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_회원 인터뷰| 최안진경 회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제까지 늘 그래왔듯이
등록 2018.07.12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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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병이 찾아온다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민언련을 비롯해 민우회, 평화는 만드는 여성회 등에서 누구보다 활발하게,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이에게 찾아온 파킨슨병. 그러나 병과 함께 하는 삶이 이전보다 불편하고 만만치 않지만 그 역시 받아들여야 할 또 다른 삶의 방식일 뿐, 중요한 것은 내 삶을 대하는 태도라는 걸 보여주고 있는 최안진경 전 업무감사. 그가 민언련이 이달에 만난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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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경, 최안진경, 진경, 진, 그 이름의 역사

김경실 : 최안진경이란 이름, 아주 일찍부터 쓰셨죠. 제 주변에서 저보다 선배로선 거의 처음 쓰신 것 같아요.

진경 : 네. ‘최안’이라는 성을 쓰기 시작하니까 엄마가 제일 좋아하셨었죠.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은 ‘엄마, 내 이름은 어떻게 되는 거야?’ 하면서 고민스럽게 물어본 기억도 있는데(웃음) 요즘엔 잘 안 써요.

김경실 : 왜요?

진경 : 너무 길어서. 요즘엔 그냥 ‘진경’. ‘최안’은 빼버려요. 길면 기억하기 힘들잖아요, 그래서 짧게.

김경실 : 그래서 성은 다 떼어버리고 그냥 진경?

진경 : 그래요. 영어로는 그냥 진. 서양 사람들은 ‘경’자 발음을 못하더라고요.

김경실 : 최안진경이라는 이름을 쓸 때는 성과 자기정체성에 의미를 붙인 거였을 텐데, 이제는 나를 지칭하는 데 성이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 이런 느낌인가요?

진경 : 그렇죠.

김경실 : 이름을 기억하고 발음하기 쉽게 짧고 가볍게 하셨네요. 참 자유롭고 진보적인 성격이 이름에 그대로 드러나는 것 같아요. 민언련 활동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신 거죠?

진경 : 제가 민우회 활동을 열심히 했어요. 민우회는 NGO 중에선 저한테 최고의 친정이에요. 든든한 친정, 빽. 창립 초기부터 활동했는데 그때 장연희 선생님(고 성유보 선생님 부인)을 비롯해서 동아투위 사모님들 여러분 함께 활동했어요. 그분들을 통해서 민언련을 알게 됐어요.

김경실 : 선배님이 민우회에서 열성적으로 활동하신 건 민언련 사람들은 다들 잘 알죠.

진경 : 저는 대학에서도 여성학을 배워보지 않은 세대예요. 정규과목에 없었어요. 그냥 문화인류학 할 때 살짝 언급만 하고 지나가는 정도였죠.

김경실 : 여성문제는 많이들 느끼면서도 적극적으로 나서기는 오히려 쉽지 않잖아요. 이 사회가 원래 그렇지, 하고 체념하고 넘어가기가 더 쉬웠죠.

진경 : 그렇죠, 맞아요. 그런데 89년도에 임수경 씨 방북 사건이 있었어요. 그때 저는 저걸 만약에 남학생이 했더라면, 그랬어도 저렇게까지 난리가 났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여자가 남쪽 대학생 대표로 갔다 왔기 때문에 더 난리인 것 같았어요.

김경실 : 더 문제가 커졌다, 더 문제시했다?

진경 : 그런 면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화제성 면에서. 물론 여학생이어서 보안검색이 느슨할 수 있기 때문에 선발돼서 갔다 올 수도 있었겠지만, 임수경 씨가 참 안돼 보였어요. 이제 히스토리 말고 허스토리를 써야지만 역사의 진보가 있겠다는 그런 생각도 했고요. 또 그 무렵에 보게 된 제 손아랫동서가 ‘형님이 아들을 먼저 낳으셨기 때문에 제가 참 마음이 가볍다.’ 그런 소리를 해서 ‘저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그건 여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저런 생각을 다 하는구나. 참 이상하다.’ 그런 생각을 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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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언련에서 배운 것으로 꽃을 피웠다

김경실 : 민언련에서 VJ 교육을 받으셨죠.

진경 : 네. VJ 교육 끝나고 바로 연이어서 1인 제작 교실도 했어요. MBC에서도 그런 비슷한 교육이 있었는데 내용을 비교해봐도 민언련이 훨씬 낫고, 또 기왕 교육비를 들일 바에는 제가 MBC같이 잘나가는 데다 돈을 낼 필요가 없잖아요.

