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경훈 회원
‘어떡하지?’ <민언련과 나>라는 제목만 덩그러니 적힌 문서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공지영의 소설 <즐거운 나의 집>을 인용하며 한참을 쓰다 문득 ‘이건 아닌데’란 생각이 들어 지웠다. 제목만 남은 문서를 보니 대체 뭘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한마디로 ‘노답’이다. 유민지 간사에게 전화를 해 다른 사람이 쓰면 안 되냐고 물었지만, 내가 안 쓰면 대안이 없단다. 마가렛 대처도 아닌데 대안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나야말로 지금 대안이 없어 곤란하건만.
진퇴양난의 심정으로 다른 사람들은 <민언련과 나>를 어떻게 썼는지 참고하기 위해 민언련 소식지를 뒤적거렸지만, 이내 다른 글에 눈길이 머물렀다. 내가 썼던 부끄러운 글, 다들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며 썼던 신문분과모니터 보고서, 함께 분과활동을 했던 회원들의 글. 그러다 2015년 2월호 소식지에 실린 김용범 회원, 아니 용범이 형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모니터 활동도 좋고 다 좋은데, 여기서 만나는 사람들이 제일 좋을 거다. 이름을 일일이 부르고 싶을 만큼 이곳에서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는 용범이 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민언련 활동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역시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이다. 가끔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나를 잘 따르는 현진이, 언제든 편하게 만나 고민 상담할 수 있는 용범이 형, 노래분과를 하면서 친해진 좋은 동생 현준이, 이제는 남한에 제법 많이 적응한 한반도인 선일이(하지만 완벽 적응은 아직 요원하다), 최근에는 민언련 행사에 자주 못 나오지만 특유의 쾌활한 성격으로 모임의 분위기를 밝게 만드는 정아(그러니 좀 나와라) 등. 그 외에도 민언련에서 좋은 인연들을 많이 만났다.
요즘도 가끔 민언련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매주 수요일 신문분과 회의가 끝나면 술 취한 눈으로 비틀거리며 시국을 논하곤 했다. 때론 의견이 달라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지만, 그런 대화 속에서 내 생각을 다시 점검하고 배울 수 있었다. 2012년 언론사 연대 파업에 연대하며 시민단체들이 텐트농성을 하던 날은 여의도에서 사람들과 함께 밤새 술을 마시고 민중가요를 불렀고, 2012년 대선 투표도 분과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술을 마시며 결과를 지켜봤다. 쓰고 보니 어째 맨날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렇게 한잔 하면서 마음속의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곁에 있어 민언련 활동이 즐거웠다.
신문분과 활동을 그만둔 후 한동안 중요한 행사에만 얼굴을 내밀며 조금 민언련과 멀어졌을 때도 있었지만, 노래분과 활동을 하면서 다시 사람들과 가까워졌다. 함께 노래를 선정하고, 연습해 무사히 공연을 끝냈을 때는 성취감을 느꼈고, 같이 고생했다는 느낌만큼 더 친해진 느낌이었다. 현준이처럼 오랫동안 알긴 했지만 친하진 않았던 사람들도 노래 분과를 같이 하면서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요즘은 노래분과에 얼굴을 잘 못 비치고 있어서 조금 미안한 마음이다.
금속노조에서 일을 시작한 후, 민언련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이 얼마나 질긴 것인지 새삼 느낀다. 신기할 정도로 현장에서 민언련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첫 집회 취재였던 세월호 1주년 추모집회에서부터 민언련 깃발을 들고 나온 회원들을 만났다. 5월 1일 세월호 집회에서는 최루액 물대포를 맞고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현진이를 만나 카페에서 그날 밤을 함께 샜다. 6월 3일 열사정신계승대회에서 이하늬 선배를 만나 기자와 취재원으로서의 관계를 형성하는 중이다. 6월 11일에는 기자회견 취재를 나갔다 사회자로 나온 김언경 사무처장님과 김서중 교수님을 만났다. 6월 17일에는 울산에서 불법파견·간접고용 철폐 결의대회를 취재하다 병국이 형을 만났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것만 해도 이 정도다. 이렇게 현장에서 민언련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다. 그럴 때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김광섭의 <저녁에> 마지막 구절을 떠올린다. 민언련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저마다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