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오연호 기자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연배가 높지만, 난 그를 생각하면 ‘청춘’을 느낀다. 왜일까? 나에게 그는 <말>지가 젊어졌다는 느낌을 준 사람이다.
1988년부터 12년간 <말>지 기자로 살았다. 당시 그의 <말>지 기사는 기존의 것보다 쉽게 읽혔고, 재미있었다. 이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를 수강한 적이 있는데, 그는 가수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란 곡을 들려주며, 이런 마음으로 글을 쓰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의 글은 정말 그랬다. 연애편지 같았다. 써야 하기 때문에 쓴 글이 아니라 쓰고 싶은 맘이 넘쳐서 흘러나온 글 같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애정과 희망이 있었다.
1995년, 그는 <말>지 워싱턴 특파원이 되었다. <말>지가 그럴만한 여유가 없을 텐데 지가 웬일인가 했다. 오연호 기자 개인이 부담할 테니 ‘일단 한번 보내 달라’ 했다는 후일담을 듣고 그의 기발함과 패기에 눈물 나게 웃었다. 그렇게 세상에 없는 <말>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미국에 간 그는 '매체창간' 관련 공부를 했다고 한다.
2000년 그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오마이뉴스>를 만들었다. 진심으로 공감하는 슬로건이었고, 그의 실행력에 거듭 놀랐다. 다매체 환경 속에서 이전보다 영향력이 줄어들었지만, <오마이뉴스>가 우리 사회에서 갖는 존재감은 분명하다. <오마이뉴스>를 통해 많은 사람은 스스로 ‘기자’가 되었고, 자기 삶의 절절한 사연으로 세상과 소통했다.
2014년 그는 <우리도 행복할 수 있을까>라는 책을 내놨다. 그의 저술 활동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두 아이를 대안학교를 보내며 ‘위대한 평민으로 자라게 하는 그룬트비 교육’을 알고 있었다. 행복지수가 높은 복지국가 덴마크의 상황은 ‘상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갑자기 뒷북을 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충 알고 지나친 나와 그는 달랐다. 그는 덴마크가 왜 행복한지 집요하게 탐구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변화를 시도할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고민했다.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5년간 950여 회에 달하는 강연을 했다.
2016년에는 기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에 '꿈틀리 인생학교'를 세웠다. 중학교 졸업생들이 1년간 쉬었다 가며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는 학교이다.
지난 10월에는 덴마크로부터 상도 받았다. <2018 그룬트비 상>인데, 상을 주관하는 덴마크의 NGO 그룬트비 포럼은 “그동안 그룬트비상 수상자는 모두 8명이었는데 ‘비덴마크인’이 수상한 것은 오연호 대표가 처음”이라고 밝혔다. 그를 만나보자.
먼저 뭐라고 불러야하죠? 전 사실 전 아직도 ‘기자’라고 생각하는데, 많은 사람들은 ‘언론사 대표’라고 알고 있죠. 그런데 대학 1학년인 우리 딸은 대뜸 ‘작가’라고 하더라고요. 요즘 대안학교 이사장도 하시던데요. 뭐라고 불러드릴까요? 뭐가 제일 좋아요?
요즘 나는 ‘나를 뭐라고 불러주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말을 듣는 게 가장 좋아요.
내가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 책 처음에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재미로 산다.”고 썼거든요. 정말 지난 6년간 그 재미로 살았어요. 얼마 전 덴마크 ‘그룬트비 상’을 받았는데요. 거기서 ‘올해의 그룬트비 상 수상자 오연호는 작가이자, 언론인이며, 또 개척자이고 영감을 주는 사람입니다’라고 표현했더라고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여러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일을 하는 거예요. 원래 우리가 ‘왜 언론을 하려고 하냐’고 했을 때, ‘세상을 좋은 방향으로 바꿔보려고’ 한 것이잖아요. 그리고 언론 고유의 영역이라고 얘기하는 메시지 전달과 의제 설정 기능인데, 내가 지금 하는 일이 딱 그거니까요. 학교를 만들어 1년간 학생들과 다른 삶을 모색해보는 것. 사람들과 7박 9일간 덴마크 여행을 가는 것. 2시간 강연하는 것. 이것이 모두 1년, 7박 9일, 2시간의 메시지 전달과 의제설정이에요. 10분이면 읽을 기사와 시간이 다르고 형식만 다른 거죠. 결국 세상을 의미 있게 바꿔볼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의제를 설정하고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다고 봐요.
