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호] [영화이야기]<어벤져스>와 <기생충>에 가려진 숨겨진 띵작을 소개합니다 : <배심원들>
등록 2019.07.0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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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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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치 않은 계기로 배심원 자격을 얻게 된 권남우(박형식)는 판사에게 법의 존재 이유를 질문 받는다. 한참을 생각하던 권남우는 “잘못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법이 필요하다”고 대답한다. 질문을 던진 16년 베테랑 판사 김준겸(문소리)은“법은 사람을 처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처벌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라고 말한다.

 

 

 

 

‘법대로 해'가 판을 치며, 조그만 실수와 다툼도 소송으로 귀결되는 세상에서 영화는 8명의 배심원들의 평범한 시선을 통해 사건을 재구성한다. 아쉽게도 <어벤져스>의 능력도 <기생충>의 권위도 존재하지 않아 흥행하지 못했지만, <배심원들>의 주인공들은 그들이 가지지 못한 ‘선함’과 ‘용기’를 통해 묻힐 뻔한 진실을 발굴해낸다. <배심원들>의 감독 홍승완은 청년 창업가, 주부, 무직자, 대기업 비서실장, 법대생, 취준생, 요양보호사, 무명배우, 쫓겨난 시신세척사 까지 법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 함께 모아, 배심원 제도가 처음 시작된 2008년으로 시계를 돌린다.

 

 

겉으로 드러난 피고인의 모습은 생계를 책임진 어머니를 잔인하게 죽인 패륜아다. 평소 입과 행동이 거칠고, 생활고로 인해 임대아파트에 살던 피고인은 어머니와 다툼이 잦았다. 사건 당일 어머니를 내리 찍은 망치가 사건 이후 증거로 채택되었다. 어머니를 창밖으로 밀어 낸 그의 모습을 본 목격자도 존재했다. 얼굴에는 화상자국이 있고, 손가락이 없어 일은커녕 세상에 대한 원망만 커져갔을 수 있는 상태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범죄를 시인했다.

 

 

정황, 증거, 증인, 자백까지 유죄라는 결론이 뻔히 보이는 사건에서 배심원들의 역할은 허수아비처럼 단순해야 했다. 애초에 법원장(권해효)는 이런 사건에 배심원을 할당해 큰 사고 없이 ‘대한민국 최초의 배심원 재판’이라는 멋진 그림을 만들려 했다. 재판이 시작되자 피고인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진술을 번복하지만 한번 ‘유죄’로 정해진 분위기 속에서 그 누구도 그의 범죄 사실을 부정하려 하지 않는다. 불의에 굴복하지 않을 것 같은 베테랑 판사 김준겸은 물론, 배심원들과 그들을 바라보는 관객들까지 말이다. 이렇게 감독은 조용히 배심원석의 한자리를 비워 두고 그 자리에 관객을 앉혀 판단의 주체로 만든다. 법에 관한 영화지만 영화는 치열한 법정공방 대신 피의자의 유죄를 배심원과 관객들에게 설득하는 구조로 진행된다.

 

 

첫 번째 공판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피고인의 유죄에 표를 던진다. 대세가 정해진 상황에서 사고의 방향은 쉽게 틀어지지 않는다. 다만 영화 내내 신중했던 8번 배심원 권남우만은 쉽게 판단을 확정하지 않는다. 상황을 종료하고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나머지 배심원들은 권남우의 판단을 재촉한다. 분위기상 권남우는 피고인의 무죄를 항변해야 할 것 같지만, 그는 뜬금없이 ‘싫어요’라는 답변을 내놓는다. 엉뚱한 대답에 벙벙해진 다른 배심원들은 비효율과 무지, 그리고 감성으로 그를 치부한다. 그러나 그는 꿋꿋하게 주체적 선택 과정 없이 정해진 결과에 편승하는 일상적 행태에 동승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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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우의 ‘용기’는 배심원들을 무지한 대중으로 취급한 법 권력에 향한 것이 아니다. 한번 정해진 다수의 방향성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사회와 조직에서 한번 정해진 대세가 폭력처럼 작동해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그 위력에 ‘싫어요’라고 답한 것이다. 특히 타인의 인생에 개입하는 중요한 법정에서 100% 확신 없이, 가능성만을 가지고 피고인의 유죄를 확증하는 우를 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1%의 의심으로 시작해 배심원 권남우는 다시금 피고인의 시선에서 사건을 재구성하려 한다.

 

 

그를 범인으로 몰았던 증거들은 편의적이고 합리적으로 선별된 증거들이었다. 법이라는 권력에 숨어 보이지 않았을 뿐이다. 사회적 약자(피고인)는 다수의 위력 속에서 쉽게 소외된다. 법조인들은 그냥 넘겼지만, 배심원들은 어머니와 피고인이 함께 살았던 사건 현장에 방문한다. 목격자가 바라보았던 장소에서 사건을 재구성해 보고, 피고인의 입장에서 상황을 재검토한다. 법 권력은 그들의 합리적 의심을 이성이 아닌 감성으로, 지식이 아닌 무지로, 효율이 아닌 비효율로 치부한다. 그러나 그들은 판결의 무게감에 짓눌러 우왕좌왕하는 오합지졸이 아닌, 정말 제대로 자신의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려는 사회의 작은 영웅들이다.

 

 

판사의 최종 판결문에는 피고인의 유죄와 25년의 양형이 적혀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목격자의 목격 가능성이 현장에서 확인되자 배심원들 역시 그 결정에 동의한다. 그래도 배심원들은 마지막까지 피고인의 살인이 고의가 아닌 우발적 범행가능성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힌트를 얻어 어머니의 자살 가능성을 발견해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한다. 하지만 담당판사 김준겸는 양형을 줄인다고 해서 마음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며 자리를 떠난다. 배심원의 결정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이다. 판결은 판사가 하는 것이고, 그것이 진실이라 통용된다.

 

 

마지막 판결을 앞두고 판결문을 읽는 판사 김준겸. 이번에 망설이는 쪽은 권남우가 아닌 그녀다. 유죄인정과 양형만 읽으면 되는 마지막 상황에서, 그녀는 판결문 아래 있는 자신의 오래된 노트를 바라본다.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 1992.02.27.’ 잘못된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서 아니라, 법은 처벌하지 않기 위해서 존재하는 최소한의 기준이라는 영화 처음의 가르침을 그녀는 용기있게 선택한다. 피고인 강두식 무죄.

 

 

법전에서는 피고인의 입장에서 무죄 가능성을 생각하라 가르치지만 피고인의 입장에서 사건을 재구성은 한 사람은 법을 배우지 않은 배심원들이었다. 그 가르침을 판사에게 다시 깨우쳐준 것도 배심원들이었다. 언제부터 용서와 포용보다는 잘못을 처벌하고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법정을 빌리지 않았던가. 우리의 삶을, 편의를 위해 법이라는 권위 혹은 또 다른 권위에 대리하지 않았었나.

 

글 이재홍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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