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호] [특별좌담] 송건호 의장을 말한다
등록 2017.06.30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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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시민연합은 보도지침 폭로 30주년을 맞은 작년부터 ‘보도지침을 폭로한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특별 인터뷰를 해 왔다. 보도지침을 폭로했던 과정을 통해 보도지침 폭로가 우리 언론과 민주주의에 끼친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봤다. ‘보도지침을 폭로했던 사람’들이 보도지침 폭로 당시를 돌이키면서 공통으로 한 말이 있다. 바로 ‘송건호 의장이 있었기 때문에 보도지침을 폭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의장 송건호 선생을 회고하는 특별 좌담 ‘송건호 의장을 말한다’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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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은 이완기 상임대표(사진 제일 왼쪽)가 사회를 맡고, 송건호 의장과 언론자유 운동을 함께 한 김태진 언협 전 의장(동아투위 회원·사진 가운데)과 정상모 언협 3대 사무국장(80년 해직 언론인·사진 제일 오른쪽), 그리고 『송건호 평전』을 통해 송건호 의장의 삶을 정리한 바 있는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과 92년 겨울 《역사비평》에서 송건호 의장과 좌담을 진행한 인연이 있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권위자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을 모셨다. 

좌담은 지난 6월 6일 오후 3시, 공덕동 민언련 사무실에서 열렸다. 언론인, 역사학자, 지성인이라는 송건호 의장의 다양한 면모를 확인하다 보니 3시간을 훌쩍 넘겨서까지 진행했다.


<편집자 주> 중간 제목은 김삼웅 선생이 쓴 『송건호 평전』에서 많은 부분 인용했습니다.  송건호 의장의 활동사진은 청암언론문화재단에서 제공했습니다. 지면을 통해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이완기 송건호 의장을 회고하는 좌담을 마련한 배경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해 우리 국민은 국정농단을 벌인 대통령을 쫓아내고 정권을 교체했습니다. 이번 정권교체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국민은 역사의 고비마다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현대사에는 민주주의를 향한 여러 투쟁이 있었습니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 또한 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민언련은 작년 보도지침 폭로 30주년을 맞아 그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협 초대 의장이었던 송건호 선생이 여러 차례 거론되었습니다. 참 언론인으로서, 현대사를 연구한 역사가로서, 실천하는 지성인으로서 송건호 의장의 삶을 되새겨보는 것은 지금 현재 우리 언론과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가는데 도움이 클 것이라는 생각을 했고 오늘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언론인으로서 송건호 의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먼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에서 함께 일했고, 언협 활동도 같이 한 김태진 의장께서 이야기를 시작해 주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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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진 전 언협 의장

 

김태진 송건호 의장은 여러 언론사를 다녔습니다. 송 의장께서 1965년에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맡았습니다. 편집국장으로 취임하면서 ‘모든 책임은 편집국장인 내가 질 테니 정정당당히 기사를 작성하라’며 기자들을 독려했습니다.

그 무렵 마침 공보부 장관이 취임하면서 중앙 일간지 편집국장들을 오찬에 초청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데 장관 비서가 봉투를 내밀었다고 합니다. 그 자리에서 송 의장이 ‘내가 받을 이유가 없다’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기자들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는 촌지가 일상적일 때였습니다. 송 의장의 촌지 거절은 촌지 안 받기 운동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송 의장이 한겨레신문을 창간할 때 기자들에게 제일 먼저 제안한 내용도 촌지 받지 않기 운동일 정도였습니다.


촌지는 일제 강점기 때 조선총독부에서 기자들에게 주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된 촌지 문화가 현재까지 언론계의 못된 관행이 되고 있습니다. 촌지 이야기를 더 하면 박정희 정권 시절, 1971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해 전 70년 8월엔가 정부에서 중앙일간지 정치부장 15명을 모아 동남아 여행을 보냅니다. 여행을 보내면서도 촌지가 상당히 많았나 봅니다. 정치부장들이 귀국길에 녹용을 사 왔는데, 들여온 녹용이 너무 많아 세관에서 적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관세청장이 해고를 당합니다. 그리고 녹용을 많이 들고 온 정 모 정치부장은 이후에 국회의장 비서실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촌지를 스스럼없이 받았던 정치부장들이 제대로 된 언론활동을 했겠습니까. 이런 사례와 비교해 보면 송 의장이 얼마나 결백한 분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송건호 의장의 청렴함은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일하던 1965년, 경향신문 공매 처분 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경향신문 공매 처분 사건은 박정희 정권이 반독재 노선을 유지했던 경향신문을 압박하기 위해 사장 이준구를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한 후, 이듬해인 1966년 1월, 은행 부채 4천 6백만 원을 갚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향신문을 공매처분한 언론 탄압 사건이다.


“사장 이준구가 감옥에 있는 상황이라 이러한 무거운 짐이 편집국장이었던 송건호의 두 어깨에 지워져 있었다. (중략) 송건호는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에게 붙들려가서 대통령과 적당히 타협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러나 그는 타협에 응하지 않았다. (중략) 이렇게 싸우면서도 송건호는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협을 하느니 지는 쪽을 선택한 그는 마지막으로 경향신문의 값을 올려 받기 위해 노력했다. (중략) 결국 2억 원에 넘어갈 뻔했던 경향신문은 송건호 덕분에 3억 원에 매각되었다. (중략) 경향신문이 매각된 후 사장 이준구는 송건호에게 4천만원을 주었다. 2천만 원은 기자들에게 나눠주고 2천만 원은 송건호 개인에게 준 것이었다. (중략) 송건호는 당시 편집부국장이었던 김경래를 불러 보스턴백 두 개를 내놓았다. 보스턴백을 연 김경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백마다 돈이 가득 들어 있었다. 이준구에게서 받은 2천만 원이었다. 김경래가 놀랄 만도 했다. 1974년 무렵 동아일보 일반기자 월급이 6, 7만원, 편집국장 월급이 20만 원이었다. 2천만 원이라면 편집국장 월급을 10년 가까이 고스란이 모아야 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던 것이다. 김경래는 다시 각 국장과 부장을 편집국 숙직실로 불러 모았다. 당시 편집국 직원은 2, 30명. 위로의 돈 잔치가 열린 셈이다. 직원 전원이 두 달치 월급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송건호에게 신세를 갚고 싶었던 이준구는 나중에 이 사실(편집자 주: 기자들에게 준 2천만 원에 더해 송 의장에게 사례한 2천만원까지 4천만 원 모두를 기자들에게 나눈 일)을 알고 무척 섭섭해했다는 후문이다.”
정지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깊다 –참언론인 송건호의 생각과 실천』, 한길사, 2008년, 120~124쪽

 

 

“내 손으로  기자들을 자를 수는 없다”

 

이완기 송 의장께서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 기자들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지지하고 격려했습니다. 이후에 벌어진 대량 해직 등 언론 탄압에도 저항했고요.

