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초록도 투쟁의 색깔_<랩걸>
드디어 봄이다. 길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거리에는 봄 노래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봄의 주인공은 식물들이다. 가뭇가뭇하던 초록이 어느새 도시 곳곳을 점령하고, 며칠 전까지 하얀 점이었던 봉오리가 활짝 피어나면 나는 문득 깨닫는다. “아, 진짜 봄이구나.”
그렇다고 큰 감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봄은 그저 기온의 변화이다. 식물과도 친하지 않다. 몇 번 식물을 길러보려 했지만 늘 실패했다. 죽은 줄 알고 버리려던 식물을 식물성애자 동료가 집어가서 살려낸 적도 있다. 그 뒤로 식물과 친하려는 시도를 중단했다.
이 책 <랩걸>도 식물에 대한 책인 줄 모르고 집어 들었다. 환경운동을 하는 친구가 추천해줬는데도 제목 때문에 그저 여성에 대한 책이라고만 생각한 것이다. (막연하게 여성 래퍼가 등장하지 않을까 추측했다.) 다행이다. 주제를 정확히 알았다면 이 책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목숨을 건 도전, 연대를 통한 승리… 나무 이야기 맞아?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맞춘 것은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식물을 연구하는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의 이야기다.그는 자신과 식물의 삶을 나란히 보여준다. 처음 과학자가 됐을 때는 씨앗 이야기를 하고, 남편과 만났을 때는 꽃 이야기를 하는 식이다. 두 이야기가 어찌나 서로 잘 붙는지 사람과 식물이 서로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 ‘식물’에 대해서 갖고 있던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미지도 깨진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식물들의 삶이 얼마나 역동적인지 알게 되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씨앗들은 뿌리를 내릴 유일한 기회-온도와 수분, 빛의 적절한 조합-를 묵묵히 기다린다. 한 연꽃 씨앗은 무려 2000년을 기다렸다. 왕조들이 흥하고 망하는 동안 그저 한번의 기회를 기다린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모든 우거진 나무의 시작은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은 씨앗들이었다”고.
그리고 씨앗이 마침내 첫 뿌리를 내리는 순간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거는 단 한번의 도전이다. 일단 뿌리를 뻗은 식물들은 그 자리에서 길게는 수백 년 동안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뿌리를 내리면서 씨앗은 품고 있던 마지막 양분을 모두 소진시킨다. 다시 도전할 기회는 없다.무사히 뿌리를 내려 나무로 자라난 뒤에도 식물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다이나믹하다. 책에는 이런 사례가 무진장 많은데, 그 중에서도 내가 가장 놀라웠던 것은 나무들의 전쟁 이야기였다.
텐트나방 애벌레는 잔혹한 전사들이라서 무자비하게 숲을 파괴한다. 그러나 나무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지 않는다. 공격에서 살아남은 나무들은 애벌레에게 유독한 화학성분을 이파리에 추가했다. 애벌레들은 시름시름 앓았고 성장도 느려졌다.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2킬로미터 떨어진 숲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같은 방어에 나선 것이다. 이 나무들은 애벌레의 공격을 한번도 받지 않았지만, 뿌리를 통해 위험 신호를 주고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애벌레들은 점점 죽어갔다. 나무들이 이겼다. 연대를 통해서 말이다.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식물들에게 동질감과 경이감이 느껴진다. 식물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혹은 나보다 더 열심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나는 조금 더 식물들이 좋아졌다.
봄 소풍에 딱 한 권 책을 가져간다면
사실 이 책이 꼭 식물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절반은 여성 과학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 부분에 더 꽂힐 수도 있을 것 같다.호프 자런은 성공한 과학자이지만 여전히 연구비를 걱정해야 한다. 게다가 심각한 조울증에 시달리는데, 약을 복용할 수 없던 임신 이야기는 처절할 정도다. 여성 과학자에 대한 성차별도 겪는다. “지금 네가 절대 진짜 너일 리 없다는 말을 끊임없이 듣고, 그 경험이 축적되어 나를 짓무르는 짐이 되는 것이 바로 성차별”이라고 그는 썼다. 그러면서도 그는 어떻게든 버티고 한발 나아간다.
무엇보다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자런은 문학 전공으로 대학 생활을 시작했다가 결국 과학으로 옮겨갔는데, 덕분에 이 책은 문학적인 구성과 과학적인 정보를 모두 가지고 있다. 누가 읽어도 내가 그랬듯이 한번에 죽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쫄깃하고 문장은 담백하다.
되도록 따뜻한 봄날 초록초록한 잔디밭에서 읽어보길 권한다. 책을 읽다가 문득 주변을 둘러보면 풀과 나무들이 좀 전과는 다르게 보일 것이다. 함께 소풍간 사람과 함께 책 이야기를 나누거나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읽어줘도 좋겠다. 봄소풍에 이보다 잘 어울릴 만한 책은 잘 없다.
글 권박효원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