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호] [책이야기] 더 이상 절망에 익숙해지지 말자
등록 2017.01.10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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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가 터진 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자아라고 부를만한 게 형성되지 않았던 때인 만큼 내겐 그때의 기억이 없다. IMF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 이전의 기억이 없는 건 당연하다. 나는 외환위기가 할퀴고 간 상처가 뚜렷하게 각인된 땅에서 자란 세대다.

 

내가 우리 사회에 대해 갖는 인상도 상당 부분 이런 세대적 경험에서 비롯한다. 불황이니 가계부채니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다. 이 땅에 고도성장이나 3저(低)호황 따위가 있었다는 게 하나의 신화처럼 느껴진다. 안방을 훈훈하게 데운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마을 공동체의 모습도 생경하기만 하다.

 

고백하건대 이사를 온 지 1년이 다되어가는 지금까지 나는 옆집 이웃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꿈이나 기회라는 단어는 신기루 같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선 민생은 늘 퍽퍽했고 앞으로 나아질 거라고 기대할 만한 단서를 찾기도 어려웠으니까. 이건 아마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청년들이 공유하는 사회상일 것이다.

 

 

‘중산층이 꿈’인 청년세대

 

주변 친구들만 해도 그렇다. 한 후배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취업이 잘 되는 과’로 전과를 하기 위해 학점에 목을 맸다. 갓 스무 살이 된 아이가 먹고 사는 게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어대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공연기획자가 되고 싶다며 눈을 빛내던 친구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그 어떤 안전망도 제공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한 발짝만 헛디뎌도 끝없이 추락하게 될 게 무섭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꿈을 포기했다는 사실보다 그녀가 보인 덤덤함이 더 슬펐다. 안정적인 삶의 값이 너무나 비쌌기에 꿈이라는 기회비용은 더 이상 아까운 게 아니었다. ‘중산층이 꿈’이라는 건 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 오가는 진지한 농담이었고, 우리는 서로가 발을 헛디디지만 않길 바란다. 혹자는 “현재의 청년 세대는 대한민국이 세워진 이래 처음으로 자신들의 부모 세대보다 못사는 세대가 될 것”이라고 진단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부모 세대가 엄청난 영광과 과실을 누리며 사는 것도 아니다. 내 부모님은 밤낮 없는 노력에도 한번 기울기 시작한 가세를 다시 일으키지 못하셨다. 비정규직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이 처한 현실은 잊을 만하면 신문에서 또 방송에서 그 민낯을 드러낸다. 빈곤을 체화한 노인들은 차가운 거리의 풍경과 하나가 되어 굳이 의식하려 들지 않으면 존재감을 알아차리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곳에 깊게 배어 있는 불안과 절망은 호황이나 기회를 경험해봤는가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우리 모두가 추락하는 민생과 극대화되는 격차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다. 더 나아질 거란 희망은 빼앗긴 지 오래다. 우리 앞에 놓인 생의 얼굴이 이렇게나 푸석하다.

 

 

이런데도 ‘최악이 아니라’는 서늘함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은 이 땅의 민생에 대해 말한다. 다섯 명의 인터뷰이가 각자의 언어로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한다. 종횡무진 오가는 대화의 폭은 꽤 방대해서 민생이라는 키워드로 얽힐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다. 신자유주의라는 1997년의 상처가 사회를 어떻게 파괴시켰고 또 파괴시키고 있는지를 소상히 짚어주는가 하면, 친기업적 경제정책이 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는지에 대해 얘기하기도 한다. 민생이란 화두를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그치는 정치권의 추악함을 비판하기도 한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삶의 퍽퍽함에 대해 진단하고 있는 이 책은 여러 의미에서 냉정하고 신랄하다. 더 나아질 거야, 더 좋아질 거야. 우리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이런 달콤한 메시지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어떻게 할 것인가’보다, ‘무엇이 문제이며 왜 이지경이 됐는가’에 더 집중하다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손아람 작가가 ‘우리의 상상력은 아직 최악에 미치지 못했다’며 이곳은 ‘아직’ 지옥이 아니라고 말하는 대목은 서늘하기까지 하다.

 

이런 신랄함에 사로잡혀 책장을 넘기다보니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이 있다. 생의 고단함에 익숙해진 스스로가 얼마나 냉담한 시선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다. 피선거권이 주어진 후부터 지금까지 얼마 되지 않았던 선거 때마다 진보정당에 투표했다. ‘묻지마 투표’는 아니었다. 정당이나 후보에 대해서 꼼꼼하게 살펴보는 편이었고 진심으로 변화를 바랐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내가 하는 투표는 고작 국회 과반 의석을 누가 차지하게 될 것인지나 청와대 주인이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정도였던 것 같다.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정치가 나의 삶, 나의 생활과 접점을 갖길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결국 나는 정치가 민생을 개선해줄 거라고 진지하게 믿어본 적이 없는 셈이다. 정치적 무관심과 냉소를 경계해야 한다며 설파하고 다녔는데, 정작 스스로가 이렇게나 냉소적이었다. “보수적이 된다는 건 무관심해진다는 뜻”이라며 “판단을 중지하고 싶은 유혹이 가장 위협적”이라고 경고하는 책의 구절이 유난히 아프게 다가온 건 이런 자각 때문이었다.

 

 

‘박근혜 이후’ 과제는 우리의 몫

 

희망이 없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 필요한 건 희망이다. 없는 걸 갈구하자니 뜬구름 잡는 소리 같은 게 당연하다. 내가 깨달은 스스로의 냉소 역시 이런 맥락에서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에겐 아직 희망을 가질 여지가 있다. 최근 우리는 긍지와 희망을 안겨 주는 작은 승리를 목격하고 있으니까. 몇 주에 걸쳐 식지 않고 광장을 밝히고 있는 촛불, 이 촛불의 승리 말이다. 아직 넘어야 할 관문은 많다. 긴 싸움 끝에 대통령이 탄핵된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론 촛불로 표출된 열망들을 전부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다. 

 

결국 ‘박근혜 이후’로 남겨진 과제는 여전히 우리의 몫이다. 우리의 삶과 생활이 더 나아질 거라는 진실한 믿음을 주는 정치를 위해, 그래서 우리가 상실하고 있는 존엄함을 회복시켜 줄 사회를 위해 더 나아가야 한다. 추락하는 민생에 더 익숙해져선 안 될 일이다.

 

이 글을 쓰는 와중에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언니에게서 “네게 조카가 생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문득 조카가 태어나고 자랄 때 쯤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습관처럼 암담한 인상이 떠올랐지만 재빨리 지워냈다. 더 좋아질 것이다. 느리더라도 세상은 변할 것이다. 아직 세상에 나지 않은 조카를 위해 희망을 되뇌었다. 조카가,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내일은 오늘보다 낫다’는 걸 경험할 수 있길 바란다.

 

 

<입에 풀칠도 못하게 하는 이들에게 고함>의 서평입니다. 

송혜미 회원 shyemi09@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