 

김태진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말하기 전에 몇 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71년 4월 27일 대통령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해 3월 26일 서울대 학생 20여 명 정도가 동아일보 앞에서 시위를 벌였습니다. 기자들 듣기에 모욕적인 말도 많았습니다. 기자들은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4월 15일 ‘양심에 따른 진실 보도’, ‘부당한 압력 배격’, ‘정보요원 출입 거부’ 등의 결의를 담아 언론자유수호선언을 발표합니다.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선언은 다른 언론사에도 확대됩니다. 당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박정희 대통령을 위협할 정도로 표를 얻었는데, 기자들의 자유언론수호선언의 영향이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당시 기자들의 언론수호선언에 간부 중에 딱 2명만 참석해 기자들을 격려했습니다. 당시 논설위원이던 송건호 의장과 김중배 사회부장입니다. 해가 지나서 72년 모든 자유를 빼앗은 박정희 유신 시절이 시작됩니다. 74년 봄에 송 의장이 편집국장으로 취임합니다. 그해 9월 장관·국회의원·재벌 부인 등을 중심으로 한 귀금속 밀수 사건이 터집니다. 정부는 사건을 일체 보도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완기 그때도 보도지침이 있었나 봅니다.

 

김태진 말 그대로 보도지침이죠. ‘보도하지 말라’는 엄명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송 의장이 ‘이것조차 보도하지 않는다면 언론이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며 사회면에 4단 크기로 보도(동아일보 1974년 9월 12일 자 3면)합니다. 동아일보만 보도했습니다. 그리고 송 국장은 중앙정보부에 연행됩니다. 처음에는 ‘선생님’, ‘국장님’ 부르다가 나중에는 ‘이 새끼야’ 하면서 뺨까지 맞았다고 합니다. 당시 동아일보가 서울 시내 신문구독자의 64%라는 조사 결과도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신문사였습니다. 그런 신문의 편집국장을 연행해 일개 중정 직원이 편집국장 뺨을 때리는 시절이었습니다. 송 국장은 한 번 수모를 당하면 위축될 법도 한데, 그 후에도 기가 죽지 않고 여러 차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습니다.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10월 23일 서울 농대 학생들이 수원 시내까지 진출해서 시위를 벌입니다. 시위 며칠 전 정부에서 ‘학생 데모 일체 보도하지 말라’, ‘베트남 동향 보도하지 말라’, ‘연탄 파동도 일체 보도하지 말라’는 보도지침을 내려보냈습니다. 


그런데도 1단 크기지만 이를 보도했습니다. 그래서 송건호 편집국장과 지방부장, 사회부장이 연행되었습니다. 기자들은 연행에 항의해 퇴근하지 않고 편집국에서 철야농성을 벌였습니다. 새벽 1시 정도에 송건호 편집국장이 회사로 복귀했습니다. 그때는 통행금지 때문에 집에 돌아갈 수가 없죠. 농성을 지속하면서 다음 날(24일) 동아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합니다. 그동안 준비하고 있던 것을 그날 밤샘 농성을 하며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구체화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김삼웅 귀금속 밀수 사건은 저도 송건호 선생 평전을 쓰면서 정리했습니다. 대학생들이 귀금속 밀수 사건을 제대로 보도하지 못하는 언론을 비판하며 ‘언론인들이여 손가락을 자르라’는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유인물 내용에 ‘정치 기사는 청와대 눈치 보고 못 쓰고, 사회 기사는 부장 눈치 보고 못 쓰고, 경제 기사는 광고주 눈치 보고 못 쓴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자유언론실천선언 발표의 계기가 된 1974년 10월 23일 서울농대 김상진 군의 자결 사건도 보도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송 국장이 ‘1단 기사로라도 실어라’라고 해서 보도가 됩니다. 기사는 긴급조치를 거부하는 1단 기사의 시초였습니다.

 

송건호 의장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도화선이 된 10월 23일 연행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74년 10월 23일 수원농대에서 학생데모가 있었다. 정보기관원이 와서 그 기사를 내지 말라는 압력을 가했다. 나는 그의 압력을 거부하고 그 기사를 보도했다. 그리 크게 다룬 기사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이 문제가 되어 나는 점심식사 후 기관원에 연행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집으로 가서 속옷을 두툼하게 입고 나왔다. 반드시 연행되어 갈 것이라는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하오 3시쯤 낯선 3인의 기관원이 나를 차에 태우고 나갔다. 5·16 후 벌써 몇 번째의 연행인가. 돈복은 없으면서도 관재구설수만은 그치지 않아 걸핏하면 연행되곤 했다. 언제 끌려가도 기분 나쁜 그 ‘연행’을 또 당한 것이다. 한번 가면 일찍 돌아와야 15시간은 조사받는다.”
송건호, <고행 12년, 이런 일 저런 일>, 『한국현대언론사』, 194~195쪽 

 

이완기 기자들이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하고 제한적이나마 동아일보 지면을 개선해 나갑니다. 그러던 중 백지 광고 사태가 터지고 시민들은 격려광고로 기자들을 응원했습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결국 정부에 굴복했습니다. 다음 해(75년) 기자들이 대거 쫓겨나고, 송 의장은 편집국장을 그만둡니다. 

 

김태진 그랬죠.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기자들 쫓겨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74년 12월부터 광고주들이 ‘이유는 묻지 말라’며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갑니다. 다음 해 5월까지 광고가 빈 백지로 신문을 발행했습니다. 이 대표가 말한 동아일보 ‘백지 광고’ 사태입니다. 그런데 독자들이 비어있는 지면에 격려광고를 내면서 기자들을 응원했습니다. 영국 가디언지는 격려 광고를 두고 ‘수많은 한국인이 신문을 펼쳐 들고 첫 번째로 읽는 정치적 개인 칼럼’이라고 보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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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75년 1월 1일 8면. 상단에 광고 ‘연기’를 안내하고  있다. 대신 백지 지면에는 시민들의 격려 광고가 실렸다.

 

그때 홍승면 동아일보 논설주간이 1월 10일 일본 NHK 기자와 인터뷰를 했습니다. NHK 기자가 ‘광고 사태’의 배후를 질문합니다. 홍 국장은 ‘심증과 우리 기자들이 취재한 결과로 볼 때 판단은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정부, 형제들을 외국 언론을 통해 고발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도 자랑거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그러자 기자가 ‘권력과 타협 없이는 이 사태를 타개하기 어렵다고 보는데 대책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홍 주간은 ‘별로 이렇다 할 자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판매를 확장하는 데 노력하고 있다. 사실 동아일보는 지금 상당히 부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추세대로라면 가까운 기간 안에 1백만 부 돌파는 무난하리라고 본다. 1백만 부만 돌파하면 광고 수입 없이도 현상유지는 가능하다. 만약 권력의 방해로 1백만 부 돌파 목표가 이루어질 수 없다면 신문 발행인 협회를 탈퇴하고 신문 구독료를 인상하는 방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구독료를 인상한다고 해서 독자가 줄어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발행인협회를 탈퇴함으로써 신문용지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생길 경우 신문 면수를 줄이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동아일보 편집방침은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인데 이것은 동아일보 창간 이래의 사시(社是)이고 기본적인 편집방침이며 이 편집방침을 지키기 위해 경영이 있는 것이지 경영을 지키기 위해 편집방침이 흔들릴 수는 없다. 우리는 절대로 무릎을 꿇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면서 홍 주간은 ‘격려 광고라는 명목으로 들어오는 돈 대부분을 살림살이가 별로 윤택하지 않은 국민들이 보내주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모를 지경이다. 국민 앞에 삼가 고개를 숙인다. 정말로 우리 국민은 위대한 국민이다. 이 국민을 위하여 신문을 만들고 이 국민을 위하여 신문의 정도를 걷고자 하는 우리는 어쩌면 남들이 보는 바와는 달리 행복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답합니다. 홍승면 논설주간의 인터뷰 내용은 NHK만 보도한 것이 아니라 세계 많은 언론들이 인용 보도를 했습니다. 

