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전문 변호사? 어떻게 연이 닿았던 거죠"
생대구탕을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민언련 정책위원인 한상혁 변호사다. 지난 4월 한 변호사가 찾아와 민언련 사무처 식구들에게 대구탕을 쐈다. 유리문에 빨간, 파란 시트지로 ‘생대구탕’이라고 촌스럽게 붙어있어서였을까? 사무실 근처 식당이었는데도 여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과 탱탱한 대구살을 먹으면서 ‘맛집 발견’이라고 환호했다. “고기 구워먹는 것 보다 생선 탕 요리가 좋다”고 말하는 한 변호사의 말에 격하게 동의하며 국물을 또 한번 후루룩. “캬~”
‘생대구탕’ 이름만 떡하니 붙여놓은 허세 없는 식당이, 시원하고 얼큰한 그 맛이 한상혁 변호사를 닮았다.
한상혁 변호사. ‘삼성 X파일’사건 이상호 대리인, MBC 방문진 이사, 방통심의 광고특별위원회 위원,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위원, 케이블TV시청자협의회 위원…. 지상파부터 케이블까지, 신문부터 방송까지, 언론 관련 분야에서 그의 활약은 종횡무진이다.
제적과 강제징집, 그리고 아버지
한상혁 변호사는 81학번이다. 변호사가 된 것은 2001년이다. 20년의 시간동안 어떤일들이 있었을까?
“입학했던 81년이 전두환 정권 초기였어요. 그 당시에는 1학년들이 전체가 문무대로 가서 군사훈련을 받았거든요. 저도 81년 11월에 군사훈련에 갔죠. 그런데 그날 전체적으로 ‘이거 한번 개겨야 한다’는 분위기였어요. 점심 때 입소식을 해야하는데 학생들이 다 같이 스크럼을 짜고 시위하는 바람에 저녁 7시가 돼서야 입소식이 진행됐죠. 그 일이 있은 후 방학을 하자마자 109명이 강제 징집돼 군대로 끌려갔어요. 19명은 제적, 1명은 무기정학, 나머지 89명은 직권휴학을 당했죠.”
‘고대 109인 사건’이다. 그때 제적된 19명 중 한 명이 한상혁 변호사다. 강제징집 된 후 84년 학원자율화조치와 함께 복학했지만, 학교가 아닌 현장을 택했다.
“복학하고 나니까 동기들이 4학년이 되면서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더라구요. 그래서 구로·영등포 쪽에서 같이 활동했어요. 그쪽에서 현장활동과 야학을 했어요. 성수동 쪽에서도 오래했죠.”
더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지만, “옛날 얘기는 해서 뭐해”라며 저어한다. 그는 89년부터 5년간 보험회사에 다녔다. 그러던 중 92년 한상혁 변호사의 아버지 사건이 벌어진다. 당시 충남 연기군수였던 아버지 한준수 씨는 3월에서 벌어진 관권개입 부정 사례를 폭로했다. “직을 걸고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라”는 윗선의 지시에 따라 군과 읍면, 리 단위까지 조직적인 표 관리를 벌이는 등 불법이 이뤄졌다는 사실이었다. 아버지는 8월 말, 양심선언을 하고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사로 몸을 피했다. 9월 5일이 한상혁 변호사의 결혼식이었는데 아버지의 참석이 불투명했다. 민주당은 일부러 한 변호사의 결혼식 날에 맞춰 대전역에서 부정관권선거 규탄 집회를 열었고, 그 행렬에 함께한 아버지는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일신상의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었어요. 저 때문이었죠. 안기부 사람들이 와서 군수 못 나가는 이유가 아들 때문이라면서 아들 데모 그만두게 하라고 했었죠. 결혼식날도 마음이 아팠죠.”
신혼여행을 떠나려 하는데 경찰이 소환장을 갖고 아버지를 찾아왔다. “인륜지대사도 모르는 놈들”이라며 쫓아냈지만, 결국 아버지는 사흘 후 경찰에 끌려갔다.
마흔 살에 변호사가 되다
그것이 한상혁 변호사 삶의 방향도 바꿨다.
“아버지 사건이 나고 회사 다니기도 깝깝하더라구요. 회사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됐으니까요. 또 아버지 사건을 맡고 있었던 이상수 변호사와 박계동 의원과 자주 만나게 됐는데, 그 분들이 공부를 다시 하라고 설득을 했죠.”
그렇게 공부를 시작해 98년에 사법시헙에 합격했다.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마치고 변호사가 됐다. 그리고 언론과의 연이 시작됐다.
“2001년도에 MBC 미디어비평 프로그램이 생겼는데, 아무래도 제작진 사이에서도 불편한 게 많은 코너였어요. 주로 신문사들의 보도를 문제 삼는 거니까요. 그래서 법적인 문제가 없는지 자문을 구했고, 그때부터 평가회의를 같이 들어가면서 MBC와의 연이 시작됐어요. 그 때 함께 했던 김택수 변호사가 민언련과 오랜 인연이 있었던 사람이어서 민언련과도 연을 맺었죠”
81년 강제 징집 때도, 이후 현장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언론 현실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다.
