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더럽게 안 통하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일 별로 없다. 그나마 말이 통하는 경우는 보통 다음과 같다. 어떤 주제에 대해 서로 접한 정보의 양과 질, 그리고 이해도가 비슷하고 끊임없이 대화를 나눠 왔을 때는 합의를 끌어내기가 쉽다. 그런데 바빠 죽겠는데, 그런 경우가 어디 흔한가. 대게는 전문성 등 권위 있는 사람의 의견을 따르거나, 무식하지만 목소리 큰 사람에게 피곤해서 져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면 상사나 선배가 말하는 경우. 사실 상사 말은 ‘까라니까 까는 것’ 이상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보면 소통 방식이나 대화법을 고치면 말이 잘 통할 것 같기도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래서 보통 ‘나는 저러지 말아야지’ 곱씹고, 나이 들면 입은 다물고 지갑만 열어야지 다짐하고 만다.
꼭 소통 방식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할까. 소통 방식을 넘어서 아예 생각하는 방식, 즉 사고 체계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책으로 많이 알려진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주장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담은 그의 책 <이기는 프레임>이 올해 초 번역되어 나왔다. 레이코프 교수는 그동안 미국 민주당과 진보 진영이 시민(유권자)에게 말하는 방식이 성에 차지 않았나 보다. 책은 보수주의자들이 짜놓은 프레임에 말린 대표적인 사례로 ‘오바바케어’를 꼽는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9년 취임 직후부터 건강보험 개혁을 의욕적으로 추진한다. 모든 시민이 공적 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오바마와 민주당은 ‘정부는 모든 국민을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가 아닌, 의료보험을 평면 텔레비전과 같은 상품에 비유한 공화당 대선 예비후보 루돌프 줄리아니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국민 건강을 보호한다는 개념 대신 ‘의료보험은 상품의 하나’라는 시장경제 프레임을 부여한 것이다.
일단 의료보험을 국민 건강의 문제가 아니라 시장경제 영역인 상품과 동일하다는 의제 설정에 성공한 공화당은 ‘오바마케어’라는 단어와 함께 ‘(개인의 자유에 대한) 정부의 침탈’, ‘사망선고위원회’와 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반복했다. 그 결과 국민건강이 아닌 ‘오바마’가 쟁점이 되었고, 2010년에 이르러 오바마케어는 ‘더러운 단어’가 되었다. 이 대목에서 ‘종합부동산세=세금폭탄’이라고 주장했던 10년 전 한나라당이 생각난다. 그리고 공화당 후보들은 선거에서 승리해 하원을 장악했고, 이 법안을 폐지하겠다고 약속하는 데까지 이른다.
우리는 조선일보 생각대로 말하고 있다
우리도 다르지 않다. 정부의 사드 배치 결정 이후 너무나 당연하게도 경북 성주 주민들이 반발했다. ‘성주에 살지 않는 다른 많은 시민’도 반대하고 있다. 그런데 조·중·동은 사드 배치 문제를 성주라는 지역 문제로 축소·고립시키려 한다. 그래서 성주에서 27년째 살아온 여성농민을 두고 통합진보당 국회의원 경력이 있다는 이유를 들며 ‘외부세력’ 운운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또한, 김항곤 성주군수의 입을 빌려 “성주 문제는 우리끼리 해결하겠다. ‘시위를 위한 시위’를 하는 외부인이나 단체의 힘을 빌리고 싶지 않다”는 발언을 강조해 보도하는 행태로 나타났다. (자세한 내용은 민언련 신문모니터보고서 참조 https://goo.gl/NW13dN)
사드 배치가 성주만의 문제인가?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시민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정부 정책에 의견을 밝히는 것은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그런데, 보수세력은 성주 주민이 아니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외부세력’, ‘전문 시위꾼’과 같은 딱지를 붙인다.
그런데 이런 외부세력 운운하는 말장난은 뜻밖에 위력을 발휘한다. 얼마 전 이화여대 학생들과 졸업생들은 ‘미래라이프대학’ 설립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백번 응원한다. 그러나 이번 시위를 보며 놀랐던 점도 있다. 바로 A4 한장에 쓰인 문구였다. “우리는 정치색을 띤 어떠한 외부세력과도 무관합니다. 오로지 이화인의 목소리입니다”. 이화여대 학생들이 외부세력과 관련 없다는 순수함을 강조할 정도로 ‘외부세력’이라는 말은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연대를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문제로 스스로를 고립시키기. 조선일보가 얼마나 바랐던 모습일까.
이화여대생들이 시위 중 학내 곳곳에 붙인 ‘정치색을 띤 외부 세력과 무관하다’는 안내문
김제동처럼 말하자
한편 지난 8월 5일 개그맨 김제동은 성주군청을 찾아 성주주민들의 사드 배치 반대 투쟁을 응원했다. 김제동은 이 자리에서 ‘헌법에 따라 대한민국 모든 국민은 (대한민국 정부의) 모든 결정에 의견을 가질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사드 배치는 대한민국의 일이기 때문에 대한민국 주민등록을 가진 모든 시민은 사드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대한민국에 주민등록이 있지 않은 사드야말로 진짜 외부세력’이라고 지적했다. 만약 김제동이 내 고향이 성주와 가깝다는 등 개인적인 인연을 강조하며 ‘외부세력이 아니’라고 했다면 설득력이 있었을까.
우리 이제 김제동처럼 말하자. 조선일보가 유포하는 프레임에 빠져 허우적대며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으로 말하자. 모든 사람이 더불어 행복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란다면, 우리 생각을, 우리의 말로 시민들과 소통하며 설득하는 방법을 고민하자. ‘그게 아니고’는 이제 그만하고. ‘이기는 프레임’으로 다르게 말하기. 이 책이 강조하는 내용이다.
박제선 (민언련 홍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