 

김삼웅 백지 광고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사주가 권력에 굴복했습니다. 송 선생께서 동아일보 사주와 대화를 꽤 나누었다고 합니다. 송 선생은 ‘기자들을 해고하면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송건호 국장이 사직합니다. 

 

김태진 그렇습니다. 3월 17일에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을 대량 해고하기 전인, 75년 2월 28일 동아일보 주주총회가 열립니다. 주주총회에서 권력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홍승면 논설 주간을 해고합니다. 동아일보 해직 사태의 최초 해고자는 홍승면 논설주간입니다. 홍 주간을 대신해 전 동아일보 주필로 있다가 필화 사건으로 해임되었던 이동욱을 임명했습니다. 그동안 이동욱 주필은 정부 산하 통일문제연구소 상임 간사였음을 생각할 때 이동욱 주필은 정부에서 파견한 사람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 주필이 취임한 후 사원들에게 ‘회사 내 일체의 집회 금지, 유인물 살포 금지, 이를 어길 경우 해임’이라는 폭탄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은 3월 8일 ‘경영상의 문제’라는 이유를 들어 기자 18명을 해고합니다. 그래서 기자들은 ‘우리 월급을 깎겠다, 최악의 경우 월급을 받지 않아도 되니 해고를 하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요구사항을 유인물로 만들어 배포했다는 이유로 기자협회 동아일보 분회장 장윤환 기자와 불순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박지동 기자를 해고했습니다.

 

 

곡필은 하늘이 죽이고, 직필은 사람이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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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 송건호 선생은 64년, 65년 무렵부터 ‘곡필언론’에 대해 비판했습니다. 이 책이 《사상계》 1964년 10월호입니다. 여기에 ‘곡필언론사’라는 시론을 썼습니다. 제가 청년 시절 감명 깊게 읽은 글 중 하나입니다. 제가 나중에 『한국곡필사』와 『유신시대의 곡필』을 쓸 수 있었던 건 송 선생의 ‘곡필언론사’ 덕분이었습니다.

 

당시 언론인들이 ‘정론’과 ‘직필’, ‘자유언론’을 주로 고민할 때 송 선생은 잘못된 글을 쓰는 언론인과 지식인을 질타했습니다. 언론인 송건호를 이해하기 위해 ‘곡필언론사’를 한 번은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김태진 송건호 선생이 ‘곡필은 하늘이 죽이고, 직필은 사람이 죽인다’는 말씀을 한 기억이 납니다. 

 

김삼웅 송 선생이 동아일보에 계실 때 편집국에 몇 번 가봤는데, 말씀하신 내용이 적힌 팻말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김태진 맞아요.

 

‘곡필언론사’에서 송건호 의장은 직필을 만나기 어려운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식인들은 다투어 곡필을 비웃고 그러한 지식인은 이미 지성인이 아니라고 단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직필 하기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가에 대해서는 그다지 깊은 검토가 없는 듯하다. 현실을 지배하는 것은 대부분 조소의 대상인 바로 그 ‘곡필’이며 당연한 것처럼 생각되는 ‘직필’은 놀랄 만큼 읽어보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숨길 수 없는 한국의 현실이기도 하다.”
송건호, 『송건호 전집 10 –곡필과 언론』 한길사, 2002년, 1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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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이 좌담에 가져온 《사상계》 1964년 10월호. 송건호 의장의 ‘곡필언론사’가 실려있다.

 

 

‘송 의장’, 민주언론쟁취 투쟁의 선봉에 서다

 

이완기 자유언론실천선언에서 자연스럽게 보도지침 폭로로 화제가 넘어가게 되는데요, 보도지침 폭로 당시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 선생이 구속되고 박우정 선생도 뒤늦게 구속됩니다. 그리고 사태 수습을 위해 정상모 선생이 언협 3대 사무국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보도지침을 폭로할 때 송건호 의장은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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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9월 9일 10시 송건호 의장은(앉은 사람 중에서 왼쪽 두 번째) 명동성당 소강당에서 열린 ‘보도지침 자료 공개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기자회견에서 송 의장은 성명서 ‘보도지침 자료 공개 기자회견을 하면서’를 낭독하고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제 실상을 폭로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언협 김인한·최장학 공동대표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김승훈·김택암·정호경·함세웅 신부가 함께 했다.

 

 

정상모 개인적인 인연으로 송건호 의장은 제 주례 선생님이기도 합니다(웃음). 보도지침을 폭로했던 해인 1968년 5월, 정부는 ‘5·3 인천 시위’를 용공으로 몰면서 민주화 운동 진영에 극심한 탄압을 가합니다. 민통련을 비롯한 재야단체의 활동이 거의 중단될 정도였습니다. 그러던 때에 언협이 보도지침을 폭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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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모 언협 3대 사무국장

 

신홍범, 김태홍, 김주언 세 분이 12월에 구속된 후에 언협 회원들이 구속 사태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보도지침 폭로 이후 『말』지는 발행을 중단한 상태였습니다. 자연스럽게 『말』지 발행을 논의했습니다. 엄혹한 탄압 속에서 조직의 존폐까지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나기를 우선 피하고 나중을 도모하자는 입장과 어려울수록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부딪혔습니다. 상당히 큰 논란 끝에 『말』을 다시 내기로 합니다. 『말』 복간에 결정적으로 힘을 실어주신 분이 송건호 의장입니다.

 

이완기 당시 굉장히 위급한 상황에서 언협이라는 조직 보위를 위해 『말』 복간을 연기하자는 신중론이 있었고, 이럴 때일수록 『말』을 계속 발행하면서 『말』을 통해 재판에도 대응하자는 강경론이 있었던 것이죠?

 

김태진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시 논쟁이 상당히 격렬했다고 그러더라고요.

 

정상모 그랬습니다. 송건호 의장은 성품이 온화한 분입니다. 평상시에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랬던 분이 『말』 복간을 논의할 때 처음 화내는 모습을 봤습니다. 광화문 어느 식당에서 회의했는데, 밖에서도 고함이 오갈 정도였습니다. 제 기억으로 송건호 의장이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이었습니다. 

