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이 촛불을 들고 만들어낸 새로운 시대에, 당신은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세월호 기간제 교사의 순직이 인정되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 한숨 돌려도 된다고 느낀다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여기 한숨 돌리키는 커녕 숨을 헐떡이며 아직도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아직도 헌법을 농단한 구 세력의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 <공범자들>은 아직도 싸우는 사람 중 하나인, 공영방송 KBS·MBC의 언론 노동자들을 조명했다.
<공범자들>은 MBC 해직 PD이자 영화 <자백>의 감독, 최승호 피디의 연출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다. 그는 이미 <자백>으로 언론탄압 잔혹사의 ‘스페셜리스트’(?)로 평가 받았다. 그는 공영방송의 붕괴와 언론자유 탄압의 피해 당사자이지만, 그의 영화는 담담하다. 어쩌면 ‘이명박근혜’ 정권의 공영방송 잔혹사가 그 자체로 영화에 가깝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범자들>은 10년간 공영방송의 붕괴를 시계열적으로 나열한다. 특별할 것 없는 구성이지만 처절한 그 역사에는 여러 편의 드라마와 코미디가 곳곳에 숨어 있다.
<공범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일련의 ‘KBS·MBC 탄압사’를, ‘공범자들’이라는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어낸다. 수없이 이어져 온 낙하산 사장, 폐지되는 시사프로그램들, 파업, 해직, 투쟁, 세월호, 촛불혁명, 가짜뉴스, 그리고 기레기. 지난 10년간 세상이 잊었던 비극의 파편들은 놀랍게도 ‘망가진 언론’이라는 하나의 매듭으로 이어진다.
‘그들’에 의해 점령당한 공영방송과, 그에 대한 언론 노동자들의 반격. 그리고 언론 노동자들이 내부 투쟁과 무관하게 짊어져야 했던 ‘기레기’라는 오명. 120분간 펼쳐지는 복잡한 파노라마에서 결국 이 비극적인 역사의 주인공이 ‘그들’, ‘공범자들’임이 밝혀진다. 역사의 주인공은 민중이라지만 지난 10년간 엄혹한 권력을 휘두른 공영방송의 지배자들은 결국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클리셰’를 증명하고 말았다. <공범자들>은 이제 주인공이 바뀌어야 함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맞섰고 지금도 억척스레 싸우는 언론인 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창하게 설명했지만 이 영화는 커다란 역사의 흐름을 조명하는 거대 서사가 아니다. 공범자 개개인과 그들에 맞서 싸운 개개인 모두가 주연이다. 해직, 감봉, 부당전보는 묘한 드라마가 된다.
으레 언론인이라는 직업은 ‘사명’이라는 단어와 함께한다. 진실까지는 아니더라도 정확한 사실을 전달해야 하며 권력과 자본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저널리스트는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공범자들>은 그런 이미지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환상에 걸맞은 사람들은 이 영화의 엔딩 크래딧에서 등장하는 개개인의 이름에서나 확인할 수 있다. 영화가 막바지에 이를수록 투쟁의 드라마를 보여준 ‘진짜 주연’의 이름을 확인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된다. 혹시나 엔딩 크래딧까지 다 올라가고 나면 해피엔딩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도 하게 된다. 엔딩 크래딧까지 영화를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안타깝게도 해직, 감봉, 부당전보의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당신은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실망할 수도 있다. 패배감과 우울감이 들 수도 있다. 그래도 걱정은 접어두셔도 괜찮다. 극적인 승리 혹은 반전 때문이 아니다. 조금 의외지만 이 영화는 재밌다. 지독하게 현실적인 장면들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날 수밖에 없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최승호 감독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공범자들의 술래잡기부터, 공영방송의 독립권 보장이 꿈이라면서도 징계와 해고를 남발하던 김재철 전 문화방송 사장과의 극적인 인터뷰, 최승호 감독과 반갑게 악수하며 ‘지금 뭐 하고 사냐’고 질문하는 전직 대통령의 표정까지. 특히 감독을 만난 전직 대통령의 표정은 이 영화의 정점을 이룬다. 그 장면만큼은 블랙코미디가 아니라 진짜 코미디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없다.
당신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것, 그리고 반드시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술래잡기를 하는 두 주체의 다른 눈빛이다. 영화 속엔 전혀 다른 두 눈빛이 존재한다. 권력에 기생한 도망자의 눈빛과 권력과 싸운 술래의 눈빛이다. 최승호 감독, 그리고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공영방송 노동자들의 눈빛은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현실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 <공범자들>에서 최승호 감독이 전직 대통령을 쫓아다녔다면, 현실에서는 KBS 노동자들이 고대영 현 KBS 사장을 뒤쫓고 있다. MBC 노동자들도 김장겸 사장과 고영주 방문진 이사장과 치고받는 술래잡기를 진행 중이다. <공범자들>의 눈빛이 향하는 곳은 바로 그 현실이다.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공범자들’은 멀쩡하다. 꼭 KBS·MBC의 공범자들만 그런 것은 아니지만 KBS·MBC가 한때 온 국민에게 사랑받는 방송국이었음을, 그 누구보다 약자들의 시선을 사랑하고 권력의 폐부를 거리낌 없이 파헤쳤던 언론이었음을 기억한다면, 뼈아프다. <공범자들>의 시선을 따라 그 현실로 돌아와 보자. 치열하지만 재미있고, 그래서 싸울 만한 투쟁의 드라마가 여기 있다.
글 이정진 회원·방송모니터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