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인터뷰 ㅣ 지영선 회원]
초록 빛깔 지영선,“점점 더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지영선 회원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상수동에 있는 한 ‘화실’이었다. 짙은 회색의 벽 한쪽으로 화사한 햇볕이 창문을 통해 비추고, 그 앞에는 나무 이젤에 얹힌 커다란 캔버스가 뒤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일자로 늘어서 있는 붓과 반원 모양으로 가지런히 놓인 아크릴 물감을 직접 눈으로 본 건 처음이다. 묘한 설렘으로 캔버스 앞면을 들여다봤다. 무성한 초록색 나뭇잎 사이로 눈부신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살아있다고 움틀 대며 캔버스를 가득 채운 초록빛, 지영선 회원이 그린 그림은 그를 닮았다.글_유민지 부장, 사진_이병국 회원, 동행_김언경 사무처장
만남 장소가 ‘화실’이었지만, 지영선 회원이 그림을 그릴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화실 옆에 작은 사무 공간을 쓰고 계신가라고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뷰를 준비하며 찾은 그의 이력은 서울대 독문과 졸업, 한겨레신문 전 논설위원, 전 보스턴 총영사, 환경운동연합 전 공동대표, 생명의 숲 현 대표…. 전공도, 행보도 미술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5년 전부터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어렸을 때 공부시간에 노트에 그림을 그리다 선생님께 야단을 맞곤 했는데, 60이 넘어 뒤늦게 그림과 다시 만나게 된 거죠.”
나의 편협한 생각을 마주한 순간이다. 부끄러웠다. 환갑이 넘은 분들에 대해 내 머릿속에는 그들의 삶을 ‘완료형’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다. 이미 많은 경험을 했고, 그것으로 나름의 토대를 닦아놓고 계시는 분들. 새로운 도전과 낯선 활동에 발을 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편견이 내 머릿속에 박제처럼 굳어져 있던 것이다. 그의 삶은 도전으로 채워져 있고, 그 도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데 말이다.
나 자신이 기특하게도 참 좋은 선택을 했구나!
대학 졸업 후 기자가 되고 싶었다는 말로 말문을 연 그에게 우리는 왜 기자가 되려고 했냐고 물었다.
“일단 남녀 차별이 없는 직업을 택하고 싶었어요. 물론 언론사도 유리천장이 있고 문제점이 있었지만, 그 당시 다른 회사들과 다르게 기자는 형식적으로는 남녀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범생이로 자랐지만, 당시도 이미 군부독재가 시작됐던 때라,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 같아요.”
그는 1972년 중앙일보에 입사했다.
“신문사라면 동아일보를 가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때가 동아일보 사태가 나기 직전이라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동아일보에서 기자를 뽑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중앙일보에 갔죠.”
이후 한국일보를 거쳐 동아일보로 이직했다. 이직할 당시 동아일보는 양심적 언론인을 탄압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사태로 대규모 해직이 벌어진 이후였다.
“동아일보가 기자들을 대거 해고한 이후에 사람을 채워야 하니까 제안이 왔던 것 같아요. 제가 당초 가고 싶었던 동아일보였기에 일단 옮겼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이미 너무 많은 멍이 들었더라고요. 사내 모두가 무기력했죠. 80년대가 되니까 사회는 변혁을 위한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었는데, 동아일보에서는 무력감이 컸고, 나 자신도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요.”
87년, 한겨레신문이 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새 신문을 준비하는 사람들로부터, 어째서였는지, 창간에 참여하지 않겠냐는 제안이 왔다. 당시 그는 동아일보 차장이었으며, 소위 ‘찍힐’일도 거의 없었고, 나름 인정도 받던 안정적인 기자였다. 그런 그가 당시에는 발간 자체가 될지도 불투명한 신문사로 옮긴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임금은 동아일보의 1/3이었고, 그때는 과연 신문이 나올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죠. 그런데도 마음이 확 끌리더라고요. 최일남 선생과 의논했던 기억이 나요. 문제는 임금인데, 월급 적어지는 걸 감내할 수 있다면 좋은 기회가 아니겠냐고 하시더라고요. 이런 기회가 나에게 왔다는 것에 감사해 하며 한겨레신문에 합류했죠.”
한겨레신문은 사회변혁과 언론개혁이라는 국민의 요구로 만들어진 신문사다. 사회문제에 대한 고민이 없이는 합류하기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평탄한 길만 걸었던 그가 한겨레에 끌리고 가슴이 뛰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생적 의식화라고나 할까요(웃음). 기자생활을 하고 쭉 오면서, 천천히 사회문제에 눈을 뜨게 된 거 같아요. 점진적으로 관심을 갖게 됐어요. 스며들듯이….”
그는 한겨레에서 ‘생활환경부장’을 맡았다. ‘환경’이라는 것을 주요 의제로 삼아 담당 부서를 만든 것은 한겨레신문이 처음이다. 무력감이 느껴지던 동아일보와 달리 한겨레신문은 생동감이 넘쳤냐는 질문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사회의 변화와 함께 간다는 것, 그 한 모퉁이에서 뭔가 필요한 일을 한다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어요. 내게 맡겨진 역할을 충분히 했는지는 의문이지만….”