덴마크에 꽂힌 오연호 이야기
“내가 처음으로 덴마크 코펜하겐을 찾아간 것은 2013년 봄이었다. 그해 봄은 참 힘들었다. 새로운 봄은 찾아왔지만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은 정말 오지 않는 것일까? 유독 길었던 겨울, <그날이 오면>이라는 노래를 그토록 목 놓아 불렀던 이들은 새로운 봄 그 따스한 햇살을 마주하고도, 결국 오지 않은 그날에 절망해 고개 숙인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담고 살았다. 나도 그랬다. 우리가 노력하면 더 좋은 세상은 오는 것일까? 그렇게 되리라는 확신으로 살아온 인생이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철퇴를 맞으니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그렇게 주눅이 들다 보니 나보다 더 아파하는 옆 사람을 보고도 손을 내밀 수가 없었다. 나부터 추슬러야겠다. 그래서 덴마크를 찾아갔다.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하다는 그 사회에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날은 온다는 것을. 내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고, 옆 사람과 어깨동무하고 더불어 꿈꾸면 그런 세상이 온다는 것을. 그런 세상은 위로부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가능하다는 것을. 대통령도 정치인도 정치평론가도 아닌 우리가, 시민들이 그런 세상을 만들어내는 주역이라는 것을. 그런 세상이 오면 그 혜택은 나의 행복, 우리의 행복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 여는 글 중 |
신간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을 읽었는데, “그날이 오면”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오연호 대표가 기존의 정치적 색채를 분명히 하는 행보가 아니라 교육과 문화에 꽂힌 계기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고요.
2013년 대선에서 이명박 이후 박근혜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사람들이 모두 희망이 없다는 말을 많이 했어요. 처음엔 그 집단 우울증을 어떻게 치유할지 궁리했어요. 그동안 우린 민주화 과정을 거치며 이런저런 노력을 했잖아요. 정권도 바꿔봤고요. 저도 정치에 관심을 두고 <진보집권플랜>도 써봤죠. 그런데 정권이 바뀌어도 우리 민중들의 삶의 질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어요. 왜 그럴까요? 정권을 잡은 사람은 아무래도 ‘5년 플랜’을 자신의 임기 동안에 실적을 낼 정책 위주로 한다는 거죠. 하지만 우리 사회가 압축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낸 문제점들은 도저히 그 ‘5년 플랜’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숫자로 분명하게 입증되는 저출산. 이 핵심은 “다음 세대에 이 세상을 권하는 게 미안하다”는 것이거든요. ‘여야가 10년간 바뀌었지만 왜 이런 병리적 현상이 계속되고 있을까, 정권교체보다 더 중요한 게 있는 게 아닐까. 그게 삶의 질을 올리는 문제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언론인으로 살면서 이루고자 했던 목표도 정권 교체 그 자체는 아니었어요. 정권 교체 이후, 개인이나 공동체가 ‘그래 이 정도면 살만해.’ ‘후세에도 이런 사회를 권하고 싶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목표였죠. 그런데 정권 교체를 한 뒤에도 그게 안 된다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봐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새로운 의제 설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고. 그게‘ 덴마크 프로젝트’였던 거죠.
행복으로는 스웨덴, 교육으로는 핀란드도 좋다고 소문이 자자한데, 왜 덴마크로 갔어요?
처음엔 그냥 2013년 행복지수 1위가 덴마크여서 갔어요. 그런데 들여다보니 덴마크는 ‘행복 사회’를 만드는 흐름의 원조 격인 나라였어요. 특히 덴마크는 정치가 바꿔서 바뀐 나라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꿈틀대면서 시민이 바꾼 나라에요. 권위주의가 없는 나라죠. 수상 옆자리에 있어도 “네가 수상이냐. 나는 시민이다” 이런 식이죠. ‘매우 자유롭고 매우 평등’한데, 그 정도가 다른 나라보다 상당히 강하죠.