“사실(fact)과 보도의 차이가 커서 분노했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에요. 왜곡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그런데 언론이 문제라는 일반적인 정서는 갖고 있었지만, 이렇게 언론에 깊숙히 활동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MBC 자문을 하면서 이상호 기자와의 연이 시작됐다. <사실은>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만난 후, 삼성X파일 폭로까지 변론을 맡았다.
"워낙 사고를 많이 치는 기자죠. 사회적으로 민감한 부분을 가장 많이 건들이는 기자라서 사건이 많았죠. 특히 X파일 때 관계가 깊어졌어요. 그 때 MBC 내에서도 X파일을 보도하느냐 마느냐로 논란이 많이 벌어졌었어요. 변호사들도 법률적 문제가 있다고 엇갈렸죠. 저는 최종적으로 보도해야 한다고 의견을 냈어요. 다소간의 법률적 문제는 있을 수 있는데 그거보다는 공익적 필요성이 더 크다고 했죠.”
그렇게 맺어진 인연이 아직까지도 ‘대구탕’을 종종 먹으면서 이어지고 있다.
정권의 방송장악…상식이 사라진 MBC
2009년에는 방송문화진흥회 이사가 됐다. MBC노동조합의 추천이었다. 그러나 MB정권의 방송장악의 칼부림이 몰아치던 시기였다.
“김우룡 이사장과 김재철 사장이 있었던, 제일 첨예할 때 맡게 됐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서로 간에 말이 안통하는 시절이니까요.”
한 변호사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김재철 사장에 대해 ‘즉흥적’이라고 평가했다. 보직부장들과 회식을 하다가 “해외연수 안 다녀왔지? 다녀와”라고 말한다거나 사다리를 타서 연수지역을 정하는 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당 추천 이사들은 ‘막무가내 감싸기’로 상식적인 문제제기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언론운동의 관점에서 공영방송 MBC를 잘 지키는 것은 매우 중요해요. 그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10년이상 MBC와 연을 맺어왔고, MBC의 다양한 구성원들과도 좋은 관계였기 때문에 MBC가 잘 돼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저쪽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MBC가 잘되고 안 되고 문제는 뒷전이고, 오히려 망가뜨리는 게 목표일수도 있다는 추측까지 들더라구요.”
당시 MBC 시청률의 주축은 비판적인 의식을 갖고 있는 3,40대 젊은 층이었다. 한 변호사가 자료의 수치를 보여주며 이들의 요구에 맞는 방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거 때문에 MBC가 정체됐다”, “노년층에 맞춰야 한다”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분석자료가 있어도, 논리가 있어도 “얘기를 해야 씨도 안 먹히고 들은 척도 안하”는 이사회였다. 정권의 방송장악 시나리오에 따라 비상식적인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MBC는 방송민주화 투쟁 이후에 노조의 힘이 강했죠. 자기 목소리들을 끊임없이 내왔어요. 그렇기 때문에 MBC는 어떤 경우에도 자기정체성을 유지할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그냥 한순간에 무너지잖아요. 이건 경영진이 노조를 인정해 줄 때 되는거에요. 지금 MBC는 막무가내에요. 단적으로 단협을 체결 안 해주잖아요. 대표적인 이유가 전국언론노조 빠지고 단위사업장 노조로 돌아오면 해주겠다는 거죠. 이건 전형적인 부당노동행위에요. 그런데 처벌 받아도 상관없이 그냥 가겠다는 거거든요. 막무가내로 가면 답이 없어요. 일말의 체면도 없이 안면몰수한 상황인거죠.”
인사발령 해 놓고 재판해서 무효라고 하면, 다른 곳으로 또 보내고…분명 상식적인 상황이 아니다.
“제가 아는 MBC 기자들은 다 다른 부서에 가 있어요. 빈 사무실에서 놀고 있어요. 이건 경영진 배임이에요. 광고내고 하는 건 또 뭐에요. 조중동 신문에 왜 광고를 내요. 몇 억씩 들어가는데, 방송사라는 큰 매체가 왜 신문에 광고를 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죠”
한상혁 변호사의 사무실 정면에는 신영복 교수의 서화가 걸려있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 신영복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더욱 밝게 빛난다는 사실처럼 따뜻한 위로는 없습니다”
비상식이 난무하는 세상, 정권에 입맛에 맞게 언론이 장악된 세상. 휘어진 펜대를 바로 세우는 민언련과 상식을 바로 잡으려는 시민들 앞길은 깜깜하기만 하다. 그러나 따뜻한 위로를 마음에 새기며 더욱 반짝 빛나도록 걸어가야 할 때다.
“지금 하고 있는 민언련 활동은 정책위원분들과 만나는 게 다에요. 회원들과 자주 어울리고 해야 분위기도 알고 하는데, 젊은 회원분들은 제 딸 또래가 되니까 갭이 좀 있어요. 어울리면 좋죠. 근데 수련회에서 게임하고 이러면 우리는 쑥스럽다고요. 스멀스멀 뭐가 기어다니는거 같고….(웃음)”
이번 회원수련회는 세대가 함께 어울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야겠다. ‘스멀스멀 기어다니지 않는’ 참신한 아이디어는 대환영이다.
유민지 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