‘팔딱팔딱’ 뛰었냐는 물음에는 “허덕허덕”이라고 답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의식화라는 게 사회문제를 진보적으로 바라보느냐 뿐 아니라, 스스로 나 자신을 해방시켰다는 의미도 있다고 생각해요. 한겨레 와서 그런 의식화가 가능했던 같고, 나 자신이 기특하게도 참 좋은 선택을 했구나 싶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보스턴 총영사
2004년, ‘허덕허덕’하며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던 한겨레에서 정규직을 끝냈다. 재정적 위기가 주기적으로 찾아온 한겨레에서 당시 논설위원이던 그를 포함한 선배 그룹들이 대거 사표를 냈다. 그리고 1년을 비상근 논설위원으로 일하던 중 ‘특임공관장’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특임공관장이란 직업 외교관이 아닌 사람을 대사나 총영사로 발탁하는 제도다.
“한 선배가 영어도 되고 하니까 특임공관장을 한번 도전해보라고 권유하는 거예요. 그 말은 듣고, 처음엔 내가 별안간 대사로 가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조금 생각해보니, 사표도 쓴 마당에 안될 게 뭐 있나 싶더라고요. 주변에서 용기도 북돋워 주셨고요.”
영어공부를 다시 했다. 중년이 지난 나이에 새로운 일을 위해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60세 정년이 넘어 다시는 기회가 없었다.
“내가 언론인으로서 인생 1막을 끝내고 딴짓을 한 번 해본 거죠. 은퇴 후 2막이 시작되기 전 막간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보스턴 총영사가 됐다. 평생을 그쪽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공관장’으로 간다는 부담이 컸다.
“마음에 걸리는 만큼 열심히 했어요. 그러니까 좋은 반응이 오더라고요. ‘열심히 하는 건’ 신문사에서 이미 훈련이 된 사람이잖아요. 또 신문기자라는 직업이 보통사람의 시각에서 보고 평가하는 것이다 보니, 이 전력이 외교관들과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법, 대화하는 법,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 등 조금씩 차이가 있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생각 외로 동료들과 현지 동포들이 이런 제 특징을 좋아해 주셨어요.”
그때 『요코이야기』 사건이 터졌다. 『요코이야기』는 일본인의 자전적 소설로 2차대전 직후 우리나라에서 쫓겨가던 일본인의 고생스런 경험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역사적 맥락은 생략된 채, 미국 학생들의 독서 교재로 활용돼, 마치 일본인이 피해자이고 한국인들이 가해자인양 역사왜곡이 있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보스턴 교민이 영사관에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더라고요. 어떻게든 해볼 수 없냐고…. 그 교민의 문제 제기를 지원하고, 미국의 전체 총영사들이 모여서 대응 회의도 했죠.”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캘리포니아 주 등 미국 곳곳에서 『요코이야기』 교재를 퇴출시켰다. 그는 『링컨 타운카를 타고 보스턴을 달린다』는 책으로 보스턴 총영사 활동을 정리했다.
인생 2막, 환경운동과 함께 시작되다
2009년 환경운동연합에서 그에게 대표를 맡아주길 제안했다. 그가 한겨레 생활환경부장으로 있으면서 환경단체와 꾸준히 인연을 맺었으며,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져왔기 때문이었으리라. 때는 4대강 문제로 반대운동이 한창인 때였으며, 이명박 정부가 그 선봉에 선 환경운동연합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던 때이기도 했다. 사실 가장 바쁘게 활동할 수밖에 없는 시기였다.
“거기 가서 무슨 대접받으려고 가는 게 아니니, 어려운 때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필요하다고 하니까, 나라는 이미지의 사람이 필요하다 하니까 가는 거죠.”
그는 4대강에 맞서 환경단체가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면서, 정작 힘든 것은 따로 있다며 언론행태를 지적했다.
“그때 환경연합 활동가가 이포보에 올라가서 농성을 했어요. 아마 고공농성의 시초였을 거예요. 그 땡볕에 ‘강물을 흐르게 하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얼마나 드라마틱합니까? 그런데 신문사들이 기사를 안 쓰더라고요.”
그러나 언론의 외면과 정부의 핍박을 겪으며 환경운동단체의 목소리를 시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언론에서는 취급도 안 하고 정부는 막무가내죠. 민심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하지 않아요. 그러나 확실히 저변이 넓어지고 있어요.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가 터진 후에는 반핵운동이 또다시 주요한 의제로 떠올랐죠. 고리 1호기 재수명연장을 그런 힘으로 막아낸 거죠.”
한겨레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처럼, 탈핵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해 ‘탈핵 특별위원회’를 만들어서 활동하기도 했다.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그만둔 후에도 지난 총선 때, 환경연합 총선 특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아 낙천 대상자 명단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관위가 시민단체를 고발하고 경찰이 압수수색을 벌이는 등 시민사회의 낙선운동을 옥죄고 있다.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일이 다 우리 시민들의 일인데, 개입이라뇨. 이건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이에요. 몰상식한 짓이죠. 무식하고 탐욕스러운 기득권의 자기 지키기예요.”
