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호] [회원인터뷰] 난 변방사람, 혁명은 변방에서 이뤄지는 거니까 (김동민 회원)
등록 2016.04.20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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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인터뷰-김동민 회원]

난 변방사람, 혁명은 변방에서 이뤄지는 거니까

 

 

 

 

“시대가 바뀌고 있다. 민언련의 활동도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매달 한번 씩 열리는 정책위원회 자리였다.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거나 ‘활동가들에게 빅데이터 교육을 해야한다’거나 ‘제대로 된 저널리즘스쿨을 만들자’는 주장 등도 나왔다. 돌출발언에 가까운 이야기였나 싶기도 했지만 정책위원회는 하반기 동안 ‘민언련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민언련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견이 교차했다. 민언련의 좌충우돌 토론은 그만큼 또 한걸음 성장하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이러한 ‘문제제기’의 첫 포문을 연 사람이 김동민 이사다. -글: 유민지 활동가, 사진: 이병국 회원

 


변화의 시작, ‘언론학교’
그가 민언련(당시 언협)을 만나게 된 것은 1989년이다.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박사과정에 있을 때 김택수 당시 기획부장이 사무국장을 맡지 않겠냐고 제안했어요. 김택수와 어떻게 아는 사이였나고요? 하도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요.(웃음)”


민언련에 그를 처음 끌어당긴 김택수 이사(당시 언협 기획부장)와의 인연을 찾기 위해 <대학정론> 얘기를 시작했으나, 결국 답을 찾지 못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왔다. 그가 첫 발을 디뎠던 89년의 언협은, 한겨레신문 창간으로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빠져나간 상황이었다고 한다.
“무엇을 해야 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었어요. 정말 공동화 상태였으니까…. 당시에는 회원도 없고, 정동익 의장과 김택수 간사 한명 정도 있었거든요.”


해직기자들의 자유언론 투쟁부터, 『말』지를 만들어 정권의 실상을 폭로하던 시대를 지나, 이제 새로운 시작부터 ‘무엇을 해야 할까’였다. 오랜 고민 끝에 나온 사업이 ‘언론학교’였다.
“민주화 이후에 시민단체들이 강좌를 많이 했는데, 우리도 ‘언론’이라는 주제로 강좌를 개설하기로 했죠. 원래는 100명 수강을 목표로 했는데, 강의 공고가 나가자 신청이 쇄도하는 등 열기가 높았어요. 결국 120명이 넘게 강의실을 꽉 채웠죠. 그 열기를 이어 분기별로 언론학교를 시작했어요. 수강생들도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그 중 일부가 언협 회원으로 남기 시작하면서, 언협이 회원중심의 조직으로 변화하기 시작했죠.”


해직된 기자, 출판인들 중심으로 1984년 첫 깃발을 세웠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언협)가 시민단체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민언련)으로 변화한 ‘결정적 순간’이다. 그렇게 모인 ‘시민’들이 ‘언론개혁운동’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때 강의를 듣고 회원이 됐던 사람들이 주축이 돼서, 92년부터 선거보도감시 활동을 시작했어요. 민언련과 여성민우회, NCC언론대책위, 중대 대학원생 모임 등이 연대해서 선거보도감시연대(이하 선감연)를 만들어 4월 총선과 12월 대선보도를 감시했죠.”


선거보도감시활동은 유권자 운동이자, 시청자 운동이자, 시민운동이다. 김동민 이사는 96년 까지 선감연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처음 시작한 일인 만큼, 기초를 다져 놓는 것이 중요했다. 모니터에만 머무르지 않고, 대국민 캠페인과 항의방문 등으로 왜곡보도를 지적했다. 민언련에게 선거보도감시는 그렇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민언련이 해야 할 가장 주요한 일로 이어질 것이다.


96년 9월, 한일장신대 교수로 채용돼 전주로 내려간 그는, 그 곳에서도 ‘언론개혁’의 뜻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 전주 지역의 ‘민언련’을 만들었다.
“전주에 내려갔더니 ‘전주 시민회’라고 있었어요. 그곳에서 전북지역 시민들에게 언론강좌를 열더라구요. 후에 시민회에서 ‘언론강좌’를 진행했던 친구들(박민, 오수경, 송기도 등)과 99년에 전북민언련을 세웠습니다.”

