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사람도 아닙니다. 저는요, 광주에 오늘 처음 와 봤습니다. 어떻게 살면서 제가 광주에 이제야 올 수 있습니까. 광주에서 돌아가신 그 많은 분들의 이야기를 알고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는 게 정말 너무 죄송합니다. 오늘 민언련을 통해서 광주에 와서 그나마 사람 노릇하게 된 걸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광주 순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 마이크를 든 일흔아홉의 어르신이 흐느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모든 이들이 숙연해졌다. 예년처럼 회원들이 많이 가지도 않는데, 꼭 매년 광주를 가야 하나 싶었던 나는 부끄러웠다. 광주순례를, 회원 참여 행사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었다. 이 날이 강창수 회원을 보며 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첫 순간이다.
광주 순례가 끝나고 강창수 회원은 민언련 사무실에 방문해 몇 장의 ‘회원가입서’를 받아갔다. “다른 사람을 회원 가입시키는 거 쉬운 일 아니니, 너무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한마디를 얹었다. 그런데 얼마 뒤 강창수 회원은 회원가입서 세 장을 들고 돌아왔다. “이거 쉽지 않더라고요.”하면서 몇 장의 회원가입서를 다시 가져갔고, 또 얼마 뒤 회원가입서를 채워 왔고, 또 새 종이를 가져갔다. 민언련을 모르는 사람에게 민언련을 설명하고, 한번이 아닌 정기후원을 결심하게 하는 일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던 두 번째 순간이다. 그런데 이번 회원인터뷰를 통해 세 번째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마도 민언련 활동가로 있는 시간 동안, 강창수 회원과 나눈 이야기가 나를 다잡게 하는 힘이 되리라.
그의 삶에 한국 현대사가 있다
활동가도 받기 어려운 회원가입서를 몇 장이고 받아 온 비결이 궁금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첫 질문을 던졌다.
“참 어려워요.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사람을 만나서 ‘민언련이 정말 중요한 단체다, 회원들이 더 늘어나야 하니, 가입하자’ 해도 잘 써주질 않아요. 이곳저곳에 전화를 돌리기도 하죠. 어떤 때는 계좌번호 적는 거 있는 걸 보고, 돈 만원 나가는 것 때문에 부담돼서 못하겠다고 해요. 그러면 나도 ‘됐습니다. 미안합니다.’해요. 돈 때문에 가입하지 않는 사람도 많더라고요.”
‘돈 만 원’을 시작으로 강창수 회원이 살아온 고단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학교도 다닌 적이 없고, 공직에 있어 본 적이 없어, 내세울 것 없는 ‘맹탕 인생’이라던 그의 삶은 한국 현대사의 한 자락을 담고 있었다.
“저는 전라도 순천에서 태어났어요. 6.25가 났을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그 이후로 학교를 못 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나무하고, 풀하고, 땔감하고 하느라 학교를 더 못 다녔지요. 학교는 안다녔지만, 마음속에서 ‘언젠가는 내가 10년 공부를 한다. 대학교 이상 공부를 한다’는 생각만 갖고 있었죠.”
돌이켜보면, 집안 형편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는데, 학교를 보내달라고 조르지도 못하고, 그저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한 자신이 답답하기도 했다.
“언젠간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니, 직업이나 생활하는 건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농사를 하든 똥통을 푸든, 내가 공부만 한다면, 상대방이 나를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했었죠. 그런데 서른 살에 아무것도 모르고 서울에 와서 문구점도 하고, 안경점도 하고, 도장도 파고 그렇게 정신없이 살면서 젊은 시기를 보냈죠. 후회돼요. 서울에 와서 조금이라도 젊을 때 공부를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경기도 철산에서 살다가, 인천에 살다가, 지금은 포천에서 거주하고 있다.
“집값이 싼 곳을 찾아 계속 옮겨 다닌 거예요.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작게나마 일구어 온 걸 또 까먹고, 이제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이 살고 있어요.”
신문을 통해 마음에 새긴 민주주의와 정의
그러나 그런 삶 속에서도 늘 손에서 신문을 놓지 않았다고 했다.