“그 사람들, 정말 머리 좋은 거 맞아요?”
그는 1999년 민언련 회원이 되었다. 인터뷰 요청 전화를 드리니, “제가 회비는 잘 내고 있나요?”라며 껄껄 웃으신다. 하지만 그는 돈만 내는 회원은 결코 아니다. 언론인이며, 시민사회 활동가로서 그는 한국 언론의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안타까워한다. 마침 최근 KBS 뉴스에서 나오는 남북관계 관련 리포트를 언급하며 답답함을 드러냈다.
“뉴스거리도 아닌 것들이 뉴스를 나와 북을 희화화하고 조롱하죠. 이건 정부의 ‘대북제제’ 정책과 딱 들어맞아요. 정보부의 소스로 만들어진 ‘합동 제작’, ‘맞춤 제작’이 아닌가 싶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 40년 전, 언론 상황이 떠올라요. 정보부 직원이 신문사 편집국에 버젓이 드나들던 시절이었죠.”
지금 언론도 그때 수준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문제의식 없이 뉴스를 듣고 있다면서, 이런 언론의 행태가 꼼꼼한 모니터를 통해 드러내야 한다며 민언련 활동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기성 언론인, 지식인에 대한 호소도 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위험수위를 넘어서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속된 말로 머리 좋은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커다란 문제를 전혀 보지 못하거나, 보려고 하지 않는 걸 참 많이봐요. 정말 머리 좋은 게 맞는 건가요? 그건 지식인이라고, 엘리트라고 말할 수 없죠.”
민언련의 청년들, 특히 언론인 지망생들이 제대로 보도를 할 수 없는 번듯한 언론사를 갈 것인가를 두고 고민하고 있다면서 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은가 여쭤봤다.
“인생을 살다 보면 처음 시작할 때는 5도 정도의 약간의 차이가 나는 길이지만, 그 길을 가다 보면 엄청나게 큰 차이로 결과가 나옵니다. 본인이 처한 처지에서 여러 가지 고려를 해서 진로를 결정해야겠죠. 하지만 출세를 원한다면, 기자보다 차라리 기업가나 정치인이 되라고 말하고 싶어요. 보다 나은 사회를 원해서 기자가 되고자 한다면,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고 조금 더 신중하게, 더 치열하게 고민하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작은 일이라도 세세하게…그렇게 유치하게 살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김언경 사무처장은 2009년 ‘성미산 지키기 비상대책위’활동을 하던 시절 인연을 말했다. 당시 성미산 지키기 활동을 하던 김언경 처장은 작은 동네 산 지키기 이슈라 다들 관심 가져주지 않자 자신이 가진 거의 모든 이메일로 호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메일을 보신 임재경 선생(한겨레 전 부사장)이 지영선 선생님을 소개하여 주셨고, 연락을 하자 한 걸음에 달려오셨다고 한다. 다른 분들은 대부분 산 아래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가시지만, 지영선 회원은 이미 굴착기로 산허리가 깎여나가고 베어지고 쓰러진 나무들로 미로가 되어버린 성미산을 함께 올랐다고 한다. 그 중턱에 마련된 농성장에서 산을 지키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정황을 상세하게 설명 듣고, <내일신문>에 칼럼도 써주셨다. 김언경 처장은 당시 지영선 회원의 모습에 놀랐다며 거듭 감사를 전했다. 그러자 그가 답한다.
“현실과 현장이 아름답고, 그게 가장 실질적인 것 같아요. 신문사에서는 막 쫓기니까 기사를 쓰고 나서도 항상 불만이었는데, 여유가 생기니까 세세한 것까지 열심히 하게 돼요. 어려서는 점잖게 살았는데, 나이 들어서는 아주 유치하게 살고 있어요. 그러면서 내가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어요. 사회의 고정관념이랄까, 점잖은 사람은 어떻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에서 더 자유로워지고 있어요. 점점 철없어지고 있지요.(웃음)”
죽음을 잘 준비하고 싶다
언론인, 총영사, NGO 활동을 한 지영선. 그림을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소박하게 꾸려내는 재미를 느끼는 지영선. 그에게 이제 또 어떤 계획이 있는지 물었다. 지난 2014년 가을, 그는 만 16년 동안 모셨던 홀아버지를 보내드렸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나니, 인생의 마무리라는 것이 굉장히 큰 프로젝트라고 느껴졌다. 앞으로는 스스로 느끼는 인생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노후의 삶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겠다며 또 다시 새로운 인생의 길에 발걸음을 내딛는 그다.
인터뷰 내내 그의 인생을 들으며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길, 가고 싶은 길이면 거침없이 선택했던 그의 삶, 낯선 길도 흔쾌히 걸으며 살아있음을 매 순간 만끽했던, 아니 아직 멈추지 않은 그의 삶은 ‘워너비’다. 그가 걸어왔던 그 길처럼, 그가 그린 초록빛을 가득 담은 그림처럼 그가 앞으로 걸어갈 길도 ‘팔딱팔딱’ 생명이 움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