간혹 사람들이 ‘인구 550만 명의 작고 좁은 곳이니 가능한 얘기’라고 하는데요. 행복지수 1등을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가 돌아가면서 하거든요. 이 북유럽 국가의 약 3천만여 명이 사회민주주의, 다시 말해서 ‘한편으로는 자유롭고 한편으로 평등한’ 가치 체계에서 살고 있어요. 그 가치 체계의 핵심은 “나만 행복해선 안 되고 옆 사람도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것이고, 국민들이 여기에 동의한 거죠.
이게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엄청난 거예요. 우리도 ‘직업에 귀천이 없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말은 하죠. 그런데 그들은 그걸 현실로 구현했어요. 이 네 국가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취업도 가서 자유롭게 하고. 서로 좋은 점을 따라 하죠. 저는 이게 통일된 남북의 미래 비전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남북관계가 더 진전되면 할 이야기이지만요. 1단계는 긴장해소지만, 다음은 남북이 합쳐져서 만들 ‘사회체제’를 합의하는 것인데요. 저는 이때 모델이 될 수 있는 게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란 생각도 들어요.
신간 제목을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로 한 이유는 뭘까요? 그냥 1편과 운율을 맞춘 건가요?
‘우리도 사랑할 수 있을까’는 ‘우리도 실천할 수 있을까’의 다른 말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걸 실천하는 것. 그게 먼저 되어야만 스스로 주눅 들지 않고 옆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요. 덴마크랑 우리랑 ‘뭣이 중헌지’ 아는 것은 똑같은데요. 딱 하나가 달라요. 그걸 실천 하는가 아닌 가죠.
꼭 내 밭에 피지 않아도, 세상 여기저기에 핀 <오마이뉴스>의 씨가 자랑스럽다
요즘 오연호는 잘나가는데 <오마이뉴스>는 주춤한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덴마크 프로젝트를 하면서 느낀 건 ‘스스로 힘을 길러야 한다.’는 거예요. 어느 조직이든 ‘누구 없이는 안 된다.’라면 그건 문제가 있는 겁니다. 나는 지난 6년간 후배들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고 그들 스스로 해나가게 하는 과정을 거친 거예요. 지금 나는 언론 기관이 해야 하는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고, 우리 후배들이 편집과 기사 쓰기에 전념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고 있어요. 시간이 걸리지만, 자리를 잡아갈 것입니다. 모든 미디어는 변하게 되어 있어요. 성장기가 있으면 정체기도 있고, 부침이 있기 마련이죠. 가장 중요한 건 <오마이뉴스> 113명의 상근 직원(뉴스본부 76명)과 8만 명의 시민기자가 애초 <오마이뉴스>가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가라고 봅니다.
<오마이뉴스>의 가장 주요한 첫 번째 사명은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가치를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나 블로그 등이 모두 우리의 모토와 맥을 같이 하고 있잖아요. 내가 씨를 뿌렸는데, 그게 내 밭에서 잘 자라서 소득을 모두 내가 가지면 그걸 성공이라 말하죠. 하지만 내가 씨를 뿌렸는데, 그 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페이스북 밭에서 꽃이 피고, 트위터 밭에서 열매를 맺게 되었을 때. 그 결실에도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난 직원들에게 우리가 주장한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는 모토가, 세상에 충분히 많이 전파된 것에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자고 이야기해요.
<오마이뉴스>의 두 번째 사명은 언론 권력의 지형을 바꿔보겠다는 것이었죠. 보수가 너무 압도적이었습니다. 8대2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5대5 정도로 평평하게 만들어보는 것이죠. 각자의 셈법이 있죠. 진보 대 보수의 셈법으로 보면 이른바, ‘조중동’으로 대변되는 보수 권력이 지금 상당히 약해지고 있습니다. 기성언론과 대안언론의 셈법으로 보면 조중동의 영향력보다 도리어 대안 매체의 힘이 더 세다고도 볼 수 있어요. 그 어떤 셈법으로 봐도 우리가 애초에 추구했던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옛날에 <오마이뉴스>가 인터넷 공간에서 독점적으로 누렸던 의제 설정 능력이나 화제 생산 능력이 약해진 것 같아요. 그러나 영향력의 약해짐을 잣대로만 생각하지 말고, <오마이뉴스>가 본연의 역할을 지속해서 잘 수행하고 있는가를 봐야 합니다.
