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공동체를 설립하고 보리출판사 대표로서 <보리 국어사전>을 펴낸 윤구병 선생이 우리말에 관한 책을 펴냈다. 천년의상상 출판사에서 나온 《내 생애 첫 우리말》.
2011년 5월부터 12월까지 윤구병 선생은 <우리글말 바로 쓰기 강좌>를 열어 예닐곱 사람과 우리말을 공부했는데 그때 주고받던 말들을 정리하고 내용을 더 보태 책으로 묶었다. 윤구병 선생이 한 말투 그대로 실어 선생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다.
우리말로 다시 해석하면 다르게 읽히는 우리 신화
윤구병 선생은 이 책에서 우리 신화를 순수한 우리말로 풀어놓는다. 오누이의 엄마가 마을 잔치 일을 거들다가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일을 마치고 떡을 얻어 집에 돌아가다가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하는 호랑이한테 결국은 잡아먹힌다는 이야기. <해와 달이 된 오누이>라는 우리가 알던 신화를 뿌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윤구병 선생은, 그 신화에 나오는 ‘호랑虎狼’이라는 말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에 생긴 ‘신화’이니 호랑이가 아니라 ‘범’이라는 우리말로 해석한다. 그리고 중세 기록에 범을 밤이라고 쓴 사례를 들면서 범을 (깜깜한) 밤으로 바꿔 해석한다.
“호랑이라고 하고 이야기를 풀어 가면 잔혹하기만 해. 팔 떼고 다리 떼고 마지막에는 흔적도 없이 잡아먹어버리잖아. 그런데 그걸 밤이라고 하면 전혀 달라져. 해석의 여지가 훨씬 더 늘어나고.”
오누이 엄마는 범한테 떡을 빼앗기면서 목숨을 잃는 게 아니라 깜깜한 밤에 집으로 오다가 길을 잃고 넘어지면서 떡을 땅에 떨어뜨려 하나씩 하나씩 잃는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오누이는 등잔불을 켜 놓고 엄마를 기다리다가 기름이 떨어져 깜깜한 밤이 방안으로 들어오면서 나무 위로 올라가는데 그 나무는 목숨을 살리는 생명수를 상징한다. 또 하늘에서 내려오는 동아줄도 삶으로 이어주는 생명줄이다. 오누이는 그 생명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해와 달이 된다. 해와 달은 어둠을 물리치고 이것과 저것을 가려 볼 수 있게 한다. 윤구병 선생은 그 신화는 호랑이가 엄마를 잡아먹는 잔혹한 신화가 아니라 해와 달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가를 이야기하는 신화라고 말한다.
“전 세계 신화를 보면 대체로 달의 신은 여신이고 해의 신은 남신이다. 모계사회의 신화를 부계사회의 신화가 완전히 뒤집어서 중요한 신은 다 남신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해와 달이 된 오누이>에서는 오히려 해의 신이 여신이고 달의 신이 남신이다. 이런 점에서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모계사회의 전통이 또렷이 남아 있는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윤구병 선생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박혁거세의 신화도 다르게 해석한다. ‘박혁거세’를 ‘불거내’라고도 했는데, 이 불거내에서 ‘거내’가 함경도 말에 있는 ‘간나’에서 온 말로 박혁거세가 여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또 신라의 3대 왕인 유리 이사금에서 ‘유리’는 ‘누리’, 곧 땅에서 나온 말로 유리 이사금도 남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이사금은 ‘ㅏ’자가 탈락하면서 ‘잇검’이 되고 ‘검’이 금으로 바뀌어, ‘잇’의 ㅅ이 ㅁ자로 바뀌어서 ‘임금’으로 바뀐 것이다. 이렇게 여자 중심이었던 세상이 뒤에 남자 중심의 세계로 바뀌었기 때문에 단군왕검부터 남자로 보는 역사가 계속되는데, 우리말의 뿌리를 찾아서 우리말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민중의 말을 되찾아 하는 이유, 민주 세상을 되찾기 위해
이 책은 신화뿐만이 아니라 역사와 문화, 철학도 우리말을 중심으로 풀어 놓는다. 윤 선생은 특히 인문학에서 우리말이 거의 보이지 않고 영미나 유럽의 말을 그대로 옮기거나 일본식 한자말투성이라고 비판한다. 땅은 대지로, 풀밭은 초원으로, 배움은 학습으로, 얼개는 구조로, 이야기는 담론으로 바뀌었다. 이런 말은 힘센 사람들의 말이고 먹물들의 말에 불과하다.
“문명화된 힘센 사람들이 들여온 더 힘센 말이 대대로 애써 가꾸고 지켜왔던 알아듣기 쉽고, 듣기 좋고, 자연과 가까운 우리말을 더럽혀왔고, 그 뒤로도 말이 아니라 글을 앞세우는, 머리만 키운 사람들이 여기저기 밖에서 끌어들인 온갖 되지 않은 말들이 우리 귀를 막고 눈멀게 만들었어.”
윤 선생이 우리말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민주 세상을 되찾기 위해서다.
“우리말을 되찾고자 하는 것은 맑은 핏줄을 지키자는 뜻에서 나온 게 아니야. 배달겨레, 단일민족 그런 거 아니거든. 어린아이들도 알아듣고 학교 못 간 노인네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고, 우스갯소리도 나눌 수 있는 쉬운 우리말을 찾아야 민주 세상에 가까워지지.”
이 책은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게 읽힌다. 가끔 윤 선생과 마주앉아 막걸리 한 잔 먹으면서 ‘썰’ 푸는 걸 들을 때가 가끔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이 들었다. 윤 선생을 아직 못 만나신 분들, 상에 막걸리나 맥주 한잔 올려놓고 책을 읽어 보시기를.
- [2017/05/22] 질문하지 않으면 대통령은 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