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호] [회원인터뷰] 실패했어도 진 적은 없다 (이진숙 회원)
등록 2016.10.04 16:13
조회 907

민언련 회원들의 직업은 다양하다. 여러 직업군 중에서도 예술 분야는 드물다. 이번 달에 만난 이진숙 회원은 그중에서도 생소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기획·제작하는 일을 한다. 가난하지만 가난이 두렵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은 돈을 꿔서라도 해야 한다는 ‘개똥철학’으로 버텨 왔다는 이진숙 회원을 만나보자.

 

 

 

민언련 회원들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직업군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있다. 그중에서도 희귀한 직업군이 예술 분야일 텐데, 이번 달에 만난 이진숙 회원은 그중에서도 생소한 일이라 할 수 있는 영화를 기획·제작하는 일을 한다. 

 

그는 영화기획을 빙자해 자주 짐을 싸는 편이다. 최근 여권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중국 비자가 보일만큼 수도 없이 수년간 중국대륙을 누비고 다녔다. 중국 동북삼성의 옛이름 ‘만주’라는 공간에 홀려 ‘이름없는 영웅’들을 찾아 정처 없이 돌아다닌 결실이 최근에 개봉한 영화 <밀정>이란 기획이었다. 중국 대륙의 기운에 홀려 새로 만든 회사 이름도 ㈜영화사 하얼빈이다. 

 

얼마전에는 ‘인도네시아의 민족해방 영웅 양칠성’이라 알려진 인물(현재는 묘지에 묻혀 있음)을 찾아 자카르타와 반둥까지 갔었지만, 결국 그 기획을 묻어두고 돌아왔다. 국내에 알려진 기록과 매체의 과장된 내용들이 막상 현지의 후손들과 향토사학자들의 증언과 어긋난 현실과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이래서 ‘문제적 인물’이란 매력적이면서도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접근하는 다소 위험한 소재다. 이럴 때 그의 선택은 역사적 공간의 ‘기운’이다. 

신비롭게도 공간의 기운은 문헌에서는 느낄 수 없는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는 그 경계의 예민한 지점을 포착하여 대중들이 재밌어하고 공감할만한, 그리고 감동할만한 이야기와 인물과 공간을 찾기 위해 ‘이번엔 어디로 가볼까?’를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다. 

 

2015년 한창 <밀정>이 촬영 중일 때는 ‘그래서 약산은 1923년의 <밀정>과 1933년의 <암살> 이후에 과연 어디에서 무엇을 했을까?’에 대한 호기심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고민을 풀기 위해 중국 최남단 광조우의 황포군관학교에서부터 류저우, 구이린, 창사, 우한 등의 지역들을 답사했다. 물론 본인을 능가하는 또라이(?)들은 곳곳에 포진되어 있어서, ‘마오와 홍군의 중국 대장정’ 노선과 만주에서 남방까지 중국에서의 항일운동 유적지들을 수도 없이 찾아다니는 중국 오지 여행전문가와 그 여정을 함께 했다. 

 

최근에는 ‘조선은 물론 중국대륙까지 침략하려한 일본 정한론의 근원은 무엇일까?’를 궁금해하며 일본의 옛 지역 조슈번과 싸스마번의 답사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그 역사와 지역을 연구하는 분들과 동행할 계획이다. 

이렇듯, 내키는대로 짐을 쌀 수 있는 조건에 대해 그의 삶이 풍족할 것이라 추측하면 대단한 오해이다. 항상 가난해왔기 때문에 가난이 두렵지 않은 것이 그의 소신이고, 가난해도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은 돈을 꿔서라도 하자는 개똥철학으로 수십년을 버텨왔기 때문이다. 결핍이 창의력의 근원이라 하지 않았던가?

 

 

1990년, 민주언론운동에 첫발을 내딛다 

이진숙 회원은 지난 1990년 언협(민언련의 옛 이름)과 인연을 맺었다. 그 인연의 시작은 198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학력고사를 막 끝낸 고등학교 3학년 말, 제13대 대통령선거 공정선거감시단 활동에 참여했다. 실상은 동사무소 직원들이 집집마다 방문해 투표용지를 나눠줄 때, 그들을 따라다니며 제대로 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당시 서대문구의 공정선거감시단에서는 주로 대학생과 청년들이 참여했는데, 이진숙 회원이 최연소자였고, 현재까지 민언련 이사로 활동 중인 김동민 전 대표가 가장 나이가 많았다. 

