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2023)_
언론·미디어 제도 전면적 개혁 논의를 시작하자채영길(한국외국어대학교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 11월 22일 개봉한 영화 <서울의봄> 한 장면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의미를 잃어가는 말들
사회를 지탱해 오던 모든 공적 언어들이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다. 모두를 위한 표현의 자유가 보수와 극우에 동조하는 이들만 전유하는 차별적 자유로, 취재와 알권리는 검찰을 비롯한 사법권력의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 결정되는 특권이 되었고, 공평하고 정의로워야 할 공정한 보도는 권력의 이익과 이념에 부역하는 편파적 보도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취재와 보도에서의 윤리적이라는 언어마저도 기득권을 보호하고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정치적 교설에 가까운 뜻으로 읽히기 시작하였다. 자유와 권리, 공정, 윤리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용기와 헌신적인 실천 속에서 빛을 발하는 대신 권력에 있거나 기생하거나 부역하는 이들의 이해를 반영하면서 본래 의미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 공적인 언어들은 적과 아군을 구분하기 위한 방편이자 적대를 위한 수단이며 비판적 언론과 기자들을 배제하고 처벌하기 위한 전략적 기호로 타락해버린 것이다.
그 사회의 언어는 해당 사회 권력의 성향을 투영한다. 서울의 봄을 압살하며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 공적인 언어들이 마초적인 군사적 폭력성을 반영하고 있었다면, 윤석열 검찰정권에서는 교활하게 자의적으로 사법체계를 유린하는 폭력성이 공적인 가치들을 전복시키며 그 본래 의미를 잃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일까, 윤석열 대통령은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국회에서 의결된 방송3법 개정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아무런 사유를 덧붙이지 않았다. 그들도 이제 그 언어들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함을 인정하고 그래서 이제는 그런 언어의 사용도 무용함을 인식한 것일 게다.
▲ 11월 20일 민주노총이 개최한 ‘노조법 2.3조, 방송법 쟁취를 위한 민주노총 총파업·총력투쟁대회’ 모습 ©오마이뉴스
원초적이고 급진적인 퇴행성
방송 공공성도 예외가 아니다. 이 정권에서의 방송정책은 공공적 이익의 실천이라는 고유의 공익적 통치 차원의 언어가 아니며 집권세력의 권력유지와 재생산을 위한 ‘정치전략’으로 타락하였다. 사실, 윤석열 정부의 방송정책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차원에서 논의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어 보인다. 실제 방송분야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권의 공공정책이 전반적으로 원초적이며 급진적인 퇴행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평가 받는다. 대통령 개인의 이념과 가치를 잣대로 삼는다는 의미에서 원초적이며, 한국 역사의 전통과 사회적 합의를 고려하지 않으며, 우리가 추구해온 발전과 진보와 역행하기에 급진적으로 퇴행적이라는 것이다.
국민의힘이 장악한 서울시의회와 오세훈 시장에 의해 TBS는 내년부터 방송국이 셧다운 될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법조언론인클럽 출신이자 일본계 아웃소싱 전문기업 자문을 한 박민 전 문화일보 기자를 KBS 사장에 임명하였고, 박민 사장은 지체없이 공영방송으로서 KBS 역할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있다.
YTN은 부도덕한 민간자본에 매각되기 일보 직전이며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감사원, 국민권익위원회 등 국가기관을 동원해 MBC 지배구조를 장악하고 비판적 보도를 억압하려고 하는 행위들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이 모든 파행은 언론자유와 공정한 방송 및 윤리적 경영이라는 ‘정책’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방송 공공성이라는 언어도 권력의 원초적이고 급진적인 퇴행성에 의해 그리 썩어가고 있다. 이러한 언론장악과 탄압과 무력화를 어떻게 공공 정책적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은 내년 4월 총선에서 야권이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정권을 교체하기를 희망한다. 그러한 희망은 절실히 필요하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언론자유와 시민의 권리가 회복되고, 공정한 정책 집행으로 공공성을 회복시킬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정권교체를 통한 언론자유 회복과 공영방송 안정화가 과연 방송 정상화의 전부일까?
