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호] [영화이야기] 로버트 레드포드 <미스터 스마일>
등록 2019.05.03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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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스마일

사십 대를 지나는 동안 오래도록 떠나지 않은 감정이 있다.

'왠지 나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길 거 같단 불안감'이다. 정체가 명확하지 않아 실제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별거 아닌 일을 떨쳐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또는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을 붙들고 있다. 남에게 말 꺼내기도 민망하다. 한 친구에게 털어놨다가 '중2병'과 다를 바 없단 얘길 듣고,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고 후회했다.

며칠을 꼭 쥔 채로 진을 다 빼놓곤 '괜찮아질 거야' 자위한다.

정동길이나 청계천을 천천히 걸으면 조금 낫다. 관객이 드문 극장에 앉아 영화를 보면 더 낫다.

TV에서 봤던 몽골 초원을 종일 걸으면 묵은 잡념, 살찐 근심을 공중에 죄다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떠난다고 해결할 거였으면 난 이미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 세상 끝 등대에 있을 거다.

인간 마음은 우주보다 넓어 경계 너머 또 너머에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다. 영원히 모를 수도 닿지 못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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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스마일 / 감독: 데이빗 로워리》는 올해 84세 로버트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원제목은 《The Old Man and the Gun》, '노인과 총' 또는 '총을 든 노인' 인데, 한국 개봉 제목 《미스터 스마일》은 직관적으로 주인공 캐릭터를 표현했다. 내가 로버트였다면 원제를 고집했을 텐데.

영화는 1980년 한 해 동안 미국 은행 60여 곳에서 강도행각을 벌였던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 강도질은 훨씬 오래전부터 진행했는데, 1980년은 최대 전성기였다.

체포 당시 78세, 그간 수십 번 구속돼 수감생활 하던 중 무려 18번 탈옥을 성공한 인물이다.

그는 은행강도로서 단 한 번도 사람을 폭행하거나 총을 쏜 적 없다. 젠틀하고 인자한 미소를 놓지 않던 그에게 교도관들은 '은혜로웠다' 회고했다.

영화에서 노인 은행강도 포레스트 터커(로버트 레드포드)는 은행털이를 삶에 활력을 주는 여가이자 일상으로 여겼다. 계획하고 실행하는 내내 포레스트는 행복했다.

영화에서 포레스트는 도로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이 싹튼 쥬얼(씨씨 스페이식)에게 '16회 탈옥 리스트'를 건넨다. 스크린에 주인공 포레스트가 어렸을 때부터 불과 몇 년 전 시도한 탈옥까지, 숨 가쁜 순간이 하이라이트로 펼쳐진다. 감독은 컴퓨터 그래픽을 쓰지 않고 젊은 시절 로버트 사진과 영상을 활용해 머그샷을 만들었다. 가장 눈부셨던 장면은 로버트 1966년 데뷔작 《체이스 / 감독: 아서 펜, 주연: 말론 브랜도, 제인 폰더》중 한 클립이다. 서른 한 살 로버트는 잘생기고 멋있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02.jpg

* 주요 주연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1969), 《추억》(1973), 《스팅》(1973), 《콘돌》(1975), 《내츄럴》(1984), 《아웃 오브 아프리카》(1985), 《은밀한 유혹》(1993), 《업클로즈 앤 퍼스널》(1996), 《올 이즈 로스트》(2013)

*주요 연출 영화

《보통 사람들》(1980), 《흐르는 강물처럼》(1992), 《퀴즈쇼》(1994), 《호스 위스퍼러》(1998), 《로스트 라이언즈》(2007)

1986년 11월 영화 개봉(12월 20일)을 앞두고 《Out of Africa / 감독: 시드니 폴락》수입배급사에서는 한글 제목을 공모했다. 조간신문 하단 영화 광고란에 뜬 공고. 며칠을 고민하고 관제엽서에 제목을 적어 보냈다.

당시 중3이었던 내 응모작은 《아프리카의 사랑》이었다. 얼마 후 공모 발표에서 기대는 물거품이 됐다. 최종 제목은 영어를 한국어로 옮긴 《아웃 오브 아프리카》. '사랑과 슬픔의 여로'를 당선작으로 뽑았는데, 실제론 부제로만 썼다. 단 한 번도 이 제목을 생각지 않았기 때문에 아쉬움은 짧았다.

을지로 3가 <명보극장> 한 곳에서만 1986년 12월 20일부터 87년 3월 6일까지, 관객 24만 명을 모았다.

뭐니 뭐니 해도 레드포드는 1969년 작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 감독: 조지 로이힐》에서 '부치 캐시디(폴 뉴먼)'와 콤비를 이룬 '더 선댄스 키드' 역이 으뜸이다. 로버트를 주축으로 1985년 영화 속 이름을 따서 [선댄스 영화제 Sundance Film Festival]을 설립했다.

“자유롭게 사고하며 인디 영화들을 장려 육성한다.”를 슬로건으로 매년 1월 미국 서부 유타주에서 열린다. 2004년 《송환 / 감독: 김동원》이 월드시네마 다큐멘터리 부문 '표현의 자유상'을 2013년 《지슬 / 감독: 오멸》이 월드시네마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지금은 사라진(정확히 '주인이 바뀐') 홍대 LP바 <브라스> 한쪽 벽에 《내일을 향해 쏴라》 대형 포스터가 있었다. 단체석이라 자주 앉진 못했는데 어쩌다 포스터 아래 있으면 기분이 훨씬 나았다.

코드 네임 콘돌.jpg

영화 연출과 제작에도 기량을 발휘한 로버트.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송어 낚싯줄을 던지는 폴(브래드 피트)는 젊은 로버트 레드포드보다 더 그 같았다. 로버트와 브래드는 2001년 토니 스콧이 연출한 《스파이 게임》에서 CIA 선후배 요원으로 호흡했다. 둘 중 누가 더 근사하냐고 묻는다면? "저는 로버트 레드포드요."

1990년 1월, 나는 전기 학력고사에서 낙방하고 재수를 할까 후기 고사를 볼까 고민했다.

초등학교 친구 청우가 연락했다. 녀석은 대학 따윈 관심도 없었다. 자유롭게 떠돌았다.

"우리 영화 보러 갈래?"

그때 호암아트홀에서 봤던 영화가 로버트 레드포드 주연《코드 네임 콘돌 Three Days of The Condor》이었다. 1975년 시드니 폴락 감독이 연출한 영화를 한국에선 15년 후 개봉했다.

아직 술을 마시지 못해 영화를 보고 패스트푸드점에 가서 감자튀김과 밀크셰이크를 먹었다.

청우는 기운 빠진 나를 자기 스타일대로 위로했다.

"야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어떻게든 되겠지."

빤하게 웃던 녀석 얼굴이 선명하다.

김현식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