1948)>를 연상시키지만 그러한 긴장감 보다는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장면을 부드럽게 표현한다.

 

 


영화 속 공간이 갖는 또 다른 특징은 인물간의 관계를 크게 실내장면과 실외장면으로 분리해서 보여지는 부분인데, 극장 속 갇힌 실내장면에서는 주로 각자의 주장과 다툼이 일어난다. 그와 대비된 도시소음으로 가득한 실외장면은 인물간 대화를 시도하거나 무언의 교감이 일어날 때의 배경으로 구성되어졌다. 영화가 시작되고 32분간 계속된 실내장면에 이어 리건과 마이크가 밖에서 만나는 순간 극장의 문이 열리고 도시의 소음이 가득 찰 때 관객은 마치 자신이 극장문을 나서 현실세계에 돌아온 듯 화들짝 놀라는 경험을 하게 된다. 여기서 공간이 전환될 때 관객의 머릿속 새로운 관계에 주목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은 극장의 ‘문’이 담당하고 있다. 이 문을 나서고 들어설 때마다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고 심지어 리건의 옷을 물고 늘어져 그가 나체로 뉴욕거리를 활보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또한 또 다른 야외공간 옥상은 갇힌 공간에서 맴돌던 마이크와 리건의 딸 샘이 새로운 관계설정을 시작하는 장소로 이용된다. 실외장면의 백미인 상상 속 버드맨에게 압박 받던 리건이 옥상에 올라서서 뉴욕의 하늘을 바라보다 일순간 말러의 교향곡을 배경으로 우아하게 극장까지 날아가는 시퀀스는 매우 아름답다. 그가 극장으로 걸어 들어간 이후 뒤쫓아 들어가는 택시운전사를 통해 허구적 상황임을 암시하지만 오히려 그런 설명 없이 갔어도 좀 더 강한 인상을 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정도이다.


장중한 말러의 교향곡이 삽입되기도 했지만 영화 속 공간감을 강화시켜주는 가장 큰 무기는 비트 강한 드럼이다. 멕시코 출신 연주자 안토니오 산체스의 즉흥적 드럼연주는 배우의 동작 하나하나와 정교하게 맞물리며 관객이 드럼소리를 리건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는 뮤지션의 의도가 고스란히 구현되었다. 실제로 영화 속 드럼소리를 제거하고 복도신을 보면 더없이 차분하고 정적인 장면으로 느껴질 것이다.


90년대 팀버튼 <배트맨 시리즈>를 좋아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겠지만 마이클 키튼의 캐스팅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비틀쥬스>에서의 그를 더 좋아하지만 <배트맨 시리즈>는 그를 대중적 헐리웃 배우로 우뚝 서게 해주었고 이후 이렇다 할 히트작을 내놓지 못한 필모그래피는 주인공 리건 톰슨과 겹쳐진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배우로써 마이클 키튼 개인에 영화를 대입시켜 감정을 증폭시키게 만들어준다. 물론 과거의 그를 기억하는 세대에 국한되는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마이크 역의 에드워드 노튼은 긴 2000년대를 건너뛰어 데이빗 핀쳐감독의 <파이트 클럽>에서 보았던 아련한 잔상을 다시 보는 것 같아 매우 반가웠고 주인공의 딸 샘 리건의 엠마 스톤은 그렇게 섹시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 만으로도 만족스럽다. 그리고 잠깐, 그녀의 영화 초반 대사 속 김치발언에 일부 관객들이 꽤 흥분했던 모양인데 이제는 좀 극복해야 할 컴플렉스 아닐까 싶어서 씁쓸하다.

 

헐리웃 블럭버스터 시스템과 브로드웨이 순혈주의 연극판을 동시에 들었다 놨다 하는 영화 <버드맨>은 배우의 연기 외에 그 어떤 영화보다 공간과 카메라를 효과적으로 사용한 작품으로 영화사에 작지 않은 획을 그었다고 믿는다. 이는 물론 테크닉의 발달이 없었다면 힘들었겠지만 당연하게도 그것을 잘 결합시켜 맛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감독의 역량이 단연 돋보인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이냐리투 감독이 치밀하게 계산해낸 결과물일 것이라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말 그대로 ‘예기치 않은 무지의 미덕’일 뿐이겠지만 말이다.

 

류성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