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호] [영화이야기] 일상을 매개로 연결되는 도시, 시, 그리고 사람 <패터슨>
등록 2018.07.03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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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박스에 있던 자두는 내가 다 먹어버렸어.
아침 식사로 남겨둔걸 테지.
용서해줘.
그런데 자두는 맛있었어.
아주 달고 아주 시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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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에 볼 일이 있어서 왔다가 우연히 발견한 쪽지의 내용일까? 냉장고 속의 자두를 다 먹어치운 남편이 미안한 마음에 그 사실을 아내에게 알리는 쪽지 같지만, 사실은 미국의 유명한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William Carlos Williams, 1883-1963)의 시 “다름이 아니라(This is just to say)”다.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가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남편에게 읽어달라고 했을 때,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이 시집을 펴들고 낭송한 시 한 편이다. 패터슨은 그 시의 주인공이 된 양 미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좋다는 표정을 지으며 낭독한다. 로라는 윌리엄스의 이 시 만큼 남편 패터슨의 시도 좋다고 한다.
 
영화 <패터슨(Paterson)>(2016)은 20세기 미국 시인 윌리암 카를로스 윌리엄스에 대한 짐 자무쉬(Jim Jarmusch)감독의 헌정 영화이다. 오전 일찍 같은 시간에 일어나서 혼자 시리얼을 먹고, 도시락을 들고 출근해서 정해진 노선을 따라 버스를 운행하고, 일과 후에 돌아와 아내와 저녁을 먹고, 애완견을 산책시키는 중에 동네 술집에서 맥주 한 잔 하고 돌아오는 매일의 일상을, 7일간 돌림노래 하듯이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떠오르는 궁금증 들, 예를 들면 배경을 왜 미국 뉴저지 주의 작은 도시 패터슨으로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주인공의 이름을 패터슨으로 했을까? 그리고 왜 하필 패터슨의 직업을 버스운전사로 했을까?  아내 로라에 대해서도 왜 백인이 아닌 유색인이며, 왜 컨트리 가수를 꿈꾸는지, 왜 집기와 옷에 색을 입히고 컵 케잌을 디자인하고 기타를 배우는 것으로 설정했을까? 등등에 대한 답은 모두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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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스의 시집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패터슨 시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일상에서 소재를 파악하고 그것을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 <패터슨> 5부작이다. 영화의 주인공 ‘패터슨’이 사는 도시 ‘패터슨’은 동명이며, 다시 한 번 윌리엄스의 시(시집) ‘패터슨’과 동명이다. 감독은 동일한 기표 ‘패터슨’을 갖는 사람, 도시, 그리고 시라는 세 가지 다른 실재에서 ‘일상’이라는 의미를 공유시켜 하나의 기호로 겹쳐 놓는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하지만 밋밋하게 버스를 운전하는 패터슨이라는 사람의 일상에 집중함으로써 다른 두 패터슨도 그 일상에 포함시켜 이 영화를 감상하거나 독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와 반대로 패터슨의 일상과 함께, 도시 패터슨으로 환유되는 거리와 폭포와 시민들의 풍경으로, 그리고 시집 패터슨의 저자인 윌리엄스의 시 정신과 삶으로, 즉 겹쳐진 기호를 펼쳐내는 방식의 독해도 가능하다. 후자의 독해는 ‘패터슨’의 이야기를 ‘패터슨들’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시켜준다.
 
영화는 월요일 아침 6시 10분 잠에서 깨는 패터슨에서 시작한다. 아침 식사를 하던 중 손에 잡힌 성냥갑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그는 걸어서 출근하는 길에 성냥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느낌과 생각을 머릿 속으로 읊조린다. 그리고는 버스 운행 전 운전대에 앉아있는 짬에 시로 적어 내려간다. 그러다가 배차요원이 와서 말을 걸면 글쓰기를 중단하고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 직장에서도, 식사 중에도, 언제든 짬이 나면 그는 공책을 펴고 시를 쓴다. 이러한 일상은 매일 반복된다. 어떤 시는 85행으로 이루어진 시 <패터슨>보다는 적지만 수십 줄의 행으로 이루어져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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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윌리엄스는 의사이기도 하다. 그는 대학병원에서 인턴생활을 하는 바쁜 중에도 틈이 날 때마다 시를 썼고, 의사가 된 후에는 진료 중에도 시간이 나면 짬짬이 시를 썼다고 한다. 주인공 패터슨은 버스운전기사이며 미발표 시인이다. 그의 책상 옆에 윌리엄스의 사진이 걸려있다는 것을 통해서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윌리엄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시문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윌리엄스는 운율을 엄격하게 따라야 하며 비유를 기본으로 장착하던 시작법의 전통을 거부했다. 과장된 관념보다 구체적 일상을 중시하며, 일상의 사물을, 혹은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관심을 관찰하여 구어를 가지고 시를 섰다. 패터슨의 시에 대한 생각은 형식과 소재, 주제에 있어서, 심지어는 생활하는 중에 시를 쓴다는 점까지도 윌리엄스의 그것과 닮았다. 어느 날 퇴근 길 버스터미널 옆에서 우연히 마주친 소녀 시인과 이야기하던 중에 나온 “운율 맞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의견에서도, 그리고 윌리엄스의 시 ‘다름이 아니라’를 들은 후 로라가 패터슨의 시도 그만큼 좋다고 한 말에서도 닮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패터슨 시에 거주하는 시민들을 마주치면서 그들의 실제 삶의 모습을 보고 경험할 수 있는 직업으로는 윌리엄스의 의사 직업 만큼이나 패터슨의 직업인 버스운전기사가 손색이 없다. 오히려 버스운전기사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짜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옆에서 들을 수 있기에, 청자를 고민하며 꾸며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닌 날것으로서의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버스운전사라는 설정은 영화 제작에 또 다른 장점을 갖는다. 별다른 플롯을 만들지 않아도, 별다른 인물을 설정하지 않아도 패터슨 시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살아가는 이야기는 버스 창을 통해 혹은 창에 비춰지는 도시의 경관과 함께 도시의 일상으로 패터슨의 귀에, 영화에 담긴다. 덧붙여 개를 산책시킨다는 설정 역시 사람들을 마주칠 기회를 부여한다. 산책 길에서든 버스 운행 중에서든 경험하는 도시의 일상은 시적이다. 실존 시인 윌리엄스 혹은 영화 속 시인 패터슨에게 그것은 시의 재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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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터슨의 아내 로라는 시인 윌리엄스의 또 다른 재능의 페르소나인 동시에 이루지 못한 꿈이기도 하다. 로라를 어떤 모습으로 표현할 것인가의 힌트는 파리에서 화가 수업을 받은 적이 있는 푸에르토리코인인 윌리엄스의 엄마에게서 가져왔다. 외모나 예술에 대한 열정에서 이란 출신 배우 골쉬프테 파라하니는 적합한 캐스팅이었다. 윌리엄스는 시인이 되기 전에 그림을 그리면서 예술가들과 교류했다. 말년에 한 잡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는 일을 계속 했더라면 시를 쓰는 일 만큼이나 만족스러웠을 것이라며 그림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영화 <패터슨>은 버스운전기사 패터슨을 통해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를, 그의 시에 대한 철학에 찬사를 보내는 영화이다.
 
염찬희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