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클로저, 2004년 마이크 니콜스 감독> 최고의 장면은 댄(주드 로)이 연인 앨리스(나탈리 포트먼)에게 안나(줄리아 로버츠)와의 비밀관계를 털어놓는 순간이다.
댄 난 사랑에 빠졌어
앨리스 숙명처럼 말하네?
앨리스 사랑은 순간의 선택이야. 거부할 수도 있는 거라고. 자기한테도 분명 선택의 순간이 있었어.
사랑은 찰나에 시작한다. 어떤 사랑은 간절하고 애틋하다. 또 어떤 사랑은 외롭고 쓸쓸하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갈까. 바람직한 사랑의 모습은 어떤 걸까. 진정한 사랑의 영속성은 얼마일까. 세 편의 영화 주인공 애나(탕웨이), 아휘(양조위), 보영(장국영), 메이(양귀매)는 현재 사랑하지 않거나 사랑이 없거나 사랑이 모호하다. 이번 호에서는 사랑이 이들에게 남긴 기다란 여운을 <만추>, <해피투게더>, <애정만세> 3편을 통해 따라간다.
속을 알 수 없는 애나의 얼굴, 슬픈 듯 애틋하다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영화다. 살인죄로 7년째 수감 생활하는 애나(탕웨이)는 어머니의 부고를 받는다. 특별 휴가 3일, 3일이 지나면 반드시 감옥으로 돌아와야 한다. 애나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시애틀 행 버스에 오른다. 막 출발하는 버스에 훈(현빈)이 타고, 애나에게 차비를 빌린다. 대신 손목시계를 건넨다. 안개가 자욱한 시애틀에서 두 사람은 72시간을 보낸다. 낯선 공간, 낯선 만남, 낯선 감정. 카메라는 시종일관 표정 없는 애나의 얼굴을 좇는다. 영화 후반부 감옥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두 사람이 함께 있다. 짙은 안개 때문에 정차한 사이 애나는 잠이 든다. 눈을 뜬 애나는 문득 손목시계를 바라본다.
3일 동안 잊고 지낸 훈의 시계. ‘훈은 어디에 있을까?’ 이리저리 훈을 찾던 애나의 시선이 멈춘다. 이미 안개는 걷혔다. 살인사건 피의자로 지목된 훈은 경찰에 연행됐다. 2년 후, 출소한 애나는 약속 장소에서 훈을 기다린다. 잠시 후 애나는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안녕! 오랜만이네.”
그녀는 훈을 보고 말한 걸까? 훈이 약속을 못 지킨 게 분명하지만, 찰나에 시작한 사랑이 ‘어쩌면’ 긴 시간 동안 이어질 거란 기대가 애나의 눈빛에 차오른다. 김태용 감독 <만추>는 1966년 이만희 감독 원작 이후 세 번째(1975년 김기영 감독 <육체의 약속>, 1981년 김수용 감독 <만추>) 리메이크 작품이다. 문정숙(혜림), 김지미(숙영), 김혜자(혜림)를 이은 탕웨이(애나)의 섬세한 표정과 고독한 목소리가 쓸쓸한 멜로를 완성했다. OST 중 탕웨이가 부른 <The theme song of Late Autumn>, 작곡가 조성우 기타 연주곡 <동행>을 들으면 안개 자욱한 시애틀과 속을 알 수 없는 애나의 얼굴이 떠오른다. 슬픈 듯 애틋하다.
눈빛에 슬픔이 젖어있던 보영, 장국영이 그립다
다른 제목은 <춘광사설>, <부에노스아이레스>. 춘광사설(春光乍洩)은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 햇살’이라는 의미. 제목으로는 가장 어울린다. 순간 반짝이는 봄 햇살은 허공에 흩어져 아스라이 사라진다.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의 관계는 불안하고 한곳에 머물지 않는다. 함께 있어도 슬플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아휘로부터 멀어져 세상과 인간을 떠도는 보영은 아휘를 찾아올 때마다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한다. 또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아휘는 거부하지 못한다.
보영을 향한 아휘의 사랑은 극진하지만 보영은 이를 구속이라 여긴다. 아휘에게 사랑은 힘겨운 굴레였다. 굴레를 벗은 아휘, 더 이상 보영이 돌아올 안식처는 남지 않았다. 보영이 뒤늦게 후회해도 바뀌는 건 없다. 아휘의 진심을 깨달을수록 애달프다. 보영을 떠난 아휘는 홀가분할까.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있는 세상 끝의 등대로 가는 장(장첸)이 아휘에게 녹음기를 건넨다. “네 목소리를 여기 녹음해. 너의 슬픔을 땅끝에 묻어줄게.” 아휘는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그리움을 담는다.
너무 달랐던 아휘와 보영의 이별은 예정된 결말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고독한 존재’란 건 무척 닮았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면 우리가 함께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보영이 아휘를 위로하던 유일한 한마디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아휘가 떠난 후 담배를 한 가득 사와 쌓아놓고는 아휘가 쓰던 담요를 부여안은 채 흐느끼던 보영이 애달프다. 여리여리한 눈빛에 슬픔이 젖어있던 보영, 장국영이 그립다.
외로우면서도 외롭다 말할 수 없는 미어짐
고독의 끝에 마주친 고독의 시작. 영화는 제목과 달리 외롭고 쓸쓸한 세 사람의 이야기다. 이들에게 사랑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일지 모른다. 부동산 중개업자 메이(양귀매), 납골당 외판원 시아오강(이강생), 노점에서 불법으로 옷을 파는 아정(진소영)은 우연히 아파트 빈집을 드나들며 스친다. 메이와 아정은 정사를 나누고, 시아오강과 아정은 빈집을 공유하며 친구가 된다.
운명은 이들을 도시의 부유물로 창조했던가. 타이베이를 떠도는 세 사람의 만남은 관계와 소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아정과 메이가 정사를 나누던 밤,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뱉지 않았다. 메이가 떠나자 시아오강이 잠든 아정에게 다가와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선다. 메이는 아파트를 벗어나 아무도 없는 공원을 걷다가 울음을 쏟는다. 오열에 가까운 메이의 울음은 자체로 비극이다.
6분 동안 이어지는 롱테이크는 아시아 영화에서 가장 쓸쓸한 엔딩이다. 그토록 외로우면서도 ‘외롭다’고 말할 수 없는 메이. 이 도시의 수많은 사람들 중 어떤 이와도 마음을 터놓지 못한 채 여전히 혼자란 현실이 처절하다. 아정과 살을 부딪치면서도 희열 없이 건조하던 메이의 얼굴이 중첩하며, 멀어지는 울음소리에 가슴이 미어진다.
<하류>, <구멍>, <흔들리는 구름> 등 차이밍량 감독 영화에서 대사는 드물다. <애정만세> 역시 주인공의 침묵과 현장 소음이 OST를 대신한다.
글 김현식 회원 bibis@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