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 후 당시만 해도 사람들이 좀처럼 가지 않던 길을 그가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게 벌써 20년도 훨씬 전 일이다. 그 후배가 책을 냈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을 통해 들었다. “기부 삼아”(?) 주문한 책이 밤늦게 배달되었다. 일단은 궁금한 마음에 또 방금 도착한 책에 대한(혹은 그 책의 지은이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책을 펼쳐보았다가 그 자리에서 내리 다 읽어버렸다. 이틀 후 학회 발표 준비도 해야 했고, 채점을 기다리는 기말고사 답안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건만. 첫 몇 페이지 맛만 보고 덮어 두면 되겠지 생각하고 첫 장을 열어본 게 실수였다. 다 읽고 나니 새벽 네 시였다. 글이 매끄러워 쉽게 읽히지만, 담담하게 써내려간 한 줄 한 줄 속 담긴 그의 느낌이 조금씩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더뎌지기 시작했다.
<멀고 낯설고 긴, 여행이 필요해>는 지난 십수년간 환경운동을 해왔고, 과천시 의원을 거쳐 과천시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서형원이 훌쩍(?) 다녀온 쿰부 히말라야 트래킹 기록이다. 뭔가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뭔가를 내려놓기 위해서였는지, 혹은 이도 저도 아니고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장엄한 자연 앞에서 그저 걷고만 싶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다. “실직자가 되었고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해야 했던”그가 그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어딘가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찍은 곳은 바로 쿰부 히말라야였다. 그것도 열다섯 살짜리 딸과 함께. 아빠를 원수처럼 생각하는 딸과 함께.
무릇 여행기는 이렇게 써야 한다. 준비 과정에서부터 그가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서 누군가 비슷한 모험을 하고 싶다면 꼭 알아야 하는 정보들이 속속 들어있을 뿐 아니라, 그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의 느낌이 글 읽는 이에게도 한 가닥 한 가닥씩 전해져 온다. 쿰부 히말라야 지역 사람들을 보는 그의 시선은 따뜻하고, 그곳에서 펼쳐지는 자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겸허하다.
중간중간 딸 아이와의 기 싸움(물론 제3자가 보기에 아빠의 일방적 패배고, 기 싸움이라기보다는 한결같이 무시당하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다)을 훔쳐볼 수 있는데, 그 장면마다 아빠의 말 못할 안스러움이 느껴지면서도 웃음이 스며 나오는 걸 어쩔 수 없다.
책으로부터 그가 여행에서 느끼고 경험한 일들 뿐 아니라 그가 살아온 지난 30년이 묻어나온다. 그는 힘겹게 걸음을 옮기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여행기인데도 읽으면서 자꾸 저자 생각이 난다. 마치 나도 함께 그를 지켜보면서 또 그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어주면서 그의 트래킹을 함께 한 느낌이 든다. 그의 이야기는 수다스럽지 않고, 과장 없이 차분하다. 그런데도 조심스럽게 전해지는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어느덧 지나치게 감정이입이 되었는지 몰라도 칼라파타르 정상을 보고 내려오기 시작하면서 그가 울음을 터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져 왔다.
나이가 들고 세상살이에 적응하다 보니 스스로가 얼마나 변했는지조차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도 어쩌다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면 예전 그 자리를 든든히 지키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된다. 서형원은 그런 친구다. 어쩌면 그가 다녀온 네팔은 그를 닮았다.
최정규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