요즘 경영상황은 괜찮은가요? 광화문 시대를 열었는데 더 비용이 들지 않나요?
<오마이뉴스>가 2007년에 상암동에 갔다가, 최근 광화문과 서교동으로 분산되었는데요. 여기엔 다양한 포석이 있어요. 우선 취재기자들에게는 상암동이 너무 외지다는 지적이 계속 있었어요. 그래서 취재파트는 광화문 정부청사 뒤로 옮겼어요. 저를 포함한 사업파트는 서교동에 있어요. 덕분에 임대료를 1/2 이상으로 임대료를 줄였죠. 현재 우리 직원 규모는 창사 이후 최대인데, 일자리 창출에서는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지만 직원 수에 걸 맞는 수익 창출은 충분하지 못해서 늘 긴장을 하고 있어요.
시민기자의 정신은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성공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상근기자가 쓰는 전문성 있는 기사가 더 많이 나오면 좋겠다는 지적도 있어요. 그리고 시민기자가 공을 들여 전문기사를 보내기에는 원고료가 너무 적다는 의견도 있고요.
창간 당시 나는 시민기자와 상근기자가 반반 정도의 환상적 결합을 하자 생각했어요. 전문성 보완에 대한 이유라기보다는 당시 언론권력의 교체가 목표였거든요. 그래서 의제 설정 기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언론사는 그 맛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걸 상근기자가 맡아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오마이뉴스>는 상근기자가 주도적으로 색깔을 내며 의제 설정 기능을 강화하고 전문성을 높일 것인가, 시민기자의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것에 방점을 찍을 것인가. 이 두 비율을 두고 늘 고민하고 있어요. 그래서 가끔은 우리가 너무 산만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그게 <오마이뉴스>의 장점이자 단점인거죠. 그래도 내가 가장 기쁜 순간은 일면식도 없는 시민기자가 <오마이뉴스> 톱기사를 장식하고, 포털에서 좋은 기사라고 생각하고 읽다가 우리 시민기자가 쓴 기사임을 알았을 때에요. 실제 시민기자들이 직업 기자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굉장히 참신하고 과감한 기사를 쓰고 있어요.
원고료는 시민 기자가 파는 발품에 비해서 여전히 적을 겁니다. 하지만 <오마이뉴스>는 전 세계 시민에서 시민에게 원고료를 지불하는 유일한 미디어예요. 처음부터 많이는 못 드려도, 꼭 일정한 대가를 드리기로 했고요. 수차례 경영 위기에도 좋은 기사에 원고료 주기 시스템과 원칙을 지금까지 고수해온 거죠. 부족하지만 현재 경영 상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시민기자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사람이 있으세요.
너무 많아서요. 사실 유시민 작가도 우리 시민기자였고, 심상정 의원이나 노회찬 전 의원도 우리 시민기자였죠 그리고 선생님인데 특종상도 많이 받은 윤근혁 기자가 있고요. 4대강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취재해온 최병성, 김종술 시민기자도 있지요.
‘한경오 프레임’이라는 말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마이뉴스>가 ‘한경오 프레임’이라고 비판할 만큼 우리가 커 보인다면 우리도 그 비판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독자들과 굉장히 밀접한 매체이기 때문에 독자가 어떤 비판을 해도 그 안에 진정성, 그 비판의 진정성을 새겨 들을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해요. 비판을 통해 성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겨레>, <오마이뉴스>의 근간에 <말>과 민언련이 있었음을
민언련 이야기 좀 해주세요. 우리는 오연호를 우리 <말>지 기자이니, 민언련의 ‘셀럽’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데요. 민언련에 대한 추억이나 해주고 싶은 이야기 있으세요?
난 <말>지 기자인데, 민언련은 <말>지의 소유주, 아니 민언련이 곧 <말>지였죠. 그러니 정말 한 식구처럼 지냈죠. ‘오연호의 기자만들기’도 처음에 민언련에서 시작했다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학교’로 발전한 거죠. <말>지는 폐간되었지만, 민언련은 ‘살아 남아서’ 지금도 이렇게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건데요. 한 시민단체가 시대가 변하는데도 이렇게 자생력을 갖추고 활동하는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고생한 수많은 실무자들에게 감사드리고 존경을 표해요.