 

 

안티조선, 싹을 틔우다.
2000년,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 언론개혁의 바람이 불었다. 특히 강력했던 활동을 꼽자면, ‘안티조선(일보)운동’이다. 그 운동의 중심에 김동민 이사가 있다. 안티조선운동이 처음 시작된 게 언제냐는 질문에 기억을 더듬는 시간도 없이 “2000년 9월 20일”이라며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답변했다. 어떻게 날짜까지 말씀하시냐는 질문에 “창립일이거든요, 조선일보 반대 시민연대 창립일”이라며 웃는다.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에 대한 그의 애정이 느껴졌다.
“98년 말에, 조선일보가 최장집 교수를 흔들었는데, 그게 시작이었어요.”


김대중 정부는 최장집 교수를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자 <월간조선>은 ‘최장집 교수의 충격적 6·25 전쟁관 연구’라는 제목으로 최 교수를 ‘빨갱이’로 몰았다. 이어 조선일보가 <월간조선> 보도를 대대적으로 받아쓰며 여론전을 시작했고, 연일 최 교수를 비난하는 우파 단체의 집회와 성명을 보도하는 등 최장집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을 벌였다. 결국 최 교수는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을 그만 뒀다.
“최장집 교수가 소송했고, 민언련, 전교조 등이 ‘조선일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조선일보의 선동 저널리즘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나 최 교수가 사퇴하고 소를 취하하면서 공동대책위원회도 해산됐죠. 당시 저는 조선일보의 이런 짓은 계속될테니 공대위를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관철되지 않았어요.”


공대위가 해체된 후 그는 ‘조선일보 기고·인터뷰 거부 지식인 선언’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9월까지 4차례에 걸쳐 진행된 선언에 수천 명의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1차 지식인 선언이 나온 후, ‘조선일보반대시민연대’가 만들어졌다.
“지식인 선언에 대한 호응이 좋았어요. 다들 조선일보의 행태에 분노했으니까. 지식인 선언 자체가 갖는 상징성도 컸죠. 그런데 사실 그 조직화가 생각보다 어려워요. 조선일보 문제를 알고는 있지만, 실제 본인이 겪지 않으면 절실한 문제인지 모르는 것도 있고, 또 ‘활용론’을 앞세우기도 하거든요.”


운동진영에서도 안티조선운동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정 신문만을 대상으로 ‘안티’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계 전반을 대상으로 언론개혁 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또 시민사회의 역량이 분산된다는 반대 의견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안티조선’운동은 주변사람들을 설득해내고, 조직해내며 이슈를 만들었고,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조선일보의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상했다는 점, 그리고 조선일보가 무엇이 문제인지 시민들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당시 목표도 조선일보를 보지말자는 대중적인 분위기를 만들고자 했던 것이죠.”


안티조선운동은 조선일보가 일개 언론사가 아니라 ‘친일·친독재·반민주 정치집단’임을 드러냈다. 친일 신문이 해방 이후, 군부에 붙어 성장하면서 선거를 왜곡하고, 정치를 왜곡하고, 유권자들을 뜻을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짓밟은 조선일보의 행태를 낱낱이 고발했다.
“안티조선운동이 실패했다는 평가도 있어요. 결국 아직도 조선일보가 폐간되기는커녕, 변하지 않았고, 그 기세도 꺾이지 않았다는 거죠. 그렇지만 안티조선운동으로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에 대해 시민의식이 생겼다는 것, 그 씨앗이 뿌려지지 않았나요?”


나도 민언련과 아무 연관이 없었던 대학시절부터 안티조선운동을 알고 있었다. 조선일보가 왜곡·편파보도를 내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의 기고문과 유인물, 지하철에 붙어있던 스티커를 통해 접할 수 있었다. 2008년 촛불집회 때도 사람들이 조선일보 앞에 몰려가, 스티커를 붙이고 쓰레기를 버리며, 보도행태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며 항의했다. 이런 움직임들의 첫 씨앗은 분명 ‘안티조선운동’이 가져온 것일게다.

