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던 한 방의 꿈, 한 잔의 술에 영원을 담아…고고씽!
강석봉 회원
20여년전, 그해 젊은 청춘들은 그랬다. 난, 1992년 서대문구 아현동 연립 지하에 위치한 민주언론운동협의회의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회원이었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던 그때, 학교가 아닌 새로운 곳에서의 활동을 모색 중이었다.
이마저도 거창하다. 사람은 자신의 추억을 포장하려는 경향이 있고, 나라고 이와 다르지 않나보다. 솔직히 당시 앞날이 불안했다. 학교에 있다고 취업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니고, 그 시간을 도서관에서 상식 책과 씨름하며 지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딱부러진 왕도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새로운 환경이 필요하다는 것은 절실했다. 그 현장을 대선시기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라는 곳에서 맞았을 뿐이다. 계획, 그런 것은 없었다.
△ 1992년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사진
다행히 그곳에서, 지금도 만나는 지인들을 만났다. 당시 간사이던 이**는 현재 유수의 온라인매체 편집국장이다. 이○○는 조만간 촬영에 들어가는 100억 투자 영화의 제작자다. 신△△는 청와대를 거친 전직 기자다. 이□□은 국회 대변인을 거친 정치권 인사다. 노◇◇은 여전히 언론시민운동 영역에서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들은 모두 간사였고, 동갑내기 친구들이다. 난 평회원으로 이들 옆에 숟가락 하나를 올려놓은 것이 오늘의 인연으로 이어졌다. 난, 그들의 하해와 같은 아량 덕에 ‘친구’임을 자임할 수 있었다. 현 민주언론시민연합의 사무처장 역시 당시 회원으로 고락 중 ‘고’를 제대로 나눈 사이다.
솔직히 당시 서로를 보면 ‘불쌍’해 보였을 게다. 누구에게나 불안한 미래가 우리에게라고 광명처럼 열릴 리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서로를 위로하며 스킨십을 늘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밀림에서 우리는 무식함인지 우직함인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오늘에 이른다. 언론운동이라는 끝을 알 수 없는 일에 몸을 던질 수 있는 용기가 세상을 헤쳐갈 힘을 준 듯 하다.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서 죽지 않고 버텨내며, 여전히 세상과 맞서 싸우고 있다.
◁ 1994년 회원수련회에 참석한 필자가 ‘개판상’ 수상 후 기뻐하고 있다.
우리가 ‘민언련’일 수는 없다. 그냥 친구다. 감히 이들과의 얘기가 ‘민언련과 나’라는 어마무시한 주제의 소재가 될 수 있을까. 이 모습이 혹자에게 역사적 주체와 개인사적 객체를 혼연일체로 엮으려는 작당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심히 걱정되기도 한다. 이 글이 ‘곡학아세’와 ‘언어도단’으로 비춰질 수 있음도 경계한다.
허나 이들로 인해 ‘민언련’은 오롯하게 내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현재 경향신문 노동조합 사무국장을 맡고 있는 나는, 우리 조합원들을 위한 무료 중국어 강좌에 임상택 전 민언련 사무총장을 초빙해 교육 중이다. 또 이들과 오늘 나눈 대화는 미래를 살아갈 또 하나의 에너지다.
돌아보면 아현시장을 훑으며 부딪혔던 술잔과, 이들과 마주했던 눈동자들로 인해 오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원를 ‘득템’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취중주사이던 진담이던 이들과 나눈 눈물어린 포옹은 후안무치한 세상과도 열렬히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용기를 줬다.
참 이 순간, 오해를 남길 수 있어 교과서적인 얘기를 첨언한다. 우리가 모여 놀자판만 벌인 것은 아니다. 당시 우리 팀(?,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다)은 신문과 방송에 실린 선거 관련 내용 중 한쪽에 경도된 내용이 뭔지, 사설 중 문제의 여지가 있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 매일 보고서를 만들었다. 방송의 경우, 뉴스는 각사 저녁 9시대 뉴스를 그 분석 대상으로 놓다보니 밤 12시가 넘어 일이 끝나기 일쑤였다. 그렇게 반복적인 일상 속에서 매일 이어진 뒷풀이는 내일을 살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했다. 나름 열심히 했고, 그 성과는 그 다음 대선으로 이어져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2기를 맞을 수 있는 기틀이 됐다. 이런 매체 분석 활동은 이후 민언련을 비롯한 많은 시민단체의 정규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오체투지와도 같았던 그 시절 난장은 자랑거리만은 아니다. 노력했음에도 언론환경은 변하지 않았고, 기원했음에도 여전히 요원한 일이 되고야 말한다. 여전히 후배들에게 그 숙제를 떠민 선배는 부끄럽다. 최근 몇차례 초청에도 민언련의 행사에 참여 못한 것은 그런 이유가 기저에 깔려있다. 고로 난 민언련에서 받은 것만 있는 뺀질한 선배다. 핑계에 의지해 민언련의 여러 활동을 ‘행동하지 않는 양심’으로 쳐다만 본 안타까운 영혼인 셈이다.
이 모습에 귀차니즘에 빠진 나태한 언론인의 모습이 오버랩될 지 모른다. 내 성정에 문제가 있는 것을 전체 언론인의 모습으로 너무 쉽게 일반화하려는 지금의 ‘꽁심’도, 이런 나태함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반성의 끈은 놓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여전히 매주 수요일이면 이○○와 신△△를 만난다. 또다른 일로 나머지 인사들을 종종 만난다. 반가움에 맥주 한순배가 돌아간다. 넉살 좋은 웃음이 오가고, 취기어린 농짓거리가 이어진다. 한순간을 살아도, 산맥처럼 당당하지 않지만 뒷산처럼 소담스러우려 노력한다. 민언련으로부터 대용량의 혁명의 기운을 패치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 아니 우리 유전자에 ‘지속가능한 반골’의 기질을 착상받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몰랑’에 뒷담으로나마 대적할 힘은 오늘 우리 술잔에만은 가득하다. 확 마셔버려~ 원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