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행동이 점차 이상해지고, 말도 어눌해지고, 우리는 매사에 무능해지고, 그래서 우스꽝스러워지지만, 그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질병인 게지요.” 알츠하이머협회에서 앨리스는 자신의 질병 경험을 연설한다.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언어학자였던 앨리스지만 연설문의 같은 줄을 반복해서 말하게 될까봐 형광펜을 그으면서 읽어내려간다. “제가 고통받는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다만 저는 애쓰고 있습니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 있기 위해서, 예전의 나로 남아있기 위해서.”
알츠하이머, 그리고 죽음으로 다가가기
<스틸 앨리스(Still Alice)>는 막 50세 생일을 지낸 한 여성이 유전에 의한 조발성 알츠하이머에 걸려 서서히 기억을 상실하면서 죽음으로 다가가는 과정을 이야기한다.
앨리스(줄리안 무어)는 다 가진 듯이 보인다. 언어학 교수라는 지위, 세계적인 언어학자라는 인정, 경제적인 풍요, 사랑하는 가족 등. 달그락 거리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잠시 들리다가 용명(fade-in)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지적인 여성이라는 축사를 해 주는 남편과 자녀들로부터 따뜻한 생일 축하를 받는 저녁 식사 자리를 영화의 초입에 배치시킨 이유는 이어지는 앨리스의 상실, 그 중에서 가장 비극적인 기억 상실이라는 참혹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뉴욕의 컬럼비아대학교 언어학과 교수인 앨리스는 UCLA(캘리포니아대학교 로스앤젤리스캠퍼스)에서 초청 강연을 하던 도중에 특정 단어를 기억해내지 못한다. 막내딸 리디아(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연극에 빠져 있는 것이 마땅찮은 그녀는 그 극단이 남편(알렉 볼드윈)의 재정 지원 덕에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남편을 비난하지만, 그 이야기는 과거에 남편으로부터 들은 것이었다. 늘 다니던 길로 조깅을 하던 중에 장소에 대한 인지가 멈추는 공포스런 경험으로부터 앨리스의 기억 상실 이야기가 본격화되는데, 1분 가량의 오래 잡기(long take)로 구축된 이 장면이 신호탄이 된다.
앨리스는 집으로부터 대략 2킬로미터를 조깅하여 컬럼비아대학교 중앙도서관 앞에 도달하는데, 카메라는 그녀를 뒤에서 따라가다가 옆에서 보여주다가 정면을 보여주기도 하는 등으로 평이하게 담는다. 그런데 카메라는 갑자기 앨리스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주위 배경의 초점을 흐린(out of focus) 후에 앨리스를 가운데 두고 돌기 시작한다.
돌 때 트랙을 깔아서 유연하게 보여주기 보다 지지대 없이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움직여서 흔들리게 보여준다. 앞 얼굴을 오래 잡다가 옆으로 이동하고 뒤로 이동하고 뒤에서 빠르게 이동한 후에 다시 앞으로 돌아와서 한동안 앞 얼굴을 잡은 후에, 시점을 앨리스에게로 넘겨준다. 그래서 그녀의 눈이 바라보고 있는 대상이 보여지는데, 흐릿한 시야를 표현한다. 앨리스가 바라보는 대상은 이전보다 더 흐릿하게 초점을 이탈하되, 조깅 끝에 나오는 헐떡이는 숨 소리를 프레임 밖에서 계속 유지하는 방식을 쓴다.
이어서 당황한 표정의 그녀가 애써 숨을 고른 후 회복한 얼굴 표정이 이어진다. 그리고 초점이 선명하게 맞아 또렷이 보이는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의 쇼트로 이러한 쇼트들의 집합은 그녀가 기억을 잠시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을 영상으로 말해준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짚어야할 몇 장면들 중 하나인데, 처음으로 자신의 이상 증세를 느낄 때의 발작 같은 당혹감을 줄리언 무어의 표정 연기와 카메라 움직임의 조합으로 잘 살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지만, 이 장면 이전에 이미 복선을 깔아 두는 세밀함 덕분이기도 하다.
