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고 길었습니다. 해가 갈수록 여름이 더 더워지고 길어진다고 합니다. 더울 때는 여름 무더위가 전혀 물러날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날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청명한 가을이 와있더군요. 아, 이제 가을이구나 싶었는데 엊그제 첫눈이 내렸습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지, 언제 이렇게 많은 세월이 흘렀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문득 돌아본 민언련도 그렇습니다. 6천여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니!
지난 3월에 민언련 이사가 되었습니다. 지난 1997년부터 2002년 초까지 상근 활동가로 일하면서 이사회 회의록을 준비하고, 이사회 참석 여부를 확인하곤 했었죠. 20년 가까이 지나니 이제 이사회에 참석하는 회원이 되었네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그 시간을 오르내리며 민언련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회비를 내는 민언련 회원들이 백여명 수준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회비내는 회원들이 6천여 명이라고 합니다. 상근활동가들도 열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만큼 일궈온 사무처 활동가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이런 변화는 단순히 세월이 흘러서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지금의 민언련이 있기까지 참 많은 분들의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숱한 어려움과 고충을 겪으면서 여기까지 이끌어 온 분들이 계셨습니다.
해직기자 선생님들과 뜻있는 많은 전현직 언론인들 그리고 언론개혁을 이뤄내겠다는 시민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열성적인 활동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저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백합니다. 마음은 여전히 뜨거운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사회에 참석하게는 되었지만 제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사직을 수락하게 된 명분도 사실은 회의에만 열심히 참석하면 된다는 얕은 책임감 정도였습니다. 민언련 이사가 되었어도 일년 동안 민언련을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참 부끄럽습니다.
지난 6월, 민언련 이사가 되었다며 ‘한겨레’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해서 ‘통일한국시대, 남북화해시대 언론의 역할’에 대해 몇 마디 의견을 냈던 정도가 그나마 민언련 이사로서 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주에 <날자꾸나 민언련> ‘여는 글’ 원고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원고 청탁을 거절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이 요청이라도 기꺼이 받아야 그나마 민언련 이사로서 면피라도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원고를 쓰겠다고 했습니다. 어떤 주제로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난 일주일 내내 고민에 빠졌습니다. 백지 상태의 모니터 화면을 보고 좀처럼 타이핑을 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마감일도 어긴 채 그야말로 ‘마감만 하자’는 생각만으로 원고를 쓰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여전히 갈피를 못잡겠습니다. 주제도 없고 방향도 없고 뭘 열어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이 ‘여는 글’이랍시고 붙잡고 있습니다.
그래도 글은 써내려가진 못했지만 그 시간 내내 민언련에 대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민언련 활동을 하면서 만났던 수많은 분들의 얼굴을 떠올렸습니다. 말과 글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많은 현장과 장면들도 반복해서 떠올렸습니다.
민언련은 젊음을 바친 신명나는 일터였습니다. 지난 1994년 언론학교 10기를 수강하고 그해 10월에 민언련 노래패 ‘언제나 플랫 가끔 샵’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신문모니터분과, 방송모니터분과, 영화분과, 산악회, VJ분과, 사진분과 등 여러 방면에서 시민회원들의 자발적인 회원활동이 왕성했던 때였습니다. 집회나 행사를 하면 시민회원들이 적잖은 자리를 채웠던 시절이었습니다. 언론운동이 왜 시민언론운동이어야 하는지 확연히 정의되었던 때였습니다.
올해 있었던 남북정상회담과 지난 6월12일 북미정상회담을 보면서 시민언론운동의 중요성을 새삼 느꼈습니다. 남북화해시대, 남북통일시대를 위해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들 합니다. 우리 민족에게 정말 큰 기회가 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북한에 대해 외눈박이 보도를 했던 과거의 언론들이 여전히 미래 한반도 운명을 바꿀 중대한 사안에 대해 나몰라라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묘하고 지속적인 훼방논조를 감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서 언론계 안팎의 적폐청산을 이끌어 낼 동력은 여전히 ‘시민언론운동’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민언련 활동가가 된 계기는 <언론학교>를 수강하면서 부터였습니다. 민언련 노래패 ‘언제나 플렛 가끔 샵’ 활동을 하게 된 것도, 지금 ‘평화의나무합창단’을 하고 있는 것도, ‘김시창닷컴’을 운영하며 중고차 사업을 하고 있는 것도 모두 <언론학교>를 들으면서 비롯된 일들입니다. <언론학교>는 ‘언론’만을 다루는 강좌가 아니었습니다. 사회과학 서적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우리 사회가 처한 생생한 현실과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수강생들은 시민언론운동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눈만 뜨면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던 그때, 그 많은 일들을 동료 활동가들과 시민회원들이 서로 어울려서 즐겁고 행복하게 일했었습니다. 그 즐겁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어 준 것이 민언련이었고 <언론학교>였습니다.
민언련이 남북평화시대, 통일한국시대를 이끌어 낼 언론의 능동적인 역할을 더 과감하게 추동해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아울러 시민언론운동의 저변을 확대하고 지속적인 역량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언론학교>또한 다양한 영역에서 재시도되고 유지되었으면 합니다.
12월호에 실리는 ‘여는 글’이다보니 내년에 민언련을 위해 세 가지를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담아봅니다. 하나, 내년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사무처 상근활동가들에게 맛있는 밥 한 번 대접하겠습니다. 둘, 민언련 집회나 행사에 최소한 한 번 이상 참석하겠습니다. 셋, 예전에 함께 활동했던 시민회원분들 몇 분이라도 전화로 안부 인사를 나누겠습니다.
회원 여러분, 어줍잖은 다짐으로 글을 가늠하며 사무처에 전화 한 번씩 하시자는 마음 전합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응원합니다.” 이런 인사 일 년에 한 번씩은 어떠실까요?
작지만 구체적인 ‘여는 마음’으로 올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는 더 건강하고 더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글 김시창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