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호] [책이야기]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
등록 2017.05.22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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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타개한, 백악관 기자실의 전설 헬렌은 동료 기자들에게 경고했다.

 

“우리(기자들)는 이 사회에서 대통령에게 정기적으로 질문을 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왕이 될 수 있다.”

 

혁신가의질문.jpg <혁신가의 질문>(박영준) 프롤로그 맨 앞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문단의 소제목은 이렇다.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 오바마가 한국 기자들에게 질문 기회를 주었을 때, 누구 하나 손들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질문하지 않는 기자를 둔 국민은 대통령을 왕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 대통령은 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 ‘왕’은 촛불 든 시민의 힘으로 왕좌에서 쫓겨나 차디찬 감방에 머무르고 있다. 촛불의 힘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브라이언 그레이저의 말에서 실마리를 찾는다. 


“호기심은 주제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복적이고, 혁명적이다.” <큐리어스 마인드> 31쪽 

 

촛불을 들고 우리는 질문했다. 세월호는 왜 바다에 빠질 수밖에 없었나? 구조에 실패한 까닭은 무엇인가? 최순실은 박근혜와 어떤 관계인가? 정유라가 수업에 참여하지 않고도 학점을 받을 수 있었던 메커니즘은 무엇이었나? 등. 브라이언은 이런 질문을 추동하는 힘이 호기심이라고 말한다.

 

“하늘이 왜 파란지 거리낌 없이 질문할 수 있는 아이는 자라서 좀 더 과격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어른이 된다. 어째서 나는 종이고, 당신은 왕인가? 태양이 정말 지구 둘레를 돌까? 왜 피부가 검은 사람은 노예가 되고, 흰 사람은 주인이 되는가? 호기심이란 얼마나 위협적인가?” 같은 책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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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면전에서 질문 건네는 사람은 기자다. 기자가 질문을 건네도록 하는 힘은 국민 하나하나가 질문을 품는 것에서 나온다. 왕이 되었다가 종국엔 감방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대통령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대통령을 왕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질문이다. 호기심이다. 대통령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호기심과 질문은 혁명과 전복이면서 또한 배려와 사랑이기도 하겠다.

지난 5월 18일, 촛불의 힘으로 탄생한 대통령이 행한 연설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다. 그때 경험을 나는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연설을 본 당일 개인 페이스북에 올린 내용이다. 

 

“5·18 대통령 추도사를 보며 가슴과 눈에서 빗물이 멈추지 않는다. 광주는 살아 있다 외치며 몸을 던져 먼저 간 벗들과 운동 과정에서 얻은 병마로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했거나 여전히 그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들이 떠올랐다. 오늘 대통령 연설은 그이들에 대한 헌사였다. 해원의 몸짓이었다.
오늘 이 연설 들으려 이렇게 살아 있나 보다. 살아 있다는 사실이 눈부시다. 먼저 간 이들도 함께 축하하리라 믿는다. 먼저 간 후배와 함께 이 장면을 볼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집에 가면 쓴 쇠주 한 잔 올려야겠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훌쩍거리며 글을 쓴다.”

 

이날의 감동이 그저 감동으로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살아 있는 변화로 이어지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5·18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5·18을 헌법 전문에 넣는다는 게 왜 그리 중요한가요. 전국의 5·18을 기억하자고 했는데, 그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나요. 등등. 감동이 현실이 되기 위해 필요한 건 질문이고 그 질문을 추동하는 힘은 바로 호기심이다. 


브라이언 그레이저는 자신의 책에서 호기심의 개인적인 측면에 많은 걸 할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가 놓치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공적인 호기심’이다. 여기서 그는 칼 세이건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한다.

 

“회의적인 질문을 던질 수 없다면, 권력자를 의심할 수 없다면, 곁에서 느릿느릿 걷는 사기꾼 -정치 또는 종교-에게 붙잡힐 수밖에 없다.”

 

새로운 대통령에게서 받은 감동이 그 아무리 크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회의적인 질문을 계속 건네야 한다. 질문을 건네는 일은 그를 사랑하기에 하는 행위이다. 우리 공동체가 광주에서 흘린 눈물을 삶으로 이어가기 위한 일이다. 브라이언은 이렇게 말한다.

 

“요즘처럼 복잡한 사회에서 우리는 그 책임을 외부에 떠넘기는 일이 잦아졌다. 먼저 언론이 질문하게 한다.(그러고는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또는 너무 공격적이었다고 언론을 비난한다.) 의회가 질문하게 한다.(그러고는 너무 소극적이었다고, 또는 너무 공격적이었다고 의회를 비난한다.) 활동가들이 질문하게 한다.(그러고는 너무 편파적이라고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책임의 소재는 시민이다.” 위 책 234쪽

 

그의 말대로, 우리는 지금 시민의 책임을 언론, 의회 그리고 활동가에게 떠넘기고 있는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할 때다. 대한민국의 시민은 위대하고 현명했다. 지난겨울 들었던 촛불로 우리는 무혈혁명을 이루어냈고 새로운 정부를 만들어 냈다. 시민의 힘이다. 깨어있는 시민이 이룩한 고귀한 성과다. 이때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다 이루었다고 자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이른바 맹목적 지지자를 칭하는 각종 ‘빠’들이 위험한 까닭은 이런 호기심과 질문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열린 질문과 대화를 거부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할 때, 사회는 다시 암흑으로 빠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촛불로 이룩한 위대한 시민혁명을 지속해 나가는 일이고 광주에서 흘린 감동의 눈물을 우리 삶으로 체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의 실천이고, 그 출발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거침없이 질문을 건네는 일이다. 이 시점에서 브라이언의 책이 반가운 까닭이다.

 

신호승 동그라미대화센터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