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성폭력이다
사실 이 책을 보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괴로운 기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폭력 문제에서 우리는 모두 가해자이거나 피해자이거나 방관자이다. 단언컨대 정말 그러하다.
성폭력 사건을 겪은 적이 없으며 내 주변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당신이 하는 말과 행동이 성폭력 사건에 영향을 미친다. 가해자는 이미 알고 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조용히 묻힌다는 것을. 물론 피해자도 알고 있다. 그래서 고통스러운 침묵을 선택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가 모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가해자와 친하게 지내는 성폭력 피해자, 왜 그럴까?
이 책의 원제는 <그걸 강간이라고 말하지 않았다(I never called it rape)>이다. 사회는 물론 피해자조차 강간이라고 말하지 않는 어떤 것. 그러나 그것은 사실 한국어 제목대로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그것은 성폭력이다.
우리 사회가 ‘좋아하는’ 성폭력 상황은 대강 이런 것이다. 피해자는 어떤 호감도 성적 의도도 없이 우연히 가해자와 접촉하고, 가해자는 피해자를 항거불능 상태로 만들어 강간한다. 피해자는 끊임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 애처롭게 살아간다. 이 시나리오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이 바로 아동 성폭력이다. 완전무결하고 무력한 피해자, 극악무도한 괴물같은 가해자. 이럴 때 우리는 마음껏 가해자에게 사형을 내리라고 요구한다. 괴물을 제거해야 사회가 안전해지니까. 나는 괴물이 아니니까.
물론 아동은 사회적 약자로서 더욱 보호받아야 하며, 우리 사회는 아동성폭력에 대해서는 보다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같은 서사는 시나리오에 맞지 않는 평범한(?) 가해자와 피해자를 배제시켜버린다.
진실은 이렇다. 강간 또는 강간미수 피해를 입은 여성 84%는 가해자와 친분이 있다. 강간 피해자의 57%는 데이트 중에 발생했다.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호감을 느꼈고 같이 술도 마셨다. 심지어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와 친분을 유지하다가 다시 성폭력을 겪기도 했다. 피해자에게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훨씬 복잡하다. 가해자와의 관계가 사건을 복잡하게 꼬아버린다. 그래서 훨씬 고통스럽다. 그 사건을 ‘성폭력’으로 부른다면, 피해자는 가해자와 얽혀있는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뿐만 아니다. 시나리오에 맞지 않는 피해 상황은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섹스에 동의한 적은 없지만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해자를 믿은 것, 같이 술을 마신 것, 스킨십에 응한 것, “안 된다”고 더 세게 말하지 못한 것 등이 다 자신의 잘못인 것만 같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니까. 그래서 종종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성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차라리 ‘썸’이나 ‘데이트’, ‘섹스’로 생각하는 게 편하다. 그래야만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또 어떤 피해자는 마음을 쉽게 정하지 못해 오락가락한다. 이 과정에서 자책이 계속되고 상처도 깊어진다.이렇게 성폭력 피해자가 명백한 입장을 취하지 못하거나 일관성 없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결국 사회적 압력이 작용한 결과이다. 그러다가 피해자가 참지 못하고 공론화에 나서면, 그동안 자신이 보였던 태도가 문제가 된다. 사회는 이런 피해자를 “꽃뱀”이라고 부른다.
안희정 사건을 비롯한 최근의 여러 성폭력 사건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했던 방식이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꽃뱀 감별이 가해자들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렇다. “더 만져도 돼. 더 강간해도 돼.” 우리는 이렇게 강간문화를 만든다. 여기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진짜 성폭력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피해자가 하는 말이 모두 맞기 때문이 아니다. 피해자가 하는 말과 행동의 맥락을 이해해야 비로소 우리는 성폭력 문제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
정작 책 소개가 한참 늦었다. 이 책은 1988년 미국에서 발간된 책인데, 수천 명의 대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물이다. 그래서 2018년 한국과는 조금 상황과 맥락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프게도 대부분의 사례가 술술 읽힌다.
이 책을 읽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건들을 다시 떠올려보길 기대한다. 그 되새김의 시간이 우리 사회의 강간문화를 바꿀 것이다. 그래서 26년 뒤에는 이런 책이 팔리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글 권박효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