“학교에서 공부는 못 했지만. 『중학강의록』을 봤어요. 강의록에 공민이라는 과목이 있어요. 거기에 ‘신문은 사회를 보는 눈이다. 사회를 보려면 신문을 봐야 한다.’라는 문장이 제 머릿속에 박혀버렸어요. 그래서 열네 살 때부터 동아일보 신문을 보기 시작했어요. 현재까지 신문을 끊어본 적이 없어요. 한겨레도 창립 때부터 독자예요.”
그러나 신문을 읽는 것도, 그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신문을 매일 매일 본 건 아니에요. 시골이었기 때문에 이틀, 사흘 걸려서 신문이 도착해요. 『사상계』를 보기도 했는데, 이건 한문으로 쓰여 있어요. 한문을 좀 읽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도 읽고 또 읽으면서 탄복했습니다. 지금은 왜 『사상계』 같은 잡지가 없을까 그게 제일 아쉽네요. 또 하나는 젊은 사람들이 신문을 안보는 게 안타까워요. 저는 신문을 본 덕인지, 시골 무지렁이지만 한 번도 ‘유신’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열네 살 때부터 손에 들고 있던 동아일보가, 사상계가, 한겨레가 그의 삶과 정신을 붙들었다.
“빨치산 투쟁했던 이현상이라는 사람 있죠.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한시도 조국을 걱정하지 않은 날이 없다.’ 나도 그래요. 내가 현장에 있지 않았지만, 내 안에는 정의로운 마음, 조국을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어요. 사적인 것은 어떻게 되든 별 관심이 없는데, 공적인 것은 그렇게 못해요. 문방구에서 물건을 팔 때도, 내가 보기에 완벽하지 않은 물건은 팔거나 권하질 못해요. 그냥 한쪽에 두고 말아요. 그래서 아내와 가정이 힘들었지요. 아이들 학교에 찾아가지도 않고, 봉투 한번 건네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래도 인사는 한번 했어야 했던 게 도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일흔 일곱, 현장에 처음 발을 들여놓다
강창수 회원의 마음속에만 맴돌던 ‘조국에 대한 걱정’이 비로소 밖으로 꺼내진 것은 2016년 겨울, 그의 나이 일흔 일곱이었다.
“광화문 촛불 때 한 번도 빠짐없이 나갔어요. 그러면서 나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확인했죠. 그 광장에서 여러 시민단체의 모습을 봤는데, 그 중 민언련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나 같은 무지렁이는 감히 시민운동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지요.”
여러 단체 중 민언련이 특별히 눈에 띈 이유가 있냐고 묻자, 언론이 바로서는 게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박정희를 만난 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독재를 했더라도,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미워하지 않아요. 그런데 그 사람은 일본인이 되려고 이름을 두 번이나 바꿨죠. 또 혈서까지 쓰며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더니 해방된 후 다시 ‘박정희’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죠. 그건 너무 비겁하잖아요. 대통령이 된 다음에 언론에 보도 된 사진을 유심히 봤는데 한 장도 편안한 상태로 찍은 게 없어요. 경직된 상태로 그렇게 전전긍긍하며 산 게 아닌가 싶어요. 한번은 순천에 수혜가 크게 났는데, 박정희가 순천을 방문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시내로 갔죠. 직접보고 싶어서. 제일 앞에 딱 걸어오는데, 그 사람은 자연스러운 그런 것이 전혀 없었어요. 그런데 자세히 보니 목 고개가 달달 떨리고 있어요. 심하게 긴장을 해서. 그걸 보고는 ‘저렇게 간이 작은 사람이 혁명을 했구나’하는 동정심도 생겼는데, 갑자기 면사무소랑 농협에 들어가더니 고작 하는 소리가 청소를 깨끗이 안 했다고 지적을 해요. 또 밖에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악수를 청하는데, 모든 사람에게 ‘댁에서도 농사를 짓고 계시지요. 보리농사가 잘 안 되었지요.’라는 말만 계속 반복하더라고요. 토씨하나 안 바뀌고요. 큰 그릇은 아니다 싶었어요. 그러니 정치를 할 때 그렇게 더 몰아쳤겠죠. 대통령을 할 수는 없는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니. 장준하 선생이 ‘대한민국 국민 99%가 대통령을 할 수 있어도 박정희만은 대통령을 해선 안 된다’고 했던 그 말이 딱 맞아요.”
