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벨라짱, 김성례 회원.” 10년이 넘게 민언련과 함께한 회원이지만, 이름과 닉네임 외엔 별다른 정보가 없었다. 인터뷰를 하려면 그 사람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적당히’ 필요한데, 인터뷰를 하러 가는 길에서도 어떤 방향으로 얘기를 나눠야할지 막막했다. 그때 ‘까똑’. “안부 전해주시고 좋은 기(氣)받아오세요” 김언경 사무처장이다. 남의 속도 모르고…. 덕수궁 앞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김성례 회원이 왔다. 얼굴에 만연한 웃음을 띤 채 걸어오는 데 쭉 뻗은 키 때문이었는지, 햇살에 반사된 하얀 옷 때문인지, ‘좋은 기’가 아른거렸다. “처음 뵙겠습니다.”라는 인사가 무색할 만큼, 곧장 수다삼매경에 빠졌다. 상기된 얼굴로 인터뷰가 너무 즐겁다는 듯이 시종일관 호쾌하게 웃는 김성례 회원 덕분에 자신감 장전! 정말 좋은 기(氣)를 듬뿍 쬔 만남이다. -유민지 활동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 ‘노사모’
‘벨라짱’은 노사모에서 활동하면서 붙여진 김성례 회원의 닉네임이다. 벨라짱이라는 이름이 생기면서부터 새로운 인생 2막이 열렸다.
“저는 강남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어요. 대학 졸업장을 ‘혼수’라고 생각할 만큼 별 고민이 없던 학생이었죠. 고등학교 다닐 때 광주에서 전학 온 친구가 광주의 진실을 얘기하는데, 그 친구가 빨갱이 말을 한다며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무리에 있던 사람이에요.”
그러다 대학생이 된 후 세상을 너무 모르고 살았다는 걸 알았다.
“이제 옳은 것이 뭔지는 알았지만, 앞에 나서는 건 너무 무서웠어요. 그 때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 나기도 했거든요. 학교에서 운동하는 친구들을 경찰이 잡으러 들어올 때 함께 바리케이트를 치고 막는 것이 제가 낸 용기였죠.”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막 창간했던 한겨레신문을 일본에서도 신청해 구독하며 세상이 뭔가 변할 수 있다는 꿈을 꿨다. 유학이 끝나자마자 결혼을 했고, 연년생으로 아이 둘을 낳고 키우면서 오로지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 집중하며 살았다. 그러다 운명의 순간이 왔다.
“2000년 총선 때였어요. 제가 그때 만삭(셋째)이었는데, 총선 결과에 너무 분노했어요.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고 부산으로 갔던 노무현 후보도 떨어지고, 울산에 민주노동당 후보도 떨어졌죠. 밤새 투표 결과를 보다 어찌나 흥분했던지, 다음날 양수가 터졌어요.”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 구성된 것이 바로 이 때다. 당선이 유력한 서울 종로구가 아니라 ‘지역주의의 벽을 넘겠다’며 부산에 도전했던 노무현 후보의 낙선 이후 오프라인 공간에서 ‘노사모’가 조직되기 시작했다.
“대학교 4학년 때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은 청문회 스타였어요. 참 괜찮은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떨어지는거에요. 저도 남편도 ‘노사모’ 활동을 시작했죠. 이런 정치인이 대통령이라면 좋겠다는 꿈을 꿨는데, 어느 순간 꿈이 이뤄지고 있더라구요.”
2001년 11월, 한겨레에서 실시한 대선후보 지지도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은 2%에 불과했다. 그런데 국민경선을 거치면서 ‘이인제 대세론’을 꺾고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뽑혔다. 여기에는 국민경선장을 노랗게 물들이던 노사모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
“딸 둘에, 기저귀 찬 막내까지 데리고 지역 곳곳을 돌아다녔어요. 남편도 밤새워 일한 다음에 함께 내려갔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런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힘든 줄 몰랐어요. 하루 하루 눈 뜰 때마다 꿈이 현실이 되고 있으니 너무 행복했어요.”
김성례 회원의 얼굴이 상기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많은 감정들이 김성례 회원을 훑고 지나갔다.
“노사모를 하면서 자신감과 용기를 갖게 됐어요. 그 이후에 학교 운영위원도 참여하고, 생협 활동도 더 적극적으로 하게 되고…. 그러다 노 대통령이 가신 후에는 자포자기하고, 우리나라는 희망이 없다는 실망감 때문에 스스로를 놓기도 했지요.”
잠시 숨을 고른다.
“대통령과 그 주위가 바뀐다고 세상이 변하는 게 아니라 밑에서부터 변화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죠. 협동조합이 그 답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더 열심히 생협에 매달렸던 것 같아요”
의정부 생협 이사장을 맡아서 8년, 부이사장 3년. 총 11년이다. 협동조합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은 어떤 결실을 맺었을까?
“흐흐...우리 전국 꼴찌에요. 회원수 꼴찌, 매출액 꼴찌”
민언련 회원이 된 것은 노사모 활동을 하면서다.