“민언련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건 안티조선 때부터 일거에요. 정말 많은 활동을 했어요. 민간법정, 공공의적 규탄대회, 1인 시위, 토론회, 항의집회…. 민언련 회원들과 활동가들이 헌신적이었고, 또 이런 활동이 매스컴에도 자주 나왔죠. MBC <PD수첩>, <100분토론> 등에서도 안티조선을 주제로 다뤘었어요.”

‘안티조선 운동’을 벌이던 그가 2003년, SBS 사외이사를 맡으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민언련 이사가 민영방송의 사외이사를 맡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한 비판부터, ‘안티조선운동’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 논란 끝에 그는 민언련 이사직을 사퇴했다. 2006년 다시 민언련 공동대표로 복귀했으나,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표직을 사퇴했다. 국정홍보처에서 운영하는 국정브리핑에 평택 미군기지 확장이전에 대한 시민단체 대응 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논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교수직을 맡고 있었던 한일장신대 신문방송학과까지 폐과되면서, 언론관련 활동이나 연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
“학교를 그만두고 나오면서, 갖고 있던 책을 전북민언련에 전부 기증해버렸어요. 될 때로 돼라,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통섭’, ‘융합’…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다
한동안의 부침 뒤에 다시 강의를 시작하고,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 때 ‘통섭’과 ‘융합’에 대한 고민이 시작됐다.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다가 물리학까지 배우기 시작했다.
“19세기는 학문이 분화되는 시기였는데, 그 때 휴얼이라는 사람이 ‘우리 다시 모이자, 종합적으로 보자’라며 ‘통섭’이라는 개념을 만들었어요. 이걸 윌슨이 가져와서 ‘생물학 중심으로 모이자’ 한 것이 사회생물학이거든요, 생물학 이론으로 사회를 설명하고자 한 거죠.”


인터뷰 도중 강의가 시작됐다. 메모장에 ‘통섭’을 한자로 統攝(거느린다)과 通涉(통하고 건넌다)으로 쓰며 본인은 융합적 차원의 의미를 담은 후자의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더니 물리학에 대한 설명도 이어졌다. “저 학교 다닐 때 물리 못했는데”라고 말하자 그가 웃으며 고등학교 3학년 때 이야기를 꺼낸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나는 공대 가고 싶었는데, 담임선생이 서울대 연고대에 가야한다는 거에요. 학교 실적이 중요하다는 거죠. 그러면서 고대 임학과에 원서를 쓰라고 하더라고요. 싫다고 했다가 ‘빠따’로 맞고 어쩔 수 없이 울면서 임학과 원서 썼어요.”


그렇게 들어간 학교 공부가 재미있을 수가 있을까, 방황하며 보내다가 사진에 취미를 붙였고, 찍다보니, 사진기자를 꿈꾸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신문방송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졸업해 리영희 선생님이 계시는 한양대 언론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 때 나를 ‘빠따’로 때린 선생 과목이 뭐였는 줄 알아요? ‘물리’였어요. 내가 그 사람 싫어서 1학년 때부터 물리 공부 절대 안했거든요. 근데 이번에 다시 물리를 해보니까 재밌더라고요…. 고등학교 때 지금처럼 물리학 공부를 했으면 인생이 달라졌을 텐데 말이죠.(웃음)”


고등학교 때 쳐다보지도 않던 물리를 환갑 언저리에서 다시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과학 기술의 변화로 미디어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가 연구하는 게 미디어에요. 그런데 미디어가 변해요. 그럼 그걸 알아가는 게 당연한 거죠. 미디어는 무지 빠르게 변화하기 때문에 저도 쫓아가기 바빠요. 마음처럼 다 잘 안되고…. 그런데 연구자가 변화하는 대상을 안 쫓아가는 게 이상한 거 아닐까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미디어에 대한 개념도 변하고, 예전에 나온 매스미디어 이론이 거의 다 무용지물이 될 상황이라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새로운 미디어 이론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선 지금의 변화를 세밀히 봐야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언론운동도 마찬가지에요. 공부를 해야 모순이 보여요. 시대는 변하는데, 우리도 그 변화를 감지하고, 언론운동의 방향을 새로 설정해야죠.”