 

당시 언협 1호 간사면서 『말』 기자였던 최민희 전 대표는 『말』 복간을 논의하던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발행인이었던 김태홍이 구속된 후 다시 발행인을 맡고 있던 송건호는 뜻밖에 단호했다. 이만한 일로 주저앉아서는 조직이 보위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반대쪽이 끝내 의견을 굽히지 않자 송건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겁이 나면 당신은 나오지 말아요!” 최민희는 깜짝 놀랐다. 송건호를 이해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중략) 송건호는 겉으로 보기에 멋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꾸미는 말이나 행동도 할 줄 몰랐다. 그런 그가 젊고 혈기왕성한 최민희 눈에 멋있게 보였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평범했던 송건호는 자신이 세운 원칙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더 용감한 사람들조차 포기한 길을 끝까지 묵묵히 걸은 언론계의 큰 별이었다.”
정지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깊다 –참언론인 송건호의 생각과 실천』, 한길사, 2008년, 344쪽


이완기 『말』은 1985년 창간호부터 ‘민주·민족·민중 언론을 향한 디딤돌’을 정체성으로 삼았습니다. 해직 기자들이 만든 단체여서인지, ‘새 언론’ 창간을 목표로 삼았다고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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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3일 송건호 의장(왼쪽 세 번째)이 보도지침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온 신홍범 언협 실행위원(왼쪽 두 번째)과 김태홍 사무국장(왼쪽 다섯 번째)을 격려하고 있다. 리영희 교수(왼쪽 네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정상모 『말』 복간 논쟁 당시 신중론을 펴는 분들은 앞으로 유화국면이 펼쳐지면 새로운 언론을 만들 수 있으니 이를 예비하자고 주장했습니다. 그 후 언협은 87년 무렵 새 언론 창간을 위한 논의기구를 구성해 실제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김태진 새로운 언론을 만들자는 이야기는 동아투위 초기부터 고민했습니다. 동아투위를 결성한 후 6개월 정도는 거의 매일 유인물을 만들어 각 대학과 단체에 배포했어요. 동아투위 결성 4주년이었던 1978년 10월 24일 10·24 4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동아투위 회원 10명이 연행되는 ‘10·24 민권일지 사건’이 터졌습니다. 그때 구속되었던 안종필 동아투위 위원장이 면회 온 가족을 통해 ‘우리도 매체가 있어야 한다’는 메모를 보내오기도 했습니다. 

 

이완기 해직 언론인들이 84년 언협을 결성하게 된 궁극적 목표는 새로운 언론매체를 만드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뒤 『말』 창간, 보도지침 폭로 등 여러 형태의 싸움을 거쳐 마침내 새로운 언론 한겨레신문을 창간했습니다. 송건호 의장은 초대 사장을 맡으셨고요. 이 지점에서 송건호 의장의 당시 언론관은 무엇이었는지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역사학자들의 직무유기가 ‘현대사 연구가’ 송건호를 낳다

 

김삼웅 송 선생은 언론인으로서 자유언론투쟁에만 시종하지 않고, 신채호와 채남선에 대한 인물론을 쓸 정도의 괄목할 만한 역사적 시야를 쌓았습니다. 송 선생의 독특한 점입니다. 
저는 20대, 30대 청년 시절 독자로서 송건호 선생을 사숙했던 사람입니다. 이 책은 1977년 9월호 《뿌리깊은나무》입니다. 여기에 ‘신채호와 최남선’이라는 글을 기고했습니다. 당시 송 선생이 역사 관련 사론(史論)을 1년 정도 연재했습니다. 우리 근대사에서 역사학자들이 제구실을 못해 언론인들이 역사학자 역할을 대신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신채호 선생, 박은식 선생이 대표적인 분이죠. 해방 후에는 송건호 선생과 천관우 선생이 그러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다음부터 오늘 나오신 서중석 선생이 역할을 하셨죠.


김태진 현대사 연구는 송건호 의장이 처음 아니었을까요? 그전에는 현대사 관련 책이 나오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서중석 현대사에 관한 논문이나 글은 적지 않지만 단독 저서는 주로 근대사 후기에 관해서 썼습니다. 송 선생은 일제 강점기 중에서도 일제 말기를 많이 다루었습니다. 이제 역사가로서 송 선생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가요?

 

이완기 자연스럽게 말씀을 나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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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서중석 제가 67년에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근대사는 학문이 아니다’, ‘공부해서는 안 된다’는 분위기였습니다. 실제 근대사를 공부한 사람들도 주로 조선 말기를 연구했습니다. 윤병석 선생 같은 분이 독립운동과 관련한 뜻깊은 연구를 한 때도 70년대 이후입니다. 그 이전에는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도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 분위기에서 현대사 연구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현대사에 관심 자체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학계의 분위기이자 시대 분위기였습니다.

 

오히려 한국 근현대사 연구는 브루스 커밍스 등 미국과 일본과 같은 외국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1975년 해방 30주년을 맞으면서 재일교포 한 분이 연구비를 후원해서 4권짜리 현대사 관련 책이 나왔어요. 그런데 송 선생은 이미 60년대부터 현대사의 중요한 과제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현대사 연구에서 선구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송 선생의 관심 분야는 언론에만 머물지 않고 사회과학, 지성의 문제, 지식인 문제까지 아주 폭넓었습니다. 특히 한국 아카데미즘의 한계도 콕 짚어서 비판했습니다. 학문은 현실과 무관할 수 없는데 아카데미즘을 내세우면서 현실을 외면했다고 지적하신 거지요. 진실한 학문이라면 ‘반항과 분노의 정신’을 가지고 현실에 접근해야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진실을 제대로 말해야 민중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줄 수 있다는 요지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민중이라는 말을 사용한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 땅의 사회과학이 주체성을 망각하고 사대주의에 사로잡혀서 우리 역사와 문화를 천시하고 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전반기까지 한국 사회과학계에서 뜻있는 분들이 많이 고민했던 주제를 60년대에 이미 고민했던 겁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학문은 현실에 뿌리를 둬야 하고, 역사를 등한시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일제 말기에 민중들이 어떻게 살았고, 친일파가 무슨 짓을 저질렀고, 항일운동이 어떤 어려움 속에서 전개되었는지와 같은 우리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사회과학을 비롯한 학문이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듯 올바른 지성의 역할을 고민하면서 현대사의 주요 쟁점을 제시했습니다.


제가 또 하나 놀란 것은 송 선생이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도 책을 좋아했다는 겁니다. 70년대 초반만 해도 헌책방에 괜찮은 책들이 있을 때입니다. 언론사를 그만둔 후에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에 걸쳐서 체계적인 역사 연구를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주로 일제시기에 관심을 기울이셨지만, 조선 말기와 일제시기의 여러 쟁점과 항일 운동까지도 많이 연구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70년대 중반까지 76년에 나온 책 4권을 제외하고 현대사에 관한 마땅한 책이 없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도 송건호 선생은 상당히 풍부한 연구를 해냈습니다. 