“민언련은 알고 있었어요. 오랫동안 언론운동 해왔잖아요. 민언련을 보면서 참 현실적으로 운동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관념적으로만 목소리 높이는 게 아니라 늘 실천으로 보여준다는 거요. 그래서 언론학교도 듣고, 회원가입하고, 안티조선운동에도 함께 했죠. 안티조선 운동은 이데올로기 싸움이 아니였어요.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이죠. 그런 싸움을 하는 민언련이 좋았어요.”
안티조선운동을 하면서 신문시장 불법 경품을 근절하기 위한 운동도 함께 했다. 2005년에는 신문 불법 경품 사례를 신고해 포상금으로 205만원을 받기도 했단다.
“그렇게 받은 포상금으로 아이 대안학교 입학금을 냈어요. 사례를 정리해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기도 했지요. 민언련과 만나면서 갖게 된 특별한 경험이에요.”
남편은 내 인생의 로또!
아이 셋을 둔 아내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남편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어느 연기자가 자기 아내를 보고 ‘로또’라고 표현했대요. 하나도 안 맞는다고…. 저도 제 남편도 로또라고 말해요. 정말 하나도 안 맞거든요. 그런데 서로 ‘노사모’ 활동은 딱 맞았어요. 함께 응원하고, 함께 모임에 참여하고…. 제가 문성근 대표를 좋아하는데, 강좌가 있으면 남편이 잘 보이는 자리를 잡아주기도 했어요. 제가 애들 데리고 늦게 오니까 좋은 곳에서 보라고….”
로또라며 맞는 게 하나도 없다는 말로 시작했는데, 듣고 보니 칭찬이다.
“남편은 집성촌에서 자란 청년인데 자기가 대학에서 배운 걸 농촌사회에 기여하고 싶어 했어요. 양주 젖소 농장 쪽에 병원을 내고 젖소를 치료하는 수의사가 됐죠. 그런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았어요. 이쪽이 다 재개발되면서 젖소농장은 문을 닫거나 철원 쪽으로 옮겨갔죠. 그래서 지금은 개고양이 동물병원을 해요.”
남편과 맞는 게 또 한 가지 더 있다. 교육에 대한 것이다. 김성례 회원은 세 아이 모두 대안학교인 늦봄 문익환 학교에 보냈다.
“남편이랑 그런 얘기를 해요.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는 것과 실제 행동이 다를 때가 있잖아요. 그런 이중적인 모습에 아이들이 혼란스럽고 실망할 수 있다고…. 하지만 대안학교 선생님들은 언행일치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요. 정말 신뢰하고 있어요.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자랐구요.”
2012년 <동아일보>는 늦봄 문익환 학교에 대해 ‘친북성향의 학교’라며 교육과정을 비판했다. 정원이 80명밖에 되지 않는 비인가 대안학교 비판을 위해 한 지면을 다 사용했다. 교사도, 학부모도, 교육방식도 친북이라고 몰아가는 전형적인 색깔론, 과장·왜곡 보도였다.
“저들이 늦봄 문익환 학교를 약한 고리라고 여기고, 아예 싹을 밟으려고 시작한 거였어요. 남편이랑 1인시위 하려고 동아일보 앞에 많이 나갔어요. 우리 뿐만 아니라 늦봄학교 학부모들이 함께 똘똘 뭉쳐서 싸웠어요. 저들도 우리가 이렇게 강하게 나올지 몰랐을 거예요. 끝까지 붙어서 재판에서 다 이겼거든요. 개인별로 소송도 내서 70~100만원 정도 배상금도 받아내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12명 쯤 되니까, 그 돈 모아서 학교 건물 짓자고 하고 있어요. 한 언론사의 악의적 보도로 참 지난하고 힘든 과정을 겪은 셈이죠.”
함께 싸워낸 학부모들은 제2의 꿈을 꾸고 있다.
“노후를 위해 공동체 공부를 하고 있어요. 학교를 중심으로 학교 마을 공동체를 만들려고 해요. 사유재산 을 인정하지 않는 공동체요. 사유재산을 갖고 있을 수 있는데, 그 돈을 마을로 갖고 들어와서 혼자 윤택하게 살면 안 되는 거죠.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게 쉽진 않더라구요. 나의 모든 걸 죽이고, 맞추고, 노력해야 하잖아요. 낯설고 힘들지만, 이렇게 준비하면서 가려고 해요. 지금의 꿈은 공동체를 만들고 거기서 살다가 죽는 거예요.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걸 위해 공부를 하고 있어요.”
꿈꾸지 않으면 사는게 아니라고, 별 헤는 맘으로 없는 길 가려네 - <꿈꾸지 않으면> 노래 가사 중
꿈, 장래희망…어느 때 부턴가 누군가에게 묻기도, 나 스스로에게 묻기도 어색한 말이 됐다. 꿈을 갖고, 그 꿈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김성례 회원과 인터뷰하면서 다시금 ‘꿈’이라는 단어가 날아들었다. 나는 어떤 미래를, 어떤 세상을, 어떤 삶을 꿈꾸고 있었던가? 다시 스스로에게 되묻는 시간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