 

이때의 인연으로 1990년 당시 언협 사무국장이었던 김동민 이사는 이진숙 회원에게 “언협에서 일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한다. 당시 언협은 김동민 사무국장 외에 정동익 의장님과 김택수 이사가 기획실장으로 있었다. ‘딱’ 들어맞는 진로라 생각했고, 아직 대학 졸업 전이었으므로 비상근간사로 일을 시작했다. 

 

1990년, 민언련은 해직 언론인들의 민주언론운동을 더욱 확장하기 위해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을 모색할 때였고,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언론학교를 기획했다. 언론학교는 대중적인 언론 운동을 위한 시민언론교육이라는 목적이 분명했지만, 고단한 현실이 산적해있었다. 자금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월간 <말> 사무실 한구석에 셋방살이를 하던 시절이었다. 시민들이 참여하는 시민운동을 하려면 회원들이 모일 사무실 하나 만큼은 있어야 했다. 게다가 학교를 하려면 강의실이 있어야 하는데 쪽방 사무실 밖에 없었다. 근처 교회의 예배실을 빌렸다.

 

 

1992년 언협에서 활동하던 시절의 이진숙 회원(사진 속 제일 오른쪽).

 

50여명 정도만 오면 앞으로 언협의 살림을 여차저차 꾸려갈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백여명이 넘게 몰리는 예상하지 못한 대박이 터졌다. 대학생과 일반시민은 물론 현역 기자들, 그리고 해고된 방송사 노조위원장까지 참여하는 등 당시의 언론민주화에 대한 뜨거운 관심과 열기를 실감할수 있었다. 그는 1991년 11월 6일 개강하는 날, 회원들 백여명의 이름과 신상을 정확히 기억해내는 초능력(?)을 발휘할 정도로 열정을 다해 언론학교를 준비했고, 정성을 다해 회원관리를 했다. 당시 시작한 언론학교는 2015년 88기까지 계속 되었다.

 

 

시민운동조직으로의 시스템 전환 

인터뷰에 동행한 김언경 처장과 그 남편은 2기 언론학교 출신이다. 가끔 그때의 추억을 되새길 때, 김언경의 남편이 줄곧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당시 언협 활동가들 정말 대단했다.”

 

여러 단체를 다녀 봤지만, 활동가들이 언협 만큼 회원들 개개인에게 열정적으로 대하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밤 10시가 넘어 언론학교 강의가 끝나면, ‘조별 활동’을 명분으로 삼삼오오 모여 동트는 새벽까지 토론을 했다. 물론 술이 있어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언론학교 졸업생들로 ‘신문 모니터팀’과 ‘방송 모니터팀’의 회원 후속 모임을 조직했다.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시민언론교육과 회원참여 활동의 원형이 만들어진 시기였다. 

 

언론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한 시민 회원들이 속속 모이기 시작했고, 강의실이 딸린 사무실도 구하게 되었고, 언협 회보도 만들게 되었다. 언협 회보는 당시 월간 <말> 기자였던, 오연호, 조유식, 안영배, 천호선, 최진섭, 신준영 등의 기자들이 기사 작성에 도움을 줬다. 

 

사무국, 공간, 회원, 기관지 등 차곡차곡 시스템이 갖춰졌다. 언론학교라는 교육사업과 모니터 운동을 내용으로 한 회원 모임 조직이 지난한 30년여 년이라는 시간을 꾸역꾸역 먹으며 지금까지 언론운동을 가능하게 한 밑거름 역할을 했다. 

1년 후, <시사통>의 김종배의 추천으로 각 대학 언론사 출신의 87학번 이한기, 신미희, 조진경 등이 간사로 충원되었다(이들은 이진숙 회원과 아직도 단단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다). 활동가가 늘면서 언협은 시민운동 조직으로 더욱 단단하게 다져졌다.

 

 

젊은 정치인 노무현과의 만남

꽉 채운 2년 동안 매일을 주말도 없이 회원들과 함께 하는 일상을 보내던 중 문득,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언론운동 활동가로서 본인이 가진 능력에 대한 자책을 하기 시작했다. 언론 전공자가 아니기에 겪는 한계와 열등감이 가장 큰 고민의 근원이었다. 그나마 2년을 버티게 했던 ‘관계의 친화력’ 조차 ‘타성에 젖은 일상’으로 전환되고 소모되면서 급격히 지쳐갔다. 진로를 고민하며 활동을 중단했는데, 도망치듯 간 곳이 마침 (지금 생각해보면) 더 엉뚱한 곳이었다. 