79년에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나옵니다. 그 책은 송건호 선생이 쓴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으로 시작합니다. 짧은 글이지만 해방 시기의 핵심적인 주제를 모두 다루었습니다. 현대사에 대한 큰 고민과 폭넓은 사유, 동서 지성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결합하면서 그러한 탁월한 통찰력이 나온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리고 일제 말에 직접 겪은 경험이 더해져서 더욱 풍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제 말부터 눈을 똑바로 뜨고 살려고 했던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김삼웅 서 교수께서 역사학자들이 현대사 연구를 외면하며 직무유기를 할 때, 송 선생이 이를 대신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런 사례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나치 독일 시절에 히틀러가 집권한 후에 현대사 연구를 했던 학자들이 고대사나 중대사 연구로 연구 분야를 갈아탔습니다. 
 

 

지식인의 반성을 촉구하다

 

이완기 송건호 의장은 사대주의를 배격하고 주체적인 역사관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송 의장의 글을 읽다가 문득 독특한 언론관을 가지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언론에서 객관성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기 어렵다고 보신 것 아닌가 하고 해석했습니다.

 

서중석 아마 이 대표께서 60년대부터 불거진 ‘순수·참여 논쟁’에 대한 글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순수문학이니 순수 아카데미즘을 주장하던 세력이 문화계와 학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저는 순수를 말하던 이들이 ‘순수’라는 말을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송 선생은 그런 주장에 대해 ‘진실을 봐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예를 들면 어디에서 주는 내용을 그대로 받아쓰는 언론과 같은 순수라면 그것이 오히려 잘 못 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였을 겁니다. 그래서 송 선생은 ‘참여’를 강조합니다. ‘참여 없는 지성은 있을 수 없다’라고도 했습니다. 

 

송건호 의장은 지성인의 역할에 고민이 많았다. 1975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민족지성의 탐구』에서 지식인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지식의 민족성·객관성·논리성·경험성을 제시하는 한편으로 지식인의 ‘역사성’과 ‘주체성’을 강조한다.
“역사의식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비판의식이며 문제를 해결하는 실천의식이다. 과거를 미래로 전환시키는 현재 의식이다. 따라서 역사적 지성이란 인간의 역사적 존재를 해명하며 그것의 발전과 변화와 그 속에 포함된 법칙성 같은 것을 밝히는 지성이다. 역사적 지성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사변적이 아니라 실천적이다. 이러한 지성은 당연히 주체적 지성으로서 나타난다. 남의 나라의 지성·방법론을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입장에서 실천적 과제로서 비판적으로 섭취하는 지성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지식인은 ‘지금·이곳’의 역사적 특수성을 의식하는 속에서 세계의 지성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주체적 자세에서만 세계적 시야에서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송건호, 『송건호 전집 6 –전환시대의 민족지성』 한길사, 2002년, 86쪽

 

정상모 저널리즘 이론을 보면 객관성, 공정성 같은 개념이 있습니다. 저는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의 하나로 객관성과 공정성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객관성과 공정성만 지킨다고 해서 그 자체가 진실이라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진실을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송건호 의장이 말씀하셨던 근본적인 내용은 진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봅니다. 어떻게 하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민중이 진실을 볼 수 있게 할 것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한겨레신문에 계실 때 최고의 가치로 말씀했던 것도 진실이었습니다. 진실을 어떻게 전할 것이냐는 결국 편집권을 누가 가지고 있어야 하느냐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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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5월 14일 한겨레신문 창간호를 들고 기뻐하는 송건호 의장의 모습(위)과 편집국장 직선제 투표 중인 송건호 의장(아래).


그래서 한겨레는 창간 당시 편집위원장(편집국장) 직선제를 마련합니다. 언론이 망가진 이유를 편집권이 독립되지 않아서라고 본 것이죠. 송 의장은 구성원인 기자들에게 편집권을 줘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사장으로서 ‘절대로 신문 제작에 간섭하지 않는다, 인사에 관여하지 않는다’를 두 가지 원칙으로 밝히고 끝까지 지켰습니다. 한겨레의 편집위원장 직선제 이후에 다른 언론사들도 편집국장 직선제나 동의제를 도입했습니다.

 

국민 성금을 모아 창간한 한겨레의 편집위원장 직선제 도입은 송건호 의장의 평소 소신이었다. 송 의장은 ‘언론이 가야 할 길’이라는 글에서 언론자유를 이루기 위해 ‘다른 기업(자본)으로부터의 독립’, ‘언론활동을 규제하는 언론기본법·홍보정책실 폐지’, ‘편집권 독립’을 들었다. 편집권 독립과 관련해서는 미국형·유럽형·일본형의 형태가 있다며 한국에서 편집권 독립을 원한다면 미국형이나 일본의 ‘편집강령’ 형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문이 현행 법질서 안에서 제작되는 한 기자가 주인이 되어야 하며 외부의 누구도 신문제작에 관여하지 말아야 한다. (중략) ‘편집강령’이라고 해서 신문제작에 관한 방침, 가령 정치·경제·문화·외교·국방 등 중요한 문제에 어떠한 입장을 취한다는 편집방침을 아주 구체적으로 소상하게 열거하여 이 방침에 따라 전사원이 참여하며 결정하며, 이미 결정된 ‘편집강령’에 대해서는 경영진이나 노조도 함부로 바꾸지 못한다. (중략) 이들에겐 우리와 같이 ‘불편부당’ ‘시시비비주의’ ‘문화주의’ 따위 애매한 이른바 ‘사시’를 내세워 독자들을 속이며, 편집권이 기업주에게 있다고 주장하여 신문의 올바른 길을 이탈, 왜곡보도를 일삼아 기업주 개인의 이권을 꾀하는 일이란 용납되지 않는다.”
송건호, 『송건호 전집 10 –곡필과 언론』 한길사, 2002년, 175쪽

 

이완기 송건호 의장은 ‘우리 신문의 기사는 논설적이고, 사설은 해설적이다’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기사는 사실에 근거해서 작성하면 되고, 사설은 신문사의 입장과 주장을 담아야 하는데 이게 뒤바뀌었다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사설은 해야 할 주장을 못하고 눈치를 보고 빙빙 돌며 해설만 하고 있고, 기사는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양시양비론에 머물고 있다는 비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상모 그렇죠. 객관성이나 중립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묘하게 왜곡을 하는 것이죠. 왜곡의 수단으로 객관성, 공정성, 불편부당성을 이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객관을 핑계 대며 숨지 말고, 진실을 정확하게 밝히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김삼웅 송 선생이 70년대에 『드골 프랑스의 영광』을 썼습니다. 책에서 미국의 종속에서 벗어나려던 드골의 민족주의를 높이 평가합니다. 70년대는 그런 내용을 글로 쓰기 쉽지 않은 시절이었습니다. 책을 내거나 글을 쓸 때는 언제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해방 후에 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요. 엄혹했던 독재 시절에 ‘의열단’을 주제로 책을 썼던 기개를 봐야 합니다. 왕성한 탐구열과 시대정신에 투철해지려는 노력이 결합하어 우수한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탁월한 현대사 연구가라는 두 분야에서 일가를 이룰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백범 정신의 부활을 포착하다