미국의 서부로부터 동부로 장거리 비행 끝에 집에 돌아온 앨리스가 남편이 집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문자를 남기는 선행 장면에서, 카메라는 핸드폰에 가깝게 다가간다(close-up). 관객은 “당신 어디있어?”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게 되는데, 이것이 뒤에 배치된 길을 잃는 장면(scene) 때문에 이중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남편 존에게 어디에 있는 지를 묻는 동시에, 주인공 앨리스인 나는 지금 어디 있는거냐고 묻는다는 것을. 늘 가던 장소가 너무나도 낯설게 인식되는 자신의 이상 증세를 심각히 여긴 앨리스는 신경과 진료를 받는다.
“단어나 약속이 생각나지 않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야. 내 일부가 사라지는 느낌이 얼마나 공포스러운지 알아? 내가 이룬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이며 결국은 내 전부가 사라질 꺼야.”
잠을 이루지 못하던 앨리스는 울면서 남편에게 알츠하이머 진단을 예견한다. 알츠하이머성 치매이며 가족성 알츠하이머라는 진단은 그녀로 하여금 차라리 암에 걸렸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끔찍한 생각을 갖게 한다.
“암은 적어도 부끄럽진 않잖아. 암에 걸리면 날 위해 핑크색 리본도 달고 캠페인도 하고 모금 운동도 해주잖아. 이런 비참한 기분은 안들겠지.”
잘 내려놓는 기술
가족성 알츠하이머는 자신의 의지나 실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식에게 병을 물려줬다는 죄책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결혼기념일을 축하해주러 온 아이들에게 두 아이 중 하나 꼴로 자신의 치매가 유전되며, 유전될 경우 발병 확률은 100퍼센트라는 의학적 소견을 전할 때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 미안해”라고 사과하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큰 딸 애나(케이트 보스워스)와 통화할 때에도 현재 질병을 앓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걱정보다는 몇 십 년 후 질병에 걸릴 딸에게 드는 미안함을 온 몸으로 표현할 때 보는 이는 처연해진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그녀는 죄인이 된 것이다.
많은 치매 관련 대중 서사들이 치매에 걸린 사랑하는 이를 바라보는 입장에서 진행되는 것과 달리 <스틸 앨리스>는 앨리스의 시각에서 전개된다. 생일 축하를 받고 기뻐하는 앨리스의 표정을 오프닝으로 삼고, 그에 반해서 딸 리디아가 읽어준 시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힘들게 겨우 발음하는 표정을 엔딩으로 구축했다는 점과, 점차 기억을 잃고 그리하여 언어를 잃게 되는 앨리스의 직업을 언어학 교수로 설정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무엇보다 많은 생각을 이끌어 내는 대목은 앨리스가 자신을 상실케 하는 질병에 대해서 자신의 과거에 가치를 부여하고 현재 매순간을 긍정하는 ‘잘 내려놓는’(well-losing) 기술로 대응했다는 점이다. 스스로 삶을 마감할 계획을 세우고 수면제를 숨기려던 앨리스는 우연히 나비 목걸이를 발견한다. 일찍 여읜 어머니로부터 받은 선물이었다. 왜 수면제를 먹어야 하는지, 수면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먹을지를 설명하는 자신을 촬영하여 ‘나비’라는 이름의 폴더로 컴퓨터에 저장한다. 나비 목걸이는 이후 늘 앨리스와 함께 한다.
“초등학생 때 선생님한테서 나비가 겨우 한 달쯤 밖에 못산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속상하더라구. 그런데 내 엄마는 나비가 멋지고 아주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괜찮다고 하시는거야.”
‘내가 곧 나비야’라고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앨리스는 자신을 나비에 비유해서 멋지고 아름답게 생을 살았기 때문에 짧게 사는 게 속상할 일이 아니라는 철학적 메시지를 딸 리디아에게 전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앨리스가 치매를 받아들이고 남은 생을 평온하게 살 수 있는 바탕에는 미국 중산층의 재력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치료비를 개인이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미국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치매 환자들의 남은 생이 앨리스와 같을 수 있을지를 질문하게 한다.
글 염찬희 회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