김경실 : 하하하, 그렇죠! 그때는 민언련에 VJ분과가 있기도 했죠.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진경 : 그럼요. 지금 마포 FM 하고 있는 송덕호, 유현정, 영화판으로 간 이연정 또 SBS 신범숙 작가, 다들 VJ분과에서 아주 열심히 했어요.

김경실 : 연정 씨는 지금 영화판에서 아주 뛰어난 편집기사로 인정받고 있어요. 마포 FM도 송덕호 씨가 잘 운영하고 있고요.
 
진경 : 그럼요. 제가 민언련에서 배운 내용을 통해 가장 큰 기여한 건 사실 ‘평화를 만드는 여성회’에 가서예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계속 남북 여성들 모임이 있었어요, 그걸 제가 다 영상으로 기록했잖아요. 묘향산, 평양. 다 갔죠. 개성도 가고. 그때 가장 제가 민언련에서 배운 것을 꽃피웠다고 생각해요.

김경실 : 아, 정말 그랬겠네요. 그때 북한 여성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어떠셨어요, 느낌이?

진경 : 다 여맹의 간부들이니까 뭐, 겉모습도 아주 정말 깨끗하고…

김경실 : 원활하게 대화가 잘 되는 편이었어요?

진경 : 저는 영상을 찍느라 대화를 많이 나눌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어요. 어떨 땐 인원이 회의하는 모습을 뒤쪽에 카메라 하나 세워 놓고 전체를 다 찍고, 하나는 제가 돌아다니면서 찍어서 다시 편집해서 넣고 그랬었어요(웃음).

김경실 : 그때는 남북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이었죠.

진경 : 2003,4년부터 시작해서 2008년까지는 굉장히 관계가 좋았어요. 금강산을 몇 번 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예요. 접촉이 많았으니까. 한번은 금강산에 가서 저녁을 먹고 소위 뒤풀이를 하는데. 남쪽 남자들이 북쪽 안내원들한테 그렇게 지분거리는 거예요. 아우~ 정말, 그래서 우리 대표님이 그 남자들을 얼마나 혼내주셨는지! 그 남자들 다 쫓아낸 다음에 남북 여성들끼리 피아노 치고 춤추고 놀았어요(웃음). 근데 북쪽 안내원 여성들은 혹시 자기들한테 불이익이 올까 싶어서 굉장히 안절부절못하더라고요. 그것도 좀 보기에 가슴이 아프고 그랬어요.

김경실 : 지금은 안 그럴 텐데, 남자분들이. 안 그렇겠죠?(웃음) 교육이 많이 돼서, 사회적으로.

진경 : 안 그래야죠. 제가 민언련이 좋아진 이유 중 또 하나가 ‘38 세계 여성대회’를 하면 민언련이 항상 같이, 기치를 들고 같이 움직인 거예요.
 
‘내가 걷는다는 것’을 돌아보게 하는 파킨슨병

김경실 : 민언련에서 12회(2001_2012)까지 개최했던 퍼블릭 액세스에 세 번 출품했는데 2003년도에는 ‘평화를 부르다’, 2004년도에는 ‘오라, 생활정치’, 2008년도에 ‘인간과 차, 함께 가야하는 길’이에요. 다루는 주제가 큰 담론에서 뭔가 점점 더 작고 구체적으로 갔구나 싶었어요. 생활 범위가 바뀌어서 그런 건가요, 아니면 찍다 보니 뭔가 더 구체적이고 실생활과 더 가까운 주제에 관심을 끌게 된 건가요?

진경 : 네, 그 말씀이 맞아요. 요즘은 전체적인 트렌드가 ‘소확행’으로 가는 것 같아요. 무슨 굉장한 타이틀을 달아서 멋있는 게 아니고, 아주 작은 일에도 행복을 느끼면 그게 최고라는. 가치가 좀 달라지고 있는 거죠. (휴대폰 벨소리 울림) 알람이에요. 약 먹으라고.

김경실 : 아아. 알람을 해놓고 약 드시는 시간을 맞추시는구나...... 지금은 카메라를 들고 뭘 하기가 어려우신 거죠.

진경 : 힘들어요. 손도 떨리고.

김경실 : 파킨슨병 발병은 언제였나요?

진경 : 2006년.

김경실 : 그래도 발병하신 이후에 2008년에서 2014년까지는 민언련 업무감사를 하셨잖아요.

진경 : 아이고~ 그건 뭐 정말 이름만 걸어놓은 정도였어요.(웃음) ‘저밖에 할 사람이 없나요?’ 그랬더니 그렇다고 해서. 믿을 수 없는 말이지만 하겠다고 했죠.