그럼에도 박정희가 독재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 현재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언론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승만 정권이 유신 때보다는 나았어요. 그 때만 해도 신익희 선생이 후보로 나오지 않았습니까.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도 있었죠. 그런데 박정희가 어떻게 했습니까. 날카롭게 글을 쓰는 필진들을 와해시키고 장준하 선생을 탄압하지 않았습니까. 장준하 선생이 차압을 당하고, 끌려가고 그렇게 비참한 생활을 하다 의문사로 돌아가셨죠. 언론을 그렇게 죽여 놓으니 박정희가 정권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민언련 ‘전도사’가 된 이유
“가판대 세워 놓고 있는 이봉우 팀장을 만났는데, 너무 마음이 따뜻하게 보여요. 이 팀장이 썩 그렇게 잘난 인물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을 좋아하거든요. ‘저 사람이 진국이겠구나’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그리고 민언련 회원 행사 때마다 참석을 하려고 하는데, 행사가 너무 소박해요. 참석한 회원 개개인을 챙겨요. 높은 사람들 잔치로만 끝나지 않고 회원을 소중하게 여기고 이야기를 듣는 모습이 좋았습니다.”
많이 배우고,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 말고, 나 같은 ‘무지렁이’의 말을 듣는 곳은 민언련이 유일했다는 강창수 회원에 말에, 과연 내가 떳떳할 수 있는지 망설여졌다. 나는 과연 그런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을까. 이어 민언련 회원가입서를 들고 다니게 된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에 충무로 쪽에 지인과 술을 한잔했어요. 대부분은 우파분들입니다. 처음엔 아무 말도 안하고 입을 닫고 있는데, 박정희를 찬양하고 그러더라고요. 화가 나서 한두 마디 거들다가 술자리가 안 좋게 끝났어요. 전철 타고 집에 가는 데 절망이 느껴지더라고요. 길이 없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했는데, 문득 민언련이 떠오른 거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이미 하고 있는 곳이 민언련이잖아요. 그래서 ‘민언련이 잘 돼야 한다. 그러려면 회원이 받쳐줘야 하니, 나는 회원가입을 해보자.’하고 결심했어요. 다음날 곧장 민언련에 가서 회원가입서를 받아왔죠. 그런데 쉽지 않더라고요.”
스피노자주의자가 되기로 했다
그러나 생각보다 회원을 가입시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한 명을 가입시키기 위해 열 명도 넘는 사람들을 붙잡고 얘기해야 했고, 불편한 이야기를 들으며 또 다시 절망했다.
“안 되나 보다 절망하는 마음이 들었을 때, 스피노자가 떠올랐어요. 지구의 종말이 고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잖아요. 나는 스피노자주의자가 되자고 생각했어요. 내가 살아있는 시점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요. 내가 너무 마음을 급하게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 년 뒤라도 상관없다. 천 년 뒤에 내가 살아 있을 수는 없겠지만, 민언련의 정신이 끝까지 버텨준다면, 우리나라가 잘 살지 않겠습니까. 고구려 때, 고려 때부터 민언련 정신이 있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랬다면 지금 얼마나 행복한 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다시 사람들에게 회원가입을 권할 힘도 생겼고요. 스피노자가 날 살렸어요.”
천 년 뒤까지 남아 있을 민언련 ‘정신’을 위해 그는 오늘도 시민들을 만나 ‘언론이 바로서야 나라가 바로선다’며 민언련을 소개하고 있다. 활동가도 선뜻 내밀지 못하는 회원가입서가 그의 손엔 늘 들려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큰 것, 높은 사람, 큰 강을 주로 봐요. 실개천을 잘 보지 않죠. 아름드리 큰 나무가 있어도 영양은 잔뿌리에서 오거든요. 사람 몸에도 대동맥보다 모세혈관이 중요해요. 시민사회가 깨끗하고 맑아지면 국회의원을 뽑든, 장관을 뽑든. 옳은 사람을 뽑을 거예요. 그래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가 밀알이 되어서”
그런 생각을 갖고 모인 민언련 회원들이기에 강창수 회원에게는 민언련 회원들 한 명, 한 명이 너무 소중하다고 했다.