그래서 매월 열리는 정책위원회에서 그는 ‘변화’를 끊임없이 주장했다. 민언련 활동 방향을 다시 잡아야 한다, 연구소를 만들어야 한다, 언론학교도 변해야 한다…. 그런 문제 제기가 ‘참언론 아카데미’에서 첫 결실을 맺었다.

 

또 다른 시작, ‘참언론 아카데미’
매주 월요일 밤, 민언련 교육관에서는 저널리즘을 정치·경제·사회문제와 연결시켜 공부한다. 또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물리학 등 과학과 저널리즘을 연결시켜보는 강의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사람들의 소통범위와 방식을 변화시키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미디어가 출연하고 있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융합’적인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곳곳에 김동민 이사의 고민이 녹아있다.
“우리나라 신문방송학과에서는 역사와 철학을 가르치지 않죠. 오로지 그 학문의 테두리 안에 갇혀있어요. 이건 옛날 방식입니다. 지금 필요한 건 통섭적인 또 융합적인 교육을 해야 합니다.”


‘참언론 아카데미’의 교감을 맡은 그도 2강·4강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를 통해 그가 주장한 ‘융합’과 ‘통섭’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2강에서는 과학적 통찰이 미디어를 바라보는 전망을 획기적으로 변화 시킨다는 것을 ‘마셜 맥루언’의 사례를 들어 해석했다. 맥루언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960년대에 이미 ‘지구촌’, ‘전자시대’라는 개념을 도출해냈다고 한다. 4강에서는 그리스철학으로 객관보도를 논하고, 동양철학(공자의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공정보도의 기준을 말했다.
“서양철학에는 공자맹자의 시비지심 같은 철학이 없어요. 서양의 개념은 주로 균형을 얘기하는 거죠.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자.’ 그 균형은 양적 균형이에요. A와 B의 주장이 엇갈리고 있을 때, 두 명의 주장을 똑같이 제시해야 한다는 거죠. ‘판단은 사람들이 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걸 보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서양에서 강조하는 ‘균형’은 ‘기계적 중립’이다. 그래서 미국의 저널리즘도, 그 영향을 받은 한국도 ‘기계적 중립’에 추가 쏠려있다고 지적했다. ‘기계적 중립’을 방패막이 삼아 언론인들이 제 역할을 방기하고 있다는 것, 언론인이 ‘시비지심’을 갖고 공정보도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인은 가장 많은 사람들을 접촉하고, 자료를 조사하죠. 그 과정에서 어느 쪽이 옳고, 어느 쪽이 그른지 판단이 서요. 그러면 그걸 보도에 반영해야죠.”


이렇듯 철학과 역사,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은 언론인들의 사고를 확장시킨다. 이 뜻을 담은 ‘참언론 아카데미’를 통해, 자유롭고 다양하게 사고하는 ‘참언론인’이 많이 배출된다면, 또 다른 언론개혁 운동의 씨앗이 될 것이다.

“‘참언론 아카데미’가 대안대학처럼 됐으면 좋겠어요. 대학에서 취업 위주의 교육만 하잖아요. 인문학적인 지적 갈증을 가진 이들이, 사회생활을 하다가 다시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기레기’가 돼 버린 언론인들이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는 곳이요. 짧게 말고, 3, 4학기정도로 길게 공부하면서, 언론만이 아닌 역사, 철학, 과학 등을 깊이 있게 나누는 ‘지식창고’가 되면 어떨까요? 물론 지금 당장은 못하겠지만요.”

“공부는 자기 혼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실천하고 나누는 것까지가 완료”라는 그의 말이 묵직하게 다가왔다. 이제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새로운 미디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파고든다. 나의 연구하는 대상이 변하기 때문이고, 다른 이들과 실천하고 나누기 위함이다.


5년 뒤 언론환경은 어떨까, 5년 뒤 민언련은 어떤 활동을 주력해야 할까, 변화하는 시대에 지금 우리가 차근차근 준비해야 할 과제는 무엇일까…. 7년차 활동가인 내 머릿속을 어지럽게 하는 질문들이다. 그 ‘물음표’의 답을 찾아가는 첫 걸음을 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