김경실 :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을 피하지 않으시니까...... 파킨슨병의 자각증상이 어떻게 나타나나요?

진경 : 다리를 끌고 손도 좀 떨리고. 통증이 심한 사람도 있어요. 개인에 따라 증상의 편차가 많아요. 상상도 못했던 일이죠.

김경실 : 그런데 진단 받고 나서 치료법이나 이런 걸 열심히, 해외까지 가서 적극적으로 찾아보시고 했던 게 기억나요.

진경 : 거기에도 역시 비디오가 들어갑니다(웃음). 왜냐면 제가 발병하고 나서 바로 인터넷 웹을 연결해보니까, 당시에 우리나라 사이트에 자료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한글로 된 자료는. 겨우 나오는 게 영어로 된 미국과 영국 자료들이 좀 있더라고요. 쭉 살펴보다 보니까 환자들이 돈을 모아서 연구소 차리고, 연구원을 초빙해서 거기서 연구를 한다는 거예요. 발상이 뒤집어져 있는 거죠. 우리는 어떻게 나랏돈으로 치료제를 개발하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환자들이 기금 모으기를 굉장히 문화적으로 하고 있는 거예요. 파킨슨병 환자인 영화배우 마이클 제이 폭스가 연구소에 와서 연설도 하고.

김경실 : 환자들이 직접 기부를 받아서 민간연구소를 만드는 거네요.

진경 : 그렇죠. 그 두 번째 모임을 스코틀랜드에서 하는데, 비디오 컴퍼티션이 있는 거예요. 이 병에 관련해 3분 이내로 영상으로 표현을 해서 보내는 거야, ‘야, 이건 나보고 오란 소리 같다’ 했죠.(일동 웃음) 우리집에서 연대 뒤쪽으로 가다 보면 조그마한 호수가 있는데, 제가 거길 매일 갔어요. 매일 내 모습을 관찰하고, 일기처럼 찍고 편집해서 내 스토리를 만들었죠. 영어를 잘하는 친구가 내레이션을 맡아주고. 그렇게 해서 보냈더니 개최국인 영국인을 1등 주고, 절 2등 줬어요.

김경실 : 대단하시네요! 직접 촬영하셨어요, 아니면 촬영은 다른 분이?

진경 : 촬영은 제가 했어요. 내 모습은 거의 드러내지 않고..... 파킨슨병은 움직임에 관련된 병증이 많아요. 걸음이 잘 안 걸릴 때가 참 많고. 그래서 내가 걸어가는 내 발자국을 찍는다든지 하는 식으로...... 지금도 유튜브에 있으니 찾아서 보셔도 돼요.

김경실 : 아아. 유튜브. 작품 제목이 어떻게 돼요?

진경 : <온 마이 워킹(On My Walking)>, 나의 걷는 것에 대하여. 거기 그런 말이 나와요. 연못 근처에 사는 개구리라든지, 비둘기라든지 그런 동물들이 돌아갈 곳은 결국 자연인데 나 역시 돌아갈 존재이고, 내가 걷는 걸음마다 높은 신이 함께하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가 만약 그 전에 ‘오라, 생활정치’라든지, ‘평화를 부르다’를 만들지 않았으면 그런 작품이 나올 수가 없는 거죠.
 
투병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것

김경실 : 말씀을 들어보면 선배님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지금 내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뭔가를 찾고, 또 그게 눈에 보이면 바로 실행하고. 참 인생을 적극적으로 사시는 것 같아요. 그렇게 살기가 어렵거든요. 뭔가 보여도 실행하는 데는 소극적으로 되고, 그게 가능할까 싶어서 쉽게 물러나고, 움직이기 귀찮아하고. 그런 자기 스스로 실망해서 주저앉고, 특히 제가 그래요(웃음). 그런데 투병을 하면서도 다시 삶의 방향을 찾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진경 : 네, 제가 그래요. 그래서 이번에 또 큰일을 하나 했잖아요. 제가 집에서 연대 세브란스 병원까지 걸어서 다니는데 중간에 플래카드를 봤어요. 연세 사회봉사상을 준다고 받을 분을 추천하라는 거예요. 그게 자꾸 눈에 보이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저희 파킨슨병협회 초대 회장님이신 김영동 명예회장님이 떠오르는 거예요. 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요건을 보니 연대 동문이거나 학부형, 교직원, 이렇게 돼 있어요. 마침 회장님 아들이 연대 출신이에요. 나중에 알고 보니 회장님도 행정대학원을 다닌 동문이시더라고요. 됐다 싶어서 제가 막 혼자 준비를 했어요.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하고 세브란스 병원 제 주치의 선생님께 추천을 부탁드렸어요. 회장님이 파킨슨병 관련 책을 세 권 내셨는데 제 주치의 선생님이 감수를 해주셨었거든요. 추천된 분이 써서 내야 하는 것도 있는데, 89세인 회장님이 컴퓨터로 쳐서 내는 것보다 손글씨로 써서 내는 게 좋겠다 싶어서 필체가 굵직굵직하고 좋은 우리 엄마한테 부탁해서, 프린트한 내용을 손으로 다시 썼어요.