“민언련은 가장 선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구나 싶어요. 선한 사람은 돈이 없어도, 먹을 것이 없어도, 남을 먹이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고, 내 살이 찢어지더라도 내 몸을 던지려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요. 저는 민언련 회원들을 눈물겹도록 사랑하려고 해요. 보배니까요. 멀리 갈 곳도 없이 가장 가까운 곳에 나라의 보배가 있는 겁니다. ‘네가 있어서 나는 좋다’며 서로 사랑해줬으면 좋겠어요. 회원 행사에 와서 처음 본 사람이어도 회원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반갑게 인사하고 아껴주자고 꼭 말하고 싶어요.”
남은 삶의 두 가지 목표
강창수 회원은 창립 34주년 기념식에서 ‘모범회원상’을 받았다. 그의 상패에는 “무한한 관심과 사랑으로 민언련 활동을 격려”하고 “적극적으로 민언련을 홍보”했으며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주요 행사에 참여하여 귀감이 됐”다고 적혔다.
“정말 깜짝 놀랐어요. 나 같은 사람에게 상을 준다고 해서 부끄럽기도 하고, 또 너무 감사하고 영광입니다.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갖고 살려고 해요. 시민사회가 바로서는 건, 민언련이 바로 서는 것이라 생각하니, 민언련 회원을 계속 늘려가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는 게 첫 번째에요. 두 번째는 ‘물이귀기이천인(勿以貴己而賤人)하고 물이자대이멸소(勿以自大而蔑小)하고 물이시용이경적(勿以恃勇而輕敵)’이라는 말을 실천하며 살려 합니다. 자기를 귀하게 여기고 남을 천하게 여기지 말고, 자기를 크다 여기고 남을 작다 여기지 말며, 용맹을 믿고서 적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제 좌우명으로 새기려고요. 장관을 하고, 대통령을 해야 귀한 사람이 아닙니다. 길거리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도 귀한 사람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하는 실천은 지하철 자리 양보입니다. 집이 포천이다 보니 서울까지 나오려면 한참을 타고 나와야 합니다. 처음엔 앉아서 오다가 서 있는 사람이 생기면 앉으라고 자리를 양보해줘요. 그러다가 또 자리가 나면 앉고. 나만 다리 아프겠어요? 거기 서있는 사람도 다리 아프지 않겠습니까. 처음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고 오는 내내 내가 그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양보하다 보면, 긴 시간도 지루하지 않고, 서로 감사한 마음이 들고 서로의 힘듦이 나눠지지 않겠습니까. 힘든 사람을 쳐다만 보고 있을 일은 아니지요.”
나이에 대한 권위, 직위에 대한 권위가 넘치는 것을 작은 실천으로 바꿔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우리나라는 권위주의가 너무 발전했어요. 각 지방의 도지사들이 서울에 다들 도지사 사무실이 있어요. 화려하게 꾸며놨죠. 도지사가 바뀌면 그 공간에 집기들도 모두 바꾸고, 공간도 바꾼대요. 비단 도지사 사무실 뿐 아니라 ‘대우’라는 이름으로 보여주는 ‘꾸밈’에 돈과 신경을 많이 습니다. 스웨덴을 보면 장관이라고 해도 그렇게 방을 화려하게 해놓지 않는다고 해요. 우리나라는 전시행정과 보여주기식 꾸밈이 너무 많죠. 민주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소 바뀌고 있지만 공문원들도 문제가 많습니다. 권위주의 습성이 남아 있어서 대접 받길 좋아하고, 결국 그 과정에서 부정이 생기게 되죠. 지금도 여전한 문화를 바꿔나가는 것에도 시민의 힘이 필요하겠죠. 민언련처럼 제대로 하는 시민단체가 잘 돼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느 것 하나 흘려 들을 이야기가 없다. 민언련 회원행사에 참석해 반갑게 인사를 건네면, 누구에게라도 따뜻하고 깊은 울림을 전하는 강창수 회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강창수 회원을 통해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소중함, 언론을 감시하는 민언련의 가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한다. 그 가치에 맞는 활동가로 살고 있는지, 절로 숙여진 고개의 무게는 아마 쉽게 털어내지 못할 것 같다.
정리 유민지 운영팀장 /녹취 최영권 인턴 /사진 양지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