그런데, 모든 기관이나 매체는 자기 시대에 사명이 있고 그 시대가 지나면 사라지거든요. 사람도 수명이 있고. 나무도 수명이 있고. 매체도 수명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사상계>도 없어지고 <말>지도 없어진 거죠. 그게 순리에요. 그런데 이런 매체의 죽음이 그냥 죽는 게 아니에요. 죽어서 거름자리를 만들죠. <말>지가 죽어서 <한겨레>가 나왔고 <오마이뉴스>가 나왔잖아요. 그리고 또 이 두 매체 출신들이 지금 여기저기에서 또 다른 걸 만들어내고 있어요. 나는 이 모든 게 진화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요. 그 근간과 뿌리에 민언련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 민언련 식구들이 충분히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한다고 하는데요. 늘 앞에 닥친 일과 급한 일에 매몰되면서 놓치는 게 많아요. 민언련에게 아쉬운 것, 했으면 좋겠다 싶은 아이디어를 주세요.
민언련이 초기부터 지속해온 기성 언론을 감시하는 건 계속해나가야 해요. 그런데 민언련이 군소 매체들, 개인 매체들, 지역 매체들, 이렇게 다른 곳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는 매체들을 주목했으면 좋겠어요. 민언련이 매달 주는 좋은 보도상을 보면, 대체로 JTBC, 한겨레 이래요. ‘민언련’이라면 딴 데서 주목 안 하는 매체를 발굴해주어야 한다고 봐요. 그러려면 발품을 팔아야 해요. 지역도 많이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의 리그를 새롭게 키워주면 좋겠어요.
저희가 마침 ‘올해의 좋은보도상’에 그런 분야를 신설해서 수상을 해요. 그런데 저희가 <대안 미디어> 부문이라고 지었는데, 이게 기존 ‘대안 언론’와 너무 비슷해서 사실은 정명은 아니에요. 이 부문을 뭐라고 이름 붙여야 좋을지 애매하더라고요.
내가 생각한 표현은 ‘실핏줄 언론’이에요. 내가 SNS 소통을 이야기하면서 쓴 표현인데요. 개인 미디어. 조그마한 미디어도 있어야 하죠. 이런 큰 강줄기 같은, 동맥 같은 미디어도 있지만, 사실은 실핏줄이 있으니까 동맥도 가능한 거잖아요. 기존 미디어들이야 기자협회상, 피디협회상도 있지만, 실핏줄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주목받기가 힘들어요. 그들을 위한 상을 주면 좋겠어요.
그리고 기존 미디어도 바뀌어야겠지만 젊은 사람들이 새 미디어를 창조해야 해요. 그걸 어떻게 지원할건지 고민하고요. 젊은 사람들이 기존 언론사에 들어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언론사도 만들고, 내가 어떤 언론을 만들고 싶은가 그 꿈을 세우고, 실현할 수 있게 돕는 그런 교육도 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또 저희가 마침 그런 취지에서 ‘민언련 참언론 아카데미’를 다시 열었어요. 이게 저널리즘 스쿨이긴 하지만, 꼭 기존 언론사에 취업할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언론인이 될 건가. 어떤 언론을 만들 건가 고민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저는 기자 지망생들에게 기자가 되는 것에 방점을 찍을 게 아니라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인가를 고민하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이런 고민을 거친 뒤, ‘나는 기자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이 나와야죠. 기존 언론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언론이 천직인 사람도 있지만 언론을 왜 하는가를 생각해봐야죠. 내가 하는 행위가 어느 정도 의미가 있는가를 되돌아보고요.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나는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가. 그 작은 실천이 나에게는 무엇이 되고 있는가. 끊임없이 이 속에서 하지 않으면 사회인들에게, 독자들에게 외면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 자리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간다. 그리 억지로 애쓰는 것 같지도 않고 즐기는 것 같아 보인다. 그야말로 ‘사부작거리며’ 계속 꿈틀대고 있다. 이제 그는 물리적 나이로는 완연한 중년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오연호는 나에게 늘 ‘패기 있는 멋진 청년’으로 기억될 것 같다.
글 김언경 사무처장, 녹취 최영권 인턴, 사진 이병국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