권력구조의 변화가 언론과 공영방송이 정상화의 필수 조건이지만 결코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 또한 권력조정을 통해 이 정권이 행한 악행을 무효화 한다고 해서 우리는 방송이 정상화되었다고 할 수도 없다. 한 사회가 아무리 무도하다고 하더라도 순식간에 이처럼 무기력하게 언론이 탄압되고, 공영방송 제도가 무력화되고, 관련 공공기관이 권력의 수족이 되어 법과 제도를 형해화할 수 있다면 문제 원인은 단순히 무도한 권력에만 있지 않을 것이다.
지난 수십 년간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합의에 의해 구축하고 운영해오던 시스템이 단기간에 이렇게 쉽게 망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한국 언론과 미디어 시스템 제도에 결정적이고 더 본질적이며 구조적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더군다나 이 시스템과 제도를 뒷받침하는 공적 언어들조차도 이렇게 쉽게 왜곡되고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면 그러한 우려는 단순한 기우가 아닐 것이다.
▲ 2020년 10월 발표된 미디어개혁시민네트워크의 미디어정책 최종보고서 ©민주언론시민연합
현상 유지적(status-quo) 정상화 너머
2019년 언론운동단체, 현업단체, 학계, 시민단체 등 28개 단체는 미디어정책 논의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필요성에 공감하고 ‘미디어개혁시민네트워크’를 조직해 포괄적이면서 대안적인 미디어 정책을 제안하고자 하였다. 당시 시민네트워크는 이전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오히려 시민 모두를 위한 언론의 자유와 소통권리를 제한하기에 개별 시민과 공동체가 공통적으로 향유하며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기회와 방식을 제도화 할 필요성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네트워크는 “시민의 커뮤니케이션 권리 강화를 위한 미디어정책 보고서”를 채택하고, 이를 당시 문재인 정부와 국회에 공식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제안하였다. 결과적으로 당시 문재인 정부와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이 제안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금 그 보고서를 다시 검토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해당 보고서의 중요성은 현 시대에 있어 언론과 방송을 포함한 미디어와 관련한 제도 개혁이 기존 상태를 유지하거나 일부 개선하는 정도를 넘어서 시민의 근본적인 자유와 권리를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반영하고 있고, 이는 향후 미디어 개혁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언론과 방송의 ‘정상화’가 단순히 현 정권의 악법적 제도와 불법적 조치를 철회하거나 기존 제도를 부분적으로 수정하는 것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권력교체가 이러한 ‘현상 유지적 정상화’의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권력교체가 미디어에 대한 개혁적 정상화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기 위해서는 개별 시민과 공동체 모두의 자유와 권리를 이전보다 확장시킬 수 있는 법적 개념과 가치를 새롭게 발명하고, 헌법 개정까지 감안한 제도화 과정에 모든 시민들이 직간접으로 참여하여 개혁의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물론 이는 매우 창의적이고 대규모적인 정책적 자원이 동원되어야 하며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사회적 공론화 과정이 요구될 것이기에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진정한 개혁적 언론과 방송의 정상화를 이루기 위해서 이 과정은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지난 역사가 확인시켜 준 사실은 사회적 진보는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를 확장시키면서 진행되어 왔으며 그러한 시기에는 그에 부합하는 새로운 공공적 언어가 발명되고 공유되었다는 것이다. 의미를 잃고 있는 언어는 단순히 무도한 권력에 의해서 그리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언론포커스>는 언론계 이슈에 대한 현실진단과 언론정책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글입니다. 언론관련 이슈를 통해 시민과 소통하고 토론할 목적으로 민주언론시민연합이 마련한 기명 칼럼으로써 민언련 공식 견해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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