김경실 : 하하, 친정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진경 : 네. 그렇게 해서 냈더니 접수 받으시는 분도 잘 되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나서 기다리고 기다렸지. (약간 짬을 둔 뒤) 대상 받았지 뭐야.

김경실 : 대상요? 아하하하.

진경 : 상을 받으면서 명예회장님이 정말 생애에 마지막 공적인 활동하신 것 같아요. 제가 받는 것보다 훨씬 더 기뻤어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분한테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 돈을 몇 푼 갖다드릴 수는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김경실 : 89세시면, 요즘 백세시대이긴 하지만, 병을 앓고 계시는데 굉장히 잘 관리를 하고 계신 거네요.
진경 : 그럼요. (목소리 떨림) 그분이 마지막 세 번째 책에 와서야, 자기가 스스로 파킨슨병을 용납할 수 있게 됐다고, 같이 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다는 고백을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내가 마지막까지 여러분에게 굉장히 귀찮게 하고 가서 너무 미안하지만, 내 남은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으로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겠다. 이 책 세 권이 내가 먼저 가더라도 남아서 후배들이 이용하지 않겠나, 그것만큼 더 나에게 명예로운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냐, 고맙다, 사랑한다. 그게 세 번째 책의 마지막 후기였어요. 제가 사실 그걸 읽으면서 이 분을 그냥 그대로 보내드릴 순 없겠다 생각했거든요. (눈물..) 그리고 그런 일들이, 긍정적으로 보이는 일들이 자꾸 일어나고 생기는 게 저한테 굉장히 도움이 돼요. 투병 생활에서 제일 중요한 게 자기 정신을 놓지 않는 것이거든요. ‘아이, 그냥 될 대로 되라지,’ 하면 쉬울 것 같죠? 그것만큼 미친 짓이 없어요.

김경실 : 병을 앓고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물리적으로 제한되는 거잖아요. 그 제한을 뚫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삶의 의미나 기쁨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걸 누구보다 잘 하고 계시기 때문에 책은 선배님이 쓰셔야 할 것 같은데.(웃음)

진경 : 한다면 저는 사진집 같은 걸 하고 싶어요. 3년에 한 번씩 협회 회의가 있어요. 2010년에 영국, 2013년엔 캐나다 다녀오고, 2016년도엔 아들 결혼식 때문에 못 갔는데, 2019년도에는 교토에서 해요. 거기 가고 싶은 이유가 그때 만난 친구들이 제게 굉장히 많은 인스퍼레이션을 줬거든요. 그 친구들은 얼마나 긍정적인지, 초긍정적이요. 그 친구들하고는 이미 책을 한 권 냈어요.

김경실 : 아, 그래요? 국제적인 친구들끼리 교류?

진경 : 그래요. 크리에이티브 콜렉터스 그런 게 있어요. 저는 거기 감히 해당도 안 되지만, 코리안이 워낙 귀하다보니 (일동 웃음) 붙여줘서 참여하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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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언련 회원으로서, 파킨슨병협회 회원으로서 한 큰 일

김경실 : 민언련 30주년 기념 회원 인터뷰 동상을 보니까 환우회 라디오 스튜디오에서 하셨던데요.

진경 : 미디어 중요성은 민언련에서 익히 배웠기 때문에요. 환우단체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미디어 하나를 갖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에요. 대부분 단체에서 소식지를 내는데, 소식지는 만듦과 동시에 구 소식지가 돼버려요. 그래서 그건 말하자면 후원자를 위한 것이고 제일 좋은 건 역시 방송인 것 같아요. 물론 기록이 남느냐, 안 남느냐 차이는 있겠지만.

김경실 : 소식지는 이미 내고 있었고, 라디오는 선배님이 만드신 거군요.