 

서중석 덧붙여서 송 선생은 ‘인물론’을 많이 썼습니다. 60년대에 백범 김구와 우남 이승만을 분석합니다. 김구 선생 장례식에 50만 인파가 참여했습니다. 50만 인파는 당시 민중들이 가지고 있었던 김구에 대한 존경심과 김구를 죽인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농축된 것입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안두희가 의인’이라는 벽보가 붙기도 했습니다.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화하려는 ‘이승만 노선’과 냉전을 거부하고 통일 독립국가를 수립하려고 했던 ‘김구 노선’의 대결로 볼 수 있습니다. 점점 반공과 냉전 논리가 세를 얻으면서 50년대에는 김구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독립운동가들은 50년대 이승만 집권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송 선생이 《사상계》 1968년 10월호 특집 ‘지도자론’에 ‘한국적 정치 지도자상의 현실과 이상’을 기고합니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쫓겨난 후 김구 정신이 부활하기 시작합니다. 60년대에 김구가 새롭게 부활했는데, 이를 송 선생이 예리하게 포착해 이를 ‘백범이즘의 부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후 냉전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강요한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도 ‘김구 죽이기’는 감히 시도하지 못했습니다. 김구 선생은 ‘독립운동의 거성’이자 ‘통일운동의 화신’으로 60년대에 자리 잡고, 이후 우리 역사에서 김구 선생이 살아있게 됩니다. 송 선생은 김구, 이승만, 서재필 등 현대사의 주요 인물에 대해 글을 써서 60년대에 김구 정신이 부활했음을 확인시켰습니다. 


또 송 선생은 우리 역사가 어디에서부터 일그러졌는지를 적확하게 지적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친일파들이 재생해 활동했다는 것이지요. 송 선생은 친일파 문제를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로 붙잡고 씨름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현대사를 망쳐 놓은 세력이 누구냐는 질문입니다. 일제 시기에는 친일파가, 해방 이후에도 친일파와 그 후예들이 우리 역사를 얼룩지게 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겁니다. 올바른 지적입니다. 사실 지난 정부 시절 국정교과서 논란도 친일파 문제와 연결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분단 문제도 함께 제기합니다. 역사 연구자들은 80년대 중반까지도 분단 문제를 건드린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압도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었습니다. 더 자세히 들어가면 해방 직후 반탁과 찬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입니다. 반탁 운동은 이승만 정권의 정통성이나 단정 수립을 합리화하는 주요 근거입니다. 그런데 송 선생은 반탁 운동에 상당히 비판적으로 접근합니다. 만일 해방된 우리 민족이 통일 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반탁운동은 통일 정부 수립 반대 방향으로 방향을 틀게 만든 것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이승만과 박정희는 분단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했습니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정당화시키는 논리가 바로 반탁입니다. 

 

 

분단의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하다

 

이완기 반탁, 찬탁 논쟁과 관련해서 송건호 의장은 모스크바 3상 회의를 언급하면서 그 상세한 내용을 당시에 이성적으로 검토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서중석 아주 중요한 지적입니다. 우리 교과서는 2천 년 대에 들어서야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그나마 객관적으로 기술하기 시작합니다. 그 이전에는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을 반공 이데올로기와 연결시켜 왜곡해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은 제1항에 명시한 ‘한반도에서의 통일 임시 정부 수립’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것과 함께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3항에서 제시한 신탁통치는 장구한 역사에서 독립국가를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모스크바에서 합의한 신탁통치는 유엔헌장에 있는 신탁통치와는 달리 그 내용이 결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탁통치 이전에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제1항에 따라 우리 임시정부를 먼저 수립하고, 우리 임시정부와 미소공위가 협의해서 내용을 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5년 이내 한시적인 조건이었으므로 통일정부 수립의 과정으로 이해해야 할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운형도 3상 회의 결정에 매우 많은 고민을 했고, 김규식도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은 읽고 또 읽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먼저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다음에 신탁통치를 반대하면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모스크바 결정을 이행하지 않으면 오히려 분단이 되고, 분단이 되면 미소의 세력 각축장이 되면서 엄청난 민족적 위기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하루빨리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모두가 힘을 합치자는 것이 여운형과 김규식의 주장이었습니다.

 

정상모 반탁을 주장하는 이들이 독립국가의 주권을 생각한 사람들이고, 찬탁은 나라를 부정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중석 제가 청암 선생 회갑기념 논문집에 서동석이라는 필명으로 관련 주제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반탁 진영과 의견을 달리 한 김규식이나 여운형의 주장은 찬탁이 아닌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대한 지지였고 신탁통치에 대한 찬성이 아니었다’는 내용입니다. 이렇게 해석하지 않고, 김규식이나 여운형이 신탁통치에 찬성했다는 주장은 우익 진영에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논리로 사용한 것입니다.

 

사실 반탁 투쟁에 1945년 12월 29일부터 친일파들이 대거 참여하기 시작합니다. 나쁘게 말하면 친일파들이 반탁을 통해서 애국자로 세탁하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친일파들은 46년에 들어서면서 반탁 운동에 더욱 열심히 나섭니다. 반탁 운동이 단독정부 수립 운동, 곧 단정 운동으로 연결될 수 있었기 때문이죠. 


이때 1945년 12월 27일 동아일보가 신탁통치와 관련해 오보를 냅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국은 즉시 독립주장’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아주 복잡한 정국이 만들어졌습니다.


김삼웅 제가 해당 동아일보의 해당 오보(1945년 12월 27일 1면)와 해설기사, 국제면까지 확인해 봤습니다. 동아일보가 오보로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 중에서 독립 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 다른 방안은 제대로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김구 선생처럼 30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했던 분들 입장에서 내 나라를 세우려는데 외세가 10년 또는 20년 신탁통치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송건호 선생은 김구 선생이 반탁이라는 입장을 보인 것에 대해 ‘민족의 자존심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순수한 민족의식이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면서도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판단하지는 못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완기 그래서 ‘이성적으로 검토해야 했다’고 주장하셨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송 의장의 언론인으로서의 자세, 그리고 역사관에 대해 말씀을 나눴습니다. 이제 지식인, 지성인으로서의 송건호 선생의 삶에 대해 알고 계신 내용이 있다면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서중석 제가 92년도에 역사문제연구소 사무실에서 송건호 선생과 인터뷰를 했습니다. 75년 3월 사표를 쓰고 나오고 보니 ‘먹고사는 게 당장 걱정’이었다고 쓸쓸하게 말씀했어요. 집에 돈을 가져다줘야 저녁 식사를 할 수 있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녀들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 가르쳤다고 안타까워하더라고요. 대학 강사 노릇 하기도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김삼웅 선생께서 평전에 쓰기도 했는데, 그런 중에도 헌책방을 참 많이 다니셨어요. 모아놓은 장서가 1만 5천 권이라고 들었습니다. 나중에 모두 한겨레신문사에 기증했다고 들었습니다. 
 