 

2기 언론학교 회장 이기명 선생이 당시 노무현 후원회장이었는데, 그동안 지쳤을 테니 머리나 식힐 겸 새로운 일을 몇 달간만 해보라고 추천한 것이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1992년, 김대중 후보 캠프에서 노무현을 단장으로 하는 ‘청년특별위원회’라는 선거유세단 별동부대를 운영하니 함께 해 보라고 권유한 것. 노무현을 비롯해 이해찬, 제정구, 박계동 등 소장파 의원들이 서울의 중심부와 수도권 지역을 다니는 게릴라식 선거 유세를 펼쳤다. 민심을 사로잡는 젊은 정치인들의 선동과도 같은 유세에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나자, 한달만에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청년특별위원회는 노무현이 위원장, 김민석이 부위원장을 맡았고 그 외 이광재, 안희정, 김만수, 문용욱 등이 있었다. 

 

 

 

 

 

 

이진숙 회원이 젊은 정치인 노무현과 함께 한 사진. 이 빛 바랜 사진을 이진숙 회원은 가장 아낀다.

 

이 조직에서 그녀가 맡은 역할은 수백명의 자원봉사단을 이끌고 이들의 숙식을 책임지는 조직의 총무였다. 몇 달간 수백 명이 전국을 함께 다니며 정권교체를 열망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졌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부둥켜안고 울었다. 

 

슬픔도 잠시, 이광재가 노무현의 당내 최고위원 선거까지 함께 하자고 제안했다. 마땅한 대안도 없을 때였고, 노무현은 물론 막역해진 그들 참모진이 좋아서 또 함께 했다. 1년 넘게 노무현이란 분을 가까이 모시면서, ‘저분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란 생각을 했더란다. 그런데 십년 후 정말로 그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십여년의 세월이 지나 어찌어찌 영화계로 옮겨와서 영화 <여섯개의 시선> 마지막 촬영 날이 제16대 대통령 선거일이었다. 그가 대통령이 되던 날, 촬영 스탭들과 밤새워 울면서 기뻐했다. 그간 잊고 있었던 십여년 전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뜨거웠던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참여정부 시절에는 뉴스도 잘 보지 않았다. 언론에서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향해 쏟아내는 비난과 조롱을 참아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몇 년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좋아했던 정치인을 영영 보냈다. 영화 촬영 중에 비보를 들었다. 영화는 계속 촬영되었지만, 숙소에서 나가지 않은 채 내리 사흘을 통곡했다. 그는 전직 대통령이라기보다는 ‘따뜻하고 강한 청년 노무현’으로 뚜렷이 기억되고 있다. 

 

 

서른이 넘어도 끝나지 않은 진로 고민 

진로에 대해 여전히 실마리가 풀리지 않던 시절인 1994년 즈음, 그는 막가는 심정으로 비디오대여점을 차렸다. ‘영화마을’이라는 비디오 대여점 프랜차이즈였다. 십년 이상 비디오대여점을 하던 아저씨들이 만든 회사였고, 기획업무를 맡아 본사로 출근하면서 두 가지 일을 병행했다.

 

당시 비디오산업은 삼성, 대우, SK 등의 대기업이 TV, VTR 등 전자제품 생산에 주력할 때였다. ‘영화마을’은 예술영화를 비롯한 좋은 영화를 보급한다는 컨셉으로 비디오 산업계에 변화를 도모했고 IMF의 영향으로 1999년에는 가맹점 수가 전국 750개까지 이르렀다. 대량해고라는 파고에 휩쓸린 명예 퇴직자들이 대여점 사업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설립 5년 만에 비디오산업의 중심에 서게 되었으나, 인터넷 환경으로 인한 매체의 전환이 예견되면서 다음 단계를 모색해야 했다. 이미 비디오 대여 사업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어, 이를 대비해야 했다. 그 일환으로 영화마을 가맹점주들을 주주로 참여시켜 영화사를 차렸다. 

 

 

첫 영화 제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비디오용을 목적으로 처음 제작한 영화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다. 류승완 감독의 독특한 칠전팔기 이력과 함께 16mm로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란 독특한 형식이 영화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00년 7월, 코아아트홀에서 단관 상영으로 개봉을 했는데, 이 작은 독립영화는 소위 대박이 터졌다. 조조부터 마지막 상영까지 한달여간 매진이 되는 기염을 토하자, 일본의 ‘이마지카’라는 현상소로 보내 35mm로 블로우업을 해서 전국으로 확대개봉을 했다. 관객이 10만 명이 넘게 들었다. 독립영화가 상업영화에 견줄 수 있을 만한 흥행을 한 셈이다. 

