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책이야기] 무엇이 ‘박유하 현상’을 낳았는가
등록 2016.10.04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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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박유하 현상’을 낳았는가

 

김경실 이사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는 《제국의 위안부》를 비롯해 박유하의 저작들에 나타난 문제점들을 실증 자료들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파헤치며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한일회담이나 경제협력, 국민기금 등 그간의 한일관계를 어느 정도는 꿰고 있어야 이 책의 논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쉽게 쓰인 듯하지만 만만치 않은 내용이다.

 

 

‘군’이 아니라 ‘업자’ 책임이라는 논리, 그리고 동지적 관계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박유하가 일관되게 그리고 집요하게 되풀이하는 핵심적 주장은 “위안부 연행에 책임이 있는 주체는 ‘업자’이지 ‘군’이 아니며, 따라서 군(으로 대표되는 일본)의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강제연행’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직접적인 연행’으로 좁혀 해석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문서자료가 없으므로 일본의 법적 책임은 없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이나, 아베 총리가 위안부에 대해 “인신매매의 희생자”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여 국가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저의와 맥이 닿아 있다. 

 

가장 문제적 표현으로 논란이 되었던 위안부와 일본군의 ‘동지적 관계’에 대하여 박유하는, 조선의 위안부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적국’의 위안부들과 달리 자신들을 일본 제국의 위안부로 인식했고 따라서 일본국과의 관계도 기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동지적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일본을 조국으로, 자신을 일본인으로 인식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경식(한겨레신문, 3월 12일자 ‘와다 하루키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의 비판이 설득력을 얻는다. 

 

“동지라는 말은 자발적으로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의 관계를 가리킨다. 식민 지배 자체가 조선 민족의 자발적 의사에 반하는 지배였다. 지배자쪽 남성인 일본군 병사와 피지배자쪽 가운데서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가부장제의 차별을 받은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가장 하층에 속한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어지간히 말을 할 줄 모르든가 식민지배라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몰이해 탓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당사자 중에는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한 경우도 있었다는 식으로 쓴다 해도 논증을 토대로 써야 하고, 설사 그런 예외적인 관계가 있다 해도 전체적인 차별구조를 부정하는 논거는 될 수 없다.” 

 

서경식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논증이 부정확하고 자의적이며, 논리 진행이 일관성이 없어서 비판해봤자 생산적인 논의가 되리라 기대할 수 없다”고 했는데,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에서 정영환 역시 박유하의 저작들에 대해 똑같은 평가를 내린다. 

 

 

‘화해’라는 이름의 연성화 그리고 우경화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부정확하고 자의적이며, 논리 진행이 일관성이 없”는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가 제시하는 역사상이 좌우를 불문하고 많은 (일본) 지식인의 심금을 울린 것, 그중에서도 특히 리버럴을 자임하는 사람들의 평가가 높다”는 점이다. 와다 하루키나 우에노 치즈코 같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진보적인 학자들에게조차도 말이다. 

 

‘박유하 현상’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이런 기류에 대해 박노자는 《누구를 위한 ‘화해’인가》에 붙인 해제에서 “시류에 편승하면서 주류에의 합류를 갈망하는 좌파 자유주의 진영 출신들은 전후 일본의 민주와 평화를 강조하며… 점진적 연성 전향을 추구하는 그들에게 박유하의 화해 담론은 체면을 잃지 않으려는 전향 지망자들에게 각종 알리바이를 매우 훌륭하게 제공해 주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서경식은 “우파와 일선을 긋는 일본 리버럴파 다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명예 감정과 엣 종주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특권 모두를 놓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진단한다. 

 

길고 지난한 싸움을 지속해 온 지식인 사회가 이제는 성과를 보고 싶은 고단한 심경에, ‘화해’라는 달콤한 이름으로 점점 연성화되고 차츰 우경화로 기울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다음과 같은 서경식의 일침은 여전히 유용하지 않은가.

 

“박 교수를 칭찬하는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나는 묻고 싶습니다. ‘이 부정론을 당신은 지지합니까?’라고. 이 엄혹한 반동의 시대에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제대로 각성해서 누구와 연대하고 누구와 맞서 싸워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엄중하게 물어보는 일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