 

시대는 속절없는 독서인을 거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정상모 언협 의장 하실 때도 틈만 나면 헌책방에 가서 좋은 책 찾아보는 것을 즐기셨습니다. 

 

김삼웅 한 가지 숨은 이야기를 말씀드리면, 동아일보 그만두고 원고료 몇 푼으로 생활하면서도 헌책방 순례가 취미였다고 합니다. 책을 사서 집에 들고 들어가면 아내와 식구들 눈치가 보여서, 대문 밖에 슬쩍 놔두었다가 식구들이 잠들면 가지고 들어왔다고 사모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무렵 청와대에서 입각 제의를 해오는데, 이를 단호하게 거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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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인사동 고서점에서 촬영한 송건호 의장

 

김태진 송 의장께서 동아일보 그만두고 리영희 교수가 주선해서 한양대에서 강사를 했는데, 압력으로 일 년도 못하고 그만뒀습니다. 김삼웅 선생이 말씀하셨던 입각 거부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에피소드를 말씀드릴게요. 박정희의 입각 제안을 듣고 ‘나는 언론인이지 행정가가 아니’라고 거절했다고 합니다. 91년 민언련 언론학교 1기 수강생들에게 강의하면서 ‘입각을 거절한 날 집 앞 전봇대를 붙들고 울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6남매의 아버지로서 흘린 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송 선생이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계실 때 칼럼을 통해 ‘언론인은 언론을 천직으로 알아야지, 언론을 징검다리 삼아 관계나 정계로 나가는 것은 진정한 언론인이 아니다’라고 꾸짖었습니다. 당신이 한 말을 그대로 실천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삼웅 송건호 선생이 보인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보면, 조선 후기 유림의 한 지파였던 양명학 계열에 대해 공부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134인 지식인 시국 선언, 언협 의장, 『말』지와 한겨레 창간과 같은 활동은 흔히 말하는 나약한 지식인이 행하기 어려운 실천력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런 면은 ‘지행합일’을 갖춘 양명학적인 모습입니다. 단순히 언론인, 사학자, 지식인이라는 단편적인 면을 뛰어 넘는 ‘행동하는 지성인’이라는 면모를 보여줬습니다. 후생들에 큰 교훈이 되는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김태진 80년 5월 17일 전두환이 계엄령을 선포한 후 송건호 의장이 연행되었습니다.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니까 ‘악질’이라는 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80년에 그러한 고초를 겪으셨는데, 언협을 결성할 때 의장을 맡는 것도 웬만한 용기가 아니면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지를 낼 때마다 구류를 살아야 하고, 보도지침을 폭로한 후 『말』지 복간을 강하게 주장했던 것도, 송건호 의장 아니면 그럴 만한 분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삼웅 그런 강단을 보여주며 평정심을 유지한 모습이 지식인의 전범이 아닌가 싶습니다.

 

정상모 보도지침을 폭로한 후에 정세가 엄혹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말』지나 《말소식》을 낼 때 수사기관의 관심 중 하나가 인쇄소였습니다. 인쇄소는 극비였는데, 송건호 의장께서 ‘비밀은 나에게 말하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중에 고문을 받으면 견뎌 낼 장사 없어서 불기 때문에 차라리 말을 말라’는 것이었죠. 그런데 이런 말씀에 대해 조금만 더 생각하면 참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만약 고문을 당할 때 요구하는 대로 진술을 하면 고문이 끝날 텐데, 정말 모르기 때문에 진술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더 심한 고문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니까요. 

 

김삼웅 그런 점은 의열단 정신인 것 같습니다. 송 선생께서 의열단에 대해서도 글을 쓰기도 했는데, 의열단원들이 그렇게 활동을 했습니다.

 

서중석 송건호 선생이 글을 쓰던 시절을 보면, 6월 항쟁 이후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시절이었습니다. 한 자 한 자 고민하면서 써야 했던 시절이었어요. 송 선생은 글을 쓸 때 울면서 쓸 때가 많았다고 말했습니다. 진실을 진실대로 쓸 수 없는 시절이었습니다. 같은 말도 뱅뱅 돌려서 써야 하는 참담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 그분을 울게 한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반탁, 친일파, 분단과 분단을 고착화하려는 사대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곧 이승만, 박정희라는 정치권력에 대한 강렬한 비판의식이 수반되는 일이었습니다. 역사를 정리할 때는 더욱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일제 시대 친일파들이 해방 이후 분단 세력이 되어 단정 운동을 폈고, 그리고 독재협력 세력이 됩니다. 


2004년과 2005년경부터 이른바 뉴라이트 세력이 일부 언론과 수구 정당을 배경으로 삼아 활개를 치고 있습니다. 뉴라이트 주장의 핵심은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의 위치에 올려놓자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를 가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오랫동안 벌인 것도 이 부분과 연결됩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을 건국했다고 하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강변할 수 있고, 친일파 문제도 상당 부분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같아요. 이승만 추종자들 중에는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만들면 단정 운동, 친일행위, 독재협력을 합리화할 수 있다는 속셈이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현상을 볼 때 송 선생의 이승만 비판이 이승만 추종자 비판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뉴라이트 출현을 예상하고 통렬하게 비판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듭니다. 현재 지식인 상당수가 뉴라이트 주장에 제대로 된 비판을 못하는 것을 볼 때 송 선생을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하게 됩니다.

 

김삼웅 제가 평전에서 송 선생을 ‘언론 선비’라고 표현했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 박정희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였던 언론인, 필화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논객들이 박정희 정권과 이어 전두환 정권에 투항합니다. 어쩌면 언론계 동료였던 분들의 변절이었는데, 송 선생은 지조를 지켰습니다. 

 

빈한한 생활을 견디면서 정론을 쓰고, 지식인의 전범을 보여줬습니다. 이런 바탕이 어디에서 기원한다고 봐야 하는지…. 혹시 그 부분에 대해서 가까이에서 모셨던 분들이 알고 계신 것이 없습니까?

 

정상모 송건호 의장의 궁핍한 생활은 최민희 전 대표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최 대표가 송건호 선생 댁을 여러 번 방문했는데, 칫솔을 집게로 눌러 놓은 것을 봤다고 했습니다. 그런 생활에서 권력의 유혹을 과감하게 뿌리치고, 자칫하면 고통으로 돌려받을 수도 있는데 지조를 지켰다는 것. 말씀하신 선비정신이라고 생각됩니다. 

