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나와 관련 있는 여러 사람 또는 내 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단어 자체로 외롭지 않다. 원하든 원치 않든 겪어야 하는 여러 가지 삶에서 ‘우리’는 동행, 공감, 회복과 비슷하다. 앙뚜, 우르갼, 도로시아, 애비, 줄리, 제이미 모습에서 남이 아닌 나와 우리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다시 태어나도 우리
인도 북부 라다크에 사는 아홉 살 소년 앙뚜는 ‘린포체(Rinpoche)’다. 오래전 고승이 전생에서 다 하지 못한 업을 잇기 위해 앙뚜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저는 전생에 티베트 캄이란 곳에서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 마을과 사원, 제자들이 기억납니다.” 사람들은 린포체를 살아있는 부처로 받들어 우러러본다.
환생한 린포체는 전생에 머물렀던 사원을 찾아 제자들을 만나야 한다. ‘사원’과 ‘제자’는 린포체 정체성을 유지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제자들이 먼저 앙뚜를 만나러 오면 좋으련만, 몇 년째 감감무소식이다. 중국 정부가 인도·티베트 국경을 막아 제자들이 린포체 앙뚜를 만나러 올 수 없다. 앙뚜를 추앙했던 이들도 더는 기다리지 않았다. ‘하나의 사원, 하나의 린포체’라는 원칙 때문에 고향 라다크 사원을 떠나야 할 처지.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데, 아직 어리고 미숙한 소년 혼자서 상황을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때 수도승 우르갼이 나섰다. 평생을 수도 정진하며, 의사로 사람들을 치료한 그는 앙뚜를 위해 헌신했다. 어린 앙뚜를 가르치는 스승이자 린포체 앙뚜를 모시는 제자로, 모든 정성을 쏟았다. 이번 생애 우르갼 자신이 책임져야 할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티베트 캄(Kham)으로 떠났다. 린포체 앙뚜가 운명에 닿는 길, 전생과 현생을 완전하게 엮는 유일한 여정이다. 인도 뉴델리와 바라나시를 지나 부다가야까지 3000km 넘는 여정은 험난했다. 길 위에 서 있는 동안 앙뚜와 우르갼은 끈끈한 동반자였다. 60살 나이 차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내 편’. 두 사람은 서로를 신뢰하며 의지해 마침내 티베트 캄 가장 가까이 이르렀다. 눈 쌓인 히말라야 산맥 너머 앙뚜가 전생에 머물렀던 사원이 있다. 여정은 여기까지다. 우르갼이 말한다. “저는 믿어요. 꼭 훌륭한 분이 되실 거라고. 당신을 돕는 게 제 삶이에요.” 앙뚜가 대답한다. “스승님과 있으면 늘 좋았어요.”이별할 때가 왔다. 린포체로서 굳건한 삶을 준비하기 위해 앙뚜와 우르갼은 헤어져야 한다.
그동안 흔들림 없던 우르갼이 흐느낀다. 눈물이 흐르진 않지만 애틋함이 진동한다. 어쩌면 현생에서 다시 못 만날지도 모른다. ‘15년 후엔 스승님을 제가 모시겠다.’는 앙뚜의 바람도 기약할 수 없다.
국내 개봉하기 전 <제67회 베를린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Kplus> 부문에서 그랑프리 받을 때 제목은 <앙뚜>였다. 제목을 바꾸며 한 사람에서 두 사람 이야기로 ‘관계’가 돋보인다. 극 중 우르갼의 말처럼 사람의 처지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그때 나와 함께하는 또 다른 나, ‘우리’가 있어 좋은 방향으로 처지를 만들 수 있다. ‘우리’는 마치 ‘희망’ 같다.
우리의 20세기 -“요즘은 어떤 게 좋은 사람이니?”
1929년 태어나 1979년 현재 미국 산타바바라에 사는 싱글맘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는 ‘요즘’ 고민이 많다. 사춘기 아들 제이미를 ‘요즘’ 방식으로 키우고 싶은데 쉽지 않다. 남보다 시대를 앞장서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나이 쉰 살에 왠지 시대에 뒤떨어진 느낌이 들어 복잡하다. 아들 제이미 역시 엄마를 이해하기 어렵다.
사랑 따위 눈 돌리지 않고 외로운 구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이 건조한 도로시아는 그저 ‘1930년대 대공황 시대 사람’일 뿐이다. 물론 도로시아 전성기(!)에도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했지만 1979년 체험하는 변화는 급물살이다. 쿨한 그녀는 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변화를 받아들이기로한다. 도로시아는 세입자 애비(그레타 거윅)와 제이미 친구 줄리(엘르 패닝)에게 도움을 청한다. “얼마만큼 아들을 사랑하든 그냥 관계가 계속 무너져.” 애비와 줄리라면 제이미를 이해할 거라 기대했다. 24살 펑크족 애비는 독특하고 아이디어가 빛나는 사진작가다. 자궁경부암 치료 중이다. 제이미보다 두 살 많은 줄리는 스스로 ‘자기 파괴성’이 강하다 할 만큼 반항적이다. 연애 문제만큼은 제이미보다 해박하고, 실전 경험이 풍부하다.
도로시아가 원하는 대로 애비, 줄리는 제이미에게 좋은 영향을 줬을까? 어느 날 제이미를 데리고 클럽에 다녀온 애비는 도로시아에게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을 보여준다. 펑크락 클럽 분위기에 취한 제이미 얼굴, “아마도 나는 영원히 볼 수 없는 모습일 거야.” 낯선 아들 모습에 조금은 불안하다. 마이크 밀스 감독은 “1970년대 후반은 ‘현재’가 시작하는 시기였다. 이후에 펼쳐진 미래와는 완전히 다른 시대였죠.”라고 말했다.
영화는 격변기, 나와 너, 우리가 모두 겪은 변화와 성장을 그렸다. “네 인생을 어떤 식으로 예상하든 절대 마음처럼 흘러가지 않아.” 애비가 제이미에게 건넨 조언처럼 ‘거대하고 알 수 없는 인생’에서 마냥 승승장구하며 바라는 삶을 실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10대든 20대든 50대든 저마다 고민이 있다. 혼돈 속에서 제 길을 찾으려 애쓴다. 영화 속 1979년은 과거이자 현재이며 다가올 미래다.
후반부,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전투기 조종사를 꿈꿨던 도로시아가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장면에서 험프리 보가트 주연 고전 영화 <카사블랑카> 주제곡 <As time goes by>가 흐른다. 극 중 다시 태어나면 험프리 보가트 같은 남자와 연애하고 싶다는 도로시아가 생각난다. 실제 아네트 베닝은 <벅시, 1992년>에서 협연한 워렌 비티와 결혼했다. 1994년 두 사람은 로맨스 영화 대명사로 꼽는 <러브 어페어, 1994년>에서 열연했는데, 1932년 험프리 보가트도 같은 제목 영화에 출연했다. 아네트 베닝은 요즘 유행어로 ‘리즈 시절’보다 현재가 더 멋지다.
글 김현식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