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호] [책이야기] 참여로 정치의 룰을 바꾸자
등록 2016.11.1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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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라는 경험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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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정치학 수업 때의 일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의가 이뤄지던 어느 날, 교수님께서 제자의 경험이라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이 제자의 초등학교 시절은 조금 특별했다. 그의 담임선생님은 학급의 크고 작은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아이들의 참여를 무엇보다 중시했다. 자리를 배치하는 일부터 우유 급식에 초코 우유가 나오는 빈도를 결정하는 일까지. 말하자면 교실 공동체의 거의 모든 일들을 꼬마 구성원들이 직접 결정한 셈이다. 까마득할 법도 한 기억을 성인이 된 후에도 끄집어내는 걸 보니, 그 시절이 제자에게 적잖은 영향을 준 모양이다. 

 

과연 그는 그때의 경험에 대해 이렇게 회상하곤 했단다. 그건 공동체의 일에 참여한 최초의 경험이었고 그 덕에 유난히 사회 문제에 관심을 쏟는 사람으로 성장했다고. 이렇듯 참여의 경험은 중요하다. 차곡차곡 쌓인 이런 기억들은 공동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다. 반대로 참여의 기억이 없는 사람들에겐 공동체의 문제가 익숙지 않은 게 어찌 보면 당연하다. 참여가 참여를 낳는 셈이다. 

 

낯선 이의, 사실 따지고 보면 별거 없는 경험을 전해 듣는 동안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괜히 들춰보았다. 키 순서대로 앉으라고 해서 앉았고, 매일같이 흰 우유가 나와 코코아 가루를 타 먹곤 했던 그 시절을 말이다. 짐작건대 내 경우가 좀 더 일반적인 유년시절일 것이다. 중학생 때나 고등학생 때로, 혹은 교실을 벗어난 이후의 사회로 기억의 무대를 옮겨 봐도 다른 건 없다. ‘별거 없는’ 일에 대해서조차 우리에겐 우리의 뜻을 말하고 결정에 참여할 기회가 쉽게 오지 않는다. 

 

‘별거 있는’ 일은 오죽할까. 유년시절부터 우리를 옭아매온 이 배제의 굴레의 정점엔 섬처럼 유리된 국회와 걸핏하면 행진을 가로막는 청와대가 있다. 거리낌 없이 ‘정알못(정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정치혐오가 만개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남의 일이 된 정치에 관심과 애정을 가질 만한 유인이 없었을 뿐이다.

 

소중한 참여의 경험이 이토록 희박한 시대다. 많은 게 잘못된 거 같은데, 그래서 뭔가 바꿔보고 싶은데, 정치의 주인이라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몇 년에 한번 투표소를 찾는 일 정도다. 답이 없어 보인다. 무력감에 빠지기도 쉽다. <듣도 보도 못한 정치>는 그래서 반갑다. 이 책은 ‘정치의 룰을 바꾸자’고 말한다. 시민들의 참여가 보장되는 정치 시스템을 만들자는 얘기다. 불가능한 말이 아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룰 자체를 바꾸려는 정치 실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참여형 시스템을 도입한 유럽의 신생 정당들부터 광범위한 시민참여를 가능하게 해주는 온라인 플랫폼까지. 책이 소개하는 유쾌한 정치 실험은 때론 상상력을 자극하고 때론 희망을 준다. 

 

정치라는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는 실험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바르셀로나 시장을 배출한 신생 정당 바르셀로나 엔 코무의 정치실험이다. 이 정당의 목표 역시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으로 집권당을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실제 바르셀로나 엔 코무는 당내 모든 제안과 결정을 시민참여에 기반해 진행하는 걸 원칙으로 한다. 선거자금부터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모았다. 말 그대로 ‘풀뿌리 정당’이다. 시민참여를 촉진시키는 온라인 플랫폼의 등장은 풀뿌리 정치의 가능성을 더 높여준다. 이 플랫폼들은 시민들이 각자 의견을 개진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토론을 하는 데 매우 유용한 온라인 광장이다. 바르셀로나 엔 코무 역시 ‘데모크라시OS’라는 플랫폼을 실제 정치에 활용한다. 

 

낙관적이기만 한 건 아니다. 한국에서도 집권여당이 직접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온라인 정당 실험을 진행한 바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소식인 만큼 결과적으론 실패한 실험이다. 시민들의 관심을 끄는 데 실패해서다. 의지가 부족했던 건지 홍보가 부족했던 건지 원인은 잘 모른다. 정치 실험이 온라인을 그 기반으로 삼는 만큼 그에 따르는 한계도 존재한다. 온라인은 진공상태가 아니다. 현실 세계의 각종 자본이나 권력 관계가 온라인에도 반영되기 마련이다. ‘완전히 수평적인 참여’라는 건 불가능한 이상에 가깝다. 이는 정치 자본이나 경제 자본, 문화 자본을 갖춘 온라인 스타들과 평범한 시민들의 SNS 파급력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소개된 크리스티나 플레셔 포미나야 교수의 강연 역시 이런 우려와 맥락을 같이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접하게 될 정치 실험들은 냉소와 무력감에 빠진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 ‘뭔가 다른 정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실제로 존재하고,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하니 더 반갑다. 대의민주주의가 대체 불가능한 시스템처럼 공고하게 느껴지고, 그래서 차악이라도 뽑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로 여겨지는 이 시대에 필요한 유쾌한 상상이다.

 

정치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참여는 결국 권력의 문제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모든 장면에는 권력의 메커니즘이 관통하고 있고, 그 정점에는 정치가 있다. 정치를 바꾸기 위해 필요한 건 ‘참여’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주인의 권리를 행사하는 새로운 정치를 상상하고 함께 얘기하는 것이다. 너무나 생소한 이 참여를 익숙하고 당연한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치가 바뀌면 사회가 바뀐다. 정치와 접점을 발견하지 못해 무력감에 빠진 시민들이 진정한 주인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면 일상에서도 참여의 문화가 꽃필 수 있다. 건강한 민주주의의 룰이 교실과 사회와 정치를 관통하게 될 날을 상상해보자.

 

송혜미 회원 shyemi0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