 

이완기 고은 선생이 <만인보>에서 송건호 선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시대는 착실한 세대주를 지조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속절없는 독서인을 거리의 사람으로 만들었다. 시대는 조심스런 언론인을 역사의 인물로 만들었다.’ 상식적인 시대에 나셨다면 어쩌면 평범한 분으로 살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40년 동안 외식 한 번 제대로 못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김삼웅 자식들이 짜장면이 뭔지 몰랐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송건호 의장은 양심을 지키는 대신 정권의 핍박에 따른 궁핍을 감내해야 했다. 김삼웅 선생은 『송건호 평전』에서 ‘리영희 교수가 나이 예순이 넘어서야 비로소 온수가 나오는 집에 살게 되었을 만큼 가족의 희생을 감내했는데, 송건호 역시 그런 면에서는 난형난제였다’고 말했다. 정지아 작가는 송 의장이 감내한 숙명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중에 이정순은 리영희 교수가 이사 간 산본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경치 좋은 방에 서재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그걸 보는 순간 이정순은 핑그르르 눈물이 돌았다. 송건호는 평생 이런 서재 한 번 가져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동아일보를 퇴직한 후 송건호는 식구들을 피해 이방 저 방 옮겨 다니며 밥상을 책상 삼아 글을 썼다. 그가 남긴 대부분의 글은 밥상 위에서 탄생했다.”

정지아, 『나는 역사의 길을 걷고 깊다 –참언론인 송건호의 생각과 실천』, 한길사, 2008년, 155~1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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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순 여사와 송건호 의장의 신혼 시절 모습. 이 여사는 1975년 3월 송 의장으로부터 동아일보를 그만두게 된 자초지종을 듣고 나서 “나도 당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소신대로 하세요”라고 응원했다. 그렇게 양심을 지키는 송 의장을 응원하고, 그러한 삶에 따르는 숙명을 함께 감내했다. 
김태진 의장은 좌담에서 이정순 여사에 대한 고마움을 여러 차례 표현했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해직 기자들은 매년 정월 초하루마다 송 의장에게 세배를 다녀왔다. 이 여사는 어려운 살림에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후배 기자들을 살뜰히 챙겼다. 김태진 의장은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어려운 형편을 전혀 생각 못 한 후배들의 ‘철없음’이 두고두고 죄송스러웠다. 
고문 후유증으로 얻은 파킨슨병으로 투병 중이던 송 의장에게 병문안 갔을 때의 기억도 생생하다. 김태진 의장이 이 여사에게 ‘사모님, 힘드시죠?’라고 위로했다. 이 여사는 ‘살아계신 것만으로도 고맙다’고 답했다. 오히려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후배 김태진’은 이정순 여사가 송건호 의장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말한다.

 

 

언론과 검찰을 개혁해,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

 

이완기 많은 시간 많은 말씀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김태진 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백지 광고 사태, 그리고 기자 대량 해직 당시 박정희 정권이 신문사에 준 특혜가 신문 면수를 늘려준 것이었습니다. 증면은 바로 광고 수입을 늘려줬다는 말입니다. 광고 수입을 늘렸다는 것은 언론이 자본 권력에게도 의존하게 만드는 것이었죠. 여전히 광고에 의존하고 자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고민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40여 년 전에 주장했던 자유언론의 실현은 어렵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상모 맞습니다. 자본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은 여전한 과제입니다.

 

김삼웅 1999년 기자협회보에서 전국의 신문 편집국장, 방송 보도국장, 언론학자들을 대상으로 20세기 가장 훌륭한 언론인을 뽑아달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위암 장지연 선생과 청암 송건호 선생 두 분이 선정되었습니다. 친일 행위를 한 장지연 선생을 제외하면 20세기 가장 훌륭한 언론인은 송건호 선생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적폐를 거두고 정상국가로 서기 위해서는 언론과 검찰이 제 기능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확인했듯이 감시 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죠. 새 정부가 출범했으니 적폐 중 적폐인 언론을 개혁하기 위해 민언련 회원들이 노력해 주세요. 

 

서중석 이완기 대표를 비롯해 민언련 활동하는 분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주세요. 특히 공영방송이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노력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김태진 김삼웅 선생께서 언론과 검찰이 제 기능을 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1971년 사법파동이 있었습니다. 7월 28일 서울지검 이규명 검사가 뇌물 수수혐의를 이유로 들어 이범열 부장판사와 최공웅 배석판사, 이남영 서기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한 것으로 시작한 사건입니다. 


제주도 모 중학교 교장이 재일동포로부터 90만 엔을 기부 받아 학교 건물을 지었는데 검찰은 ‘그 돈이 조총련계 자금’이라며 교장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해 재판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 관련 증인이 현지 수사기관의 방해로 서울 법원에 출장을 올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재판부는 변호사의 요청으로 출장 심문을 위해 제주도에 다녀옵니다. 검찰이 이를 ‘재판부가 왕복 비행기 삯과 술 접대 등 10만 원 가량의 향응을 받았다’고 트집을 잡았습니다. 당시 형사 사건의 경우 신청한 당사자 측이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합니다.


입건된 두 판사는 강직한 판사로 정평이 나 있었고 구속영장 청구 전 6개월 동안 반공법 위반 등의 재판에서 19건의 무죄 및 선고 유예판결을 내린 소신 판사였습니다. 그래서 검찰 수사를 무위로 돌린 판사를 혼내주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검찰이 요청한 구속영장을 1, 2차 모두 기각했습니다. 그리고 판사들의 집단 사표 제출이 일어나 사법부가 마비되는 상태까지 갔습니다.


제가 1차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던 다음 날 변호사이며 공화당 초대 총재였던 정구영 씨를 만났습니다. 정 씨는 ‘오늘날 행정부만 무제한으로 비대해 졌고 가장 약체화한 사법부라는 점에 만감이 교차 한다’며 ‘사견으로는 이 사건이 반드시 구속해야만 처단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또 ‘범행 사실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도 기소되어야만 할 것인가에는 의문’이라고도 했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는 <사법부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사설로 다룹니다. 이 사설은 송 의장이 쓰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시사하는 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부 내용을 읽어 보겠습니다.

 

“검찰 당국이 형벌청구권을 남용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있다는 비난을 듣기도 했다. 이러한 일이 검찰로서는 못마땅히 생각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열 사람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인권을 유린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 법관들의 신조라고 한다면 무죄판결은 쉬워도 유죄판결은 어렵다고 보는 것이 법관들의 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중략) 우리는 이번 파동을 계기로 사법부가 더욱 분발하여 오욕의 지난날을 깊이 반성하고 또 청산하여 사법부의 양심과 독립을 되찾는 결정적 계기로 삼아주기를 바라마지않는다. 사법부는 행정부의 시녀가 아니며 어떠한 압력도 이를 배제하고 소신과 양식을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된다.” 동아일보 1971년 8월 2일

 

현재 검찰이 귀담아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당시에 이런 사설을 썼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어느 면에서는 상당히 고맙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검찰도 개혁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송건호 의장이 ‘언론의 민주화는 다른 모든 분야의 민주화에 앞서 있어야 하는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진행 이완기 상임대표 정리·사진 박제선 홍보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