 

이어 국가인권위원회가 이진숙 회원에게 ‘인권영화 프로젝트’의 총괄 프로듀서를 제안했다. <여섯개의 시선>을 비롯, <다섯개의 시선>, <시선 1318> 등 세 편을 프로듀싱했다. 그러면서 ‘엔젤 언더그라운드’라는 영화사를 만들어 상업영화도 제작했다. 처음 제작한 영화가 잘 되자, ‘영화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점점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들어갔다. 

 

2005년,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제작했다. 신생 영화사와 신인감독의 조합으로 영화계에 큰 주목을 받았으나, 흥행에 실패했다. 실패로 인해 오기가 생기기보다 점점 위축되기 시작했다. 재기를 꿈꿨으나, 이어 기획·제작한 영화 <요가학원>이 흥행참패는 몰론 그해 평단과 네티즌의 욕을 다 들어먹으면서 그는 바닥으로 패대기쳐졌다. 

 

진한 실패를 경험하면서 그는 ‘나는 영화에 재능이 없구나’라고 생각했단다. 그 때, 이미 생물학적 나이는 마흔이 되어가고 있었다. 영화를 실패했고, 인생도 실패했다고 자책했다. 그는 ‘다시는 뒤돌아 보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10년 넘게 모아둔 DVD와 책들을 버렸다. 정말 몇 년간 한 편의 영화도 보지 않았다. 

 

 

실패를 딛고 다시 영화로 <밀정>

영화를 접고 하릴없이 일상이 평온하게 흘러가는 중이었지만, 가끔씩 ‘욱’ 하고 치미는 분노가 가슴 한 켠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 정체는 ‘난 실패자’라는 자괴감이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무작정 중국으로 갔다. ‘접경지역의 관광과 분단’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찍으려 중국 단둥으로 향한 것이다. 그곳에서 공간의 아우라에서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단둥이란 도시는 한족들 외에 조선족, 북한 화교, 북한 사람, 그리고 한국인 등 한국말을 하는 네 부류가 공존하는 곳이다. 중국과 북한의 접경도시라는 공간의 특수성 때문에 중국의 공안, 북한의 보위부, 한국의 국정원 등 정보원들이 도시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진숙 회원이 기획한 영화 <밀정>은 개봉 20일 만에 관 객이 700만 명이 들면서 

여전히 이 사회 악의축으로 존재 하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이 수상한 긴장감과 두려운 기운은 불과 몇 년간에 만들어진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미 백여 년 전 일제강점기 시기에도 서로가 믿지 못하는 불신의 긴장감이 태동되었으리라는 상상력이 발휘되며 그림이 그려졌다고 한다. 영화 <밀정>의 모티브는 여기에서 나왔다. 의열단의 항일 투쟁 중 1923년의 ‘황옥 경부 폭탄 사건’을 소재로 하여 상해에서 만든 폭탄을 천진, 단동, 그리고 압록강철교를 건너 신의주를 거쳐 경성역에 이르는 ‘기차 느와르’이다.

 

2015년 1월, 이 프로젝트는 워너 브라더스의 투자가 하루만에 확정되고, <놈놈놈>의 김지운 감독이 가세하면서 2년이 채 안되는 기간 내에 숨가쁘게 달려 지난 9월 7일 개봉했다. 그동안 상업 영화계에서 그닥 환영받지 못했던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데다 대중들에게 다소 생소한 의열단의 행적을 소재로 한 영화가 개봉 20일만에 7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기록하면서 아직도 이 사회의 악의 축으로 존재하고 있는 ‘친일파 청산’이라는 화두를 던지고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 안정된 시스템으로 영화를 한다는 것도 겉으로 보이는 만큼 화려하고 행복한 일만은 아니라고 한다. 성공보다는 실패의 확률이 더 많은 일임은 물론이고, 영화화될 때까지 그 고난의 세월들을 감내해야 하는데다, 누구의 말대로 정치판 이상의 배신과 야합이 득세하는 곳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진숙 회원은 본인의 길이 힘들어 지칠 때 마다, 또한 강하게 버텨내는 김언경 처장을 볼 때마다, 가끔은 ‘내가 민언련, 저 자리를 계속 지켰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고 한다. 그 생각의 결과가 궁금해진다. 만약, 이진숙 회원이 20여 년 넘게 그 자리를 계속 지켰다면, 과연 어떤 활동가였을까 상상하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박제선 홍보부장 영상 안효광 활동가 동행 김언경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