진경 : 그랬는데 지금은 운영상의 문제로 쉬고 있어요. 할 때도 참 힘들게 했거든요. 거기에 광고를 넣을 수도 없고 해서. 그래도 많이들 도와주셔서 진행했었는데..... 지금은 성우 한 분이 환우가 되셔서 이 일에 투입이 됐는데, 뭔가 더 나은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김경실 : 언론에 보면 의료 관련 보도들이 나오잖아요. 환자나 가족들은 그런 뉴스들을 관심 있게 볼 것 같은데 의료 관련 보도들의 문제점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지 않나요.

진경 : 문제점들 있긴 하죠. 왜냐면 파킨슨병 전문의가 많지 않거든요. 그래서 엉터리 같은 지식을 가지고, 파킨슨병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하는 의사들이 있죠. 한 번은 어떤 의사가 10년이면 환자들이 죽는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었어요.

김경실 : 아, 발병하고 10년 뒤면?

진경 : 우리 협회를 보면 20년, 30년 된 분들도 계시거든요. 그런 얘길 들었을 때 환자들의 반응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말을 하는 거죠.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얘기하는 분은 거의 없어요. 이제 이 병에 대해 많이 알려져서.

김경실 : 2015년에 민언련에 SBS에 드라마 <기분 좋은 날>을 좋은 드라마로 추천해 주셨죠. 환우회에서.
진경 : 그랬어요. 파킨슨병 환자가 주인공으로 나오기가 쉽지 않은데 그 드라마에서 나문희 씨가 파킨슨 병으로 나왔거든요. 병에 대해서 비교적 잘 그리고 있고 가족들이 힘을 합해서 간병을 하는 내용이었어요. 드라마가 끝나고 그 해가 가기 전 12월에 뭔가 했어야 했는데 못 했어요. 그러다 마침 김언경 처장을 NGO 신년 모임에서 만났길래, 지난 12월에 끝난 <기분 좋은 날>이 좋은 드라마여서 환우회에서 민언련에 어필을 해서 뭔가 해주고 싶었는데 어쩌다 그냥 지나가 버렸다고 했더니, 김 처장이 원래 송년회 못 했으면 신년회 하는 거고, 아직 1월 초라 음력으로 아직 해가 안 넘어갔으니까 할 수 있다고 해서(웃음) 추천을 했죠.

김경실 : 그렇다고 그냥 상을 준 건 아니고, 그 드라마를 방송분과에서 다시 모니터하는 과정을 거쳐서 좋은 드라마로 선정을 했고, 환우회와 공동으로 홍성창 PD와 문희정 작가에게 시상을 했더라고요. 드라마에 대한 모니터 보고서도 제대로 써서 올렸고요. 저는 그 얘길 소식지를 통해 알게 됐는데, 환우들이 하는 활동이 폭넓고 적극적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냥 ‘우리 환자들의 상황을 잘 그린 드라마야’ 하고 지나가지 않고 그 드라마를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격려했으니 PD나 작가에게도 힘이 됐을 거예요. 드라마에서 그린 인물들이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지, 어떤 감정과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거니까 제가 보기에도 좋은 활동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선배님이 미디어의 역할에 민감한 민언련 회원이라 가능했겠죠.

진경 : 제가 좀 주책인 게 좀 많아요.(일동 웃음) 그때 상으로 트로피를 절대 시들지 않는 꽃으로 드렸어요.
김경실 : 절대 시들지 않는 꽃?

진경 : 하얀 선이 테두리에 둘려진 빨간 튤립이 우리 협회를 상징하는 꽃인데, 네덜란드 화훼업자가 개발한 품종이에요. 그런데 그분이 파킨슨병 앓게 되면서 그 꽃을 닥터 파킨슨한테 바쳤죠. 저희가 그 꽃을 퀼트로 만들어서 그걸 꽃다발 겸, 트로피로 드렸어요. 영원히 마르지 않는 꽃이니까.(웃음) 제가 시상식 때 드라마를 좀 요약한 동영상을 가져갔어요. 파킨슨병 증상에 대해 나문희 씨가 특히 잘 표현해줬거든요. 진짜 우리 환자가 봐도 저렇게까지 자세한 내용은 알기 위해 작가가 굉장히 많이 취재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시상식 때 PD한테 질문도 막 하고 그랬죠. 생각해보니 민언련하고 정말 큰일 했네요. 진짜. 아까 얘기한 명예회장님 연세 사회봉사상 받은 내용을 오마이뉴스에 보냈는데 기자가 취재차 왔다 갔어요. 곧 기사화 될 거예요.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찾아서 계속 할 거예요. 
 
인터뷰 김경실 미디어위원 · 사진 이병국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