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포커스(~2023)_
<설강화> 역사왜곡 논란, ‘상상된 기억’ 역동성 누가 놓쳤는가
정수경(국제법률경영대학원대학교 조교수,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등록 2022.01.03 16:07
조회 8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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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대선정국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설강화>는 운동권으로 위장한 남파간첩과 정의롭고 대쪽 같은 안기부 팀장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을 불렀다. 사진은 <설강화> 2화 중 여주인공이 남파간첩 남주인공을 운동권 학생으로 착각해 숨겨주는 장면이다. ⒸJTBC <설강화>

 

낭패다. JTBC 드라마 <설강화> 논란을 두고 JTBC 측이 또 다시 입장문을 발표했다. 세 번째다. 드라마에 대한 허위사실 유포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내용이다. 첫 방송이 끝나자마자 드라마 방영중지 국민청원과 협찬취소 불매운동에 이어 방송금지 가처분 신청까지 진행된 논란은 법원의 기각 결정으로 일단은 지켜보자는 기류로 흘러가는 듯했다.

 

네티즌에게 보낸 JTBC ‘협박문’

 

그러나 방송사 측은 곧바로 “드라마 설정과 무관한 근거 없는 비방과 날조된 사실에 대하여 강경히 대응”하겠다는 공문을 20여 개 온라인 커뮤니티에 보냈다. 논란의 원인을 온라인 커뮤니티로 겨누고 있는 것이다. 네티즌에게 보낸 JTBC ‘협박문’은 과연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을까?

 

애초 오해를 불러일으킨 쪽은 JTBC다. 지난 3월 미완성 시놉시스가 유출돼 역사왜곡 논란이 처음 불거지자 JTBC는 미방영 드라마에 대한 허위사실로 여론을 호도하지 말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남녀 주인공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하거나 주도하는 설정은 대본 어디에도 없으며, 남파 공작원과 그를 쫓는 ‘대쪽 같은’ 안기부 요원은 정부나 조직을 대변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답만 내놓았을 뿐이다.

 

드라마의 뚜껑을 연 뒤 논란은 더욱 거세졌다. 간첩과 안기부 요원의 캐릭터 설정은 그대로였고, 민주화운동 시기 국가폭력을 정당화하던 공안기관 논리를 관철하고 있다는 지적엔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리곤 ‘9개 허위사실’을 적시하며 재차 해명했다. 극 중에 간첩이 남측 유력인사를 협박하기 위해 찾아간 성당은 간첩의 접선장소도 명동성당도 아니며, ‘조직원의 목숨보다 국민 목숨을 보호해야 한다’는 안기부장 발언은 안기부 미화가 아니므로 이를 왜곡 짜깁기하여 유포하면 ‘강력 대응’하겠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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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12월 30일 JTBC는 각 온라인 커뮤니티에 공문을 보내 허위사실 유포에 강력히 대응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JTBC

 

판타지가 강요하는 낭만적 중립

 

실제로 <설강화>는 시대극의 외피를 입은 판타지 로맨스물에 가깝다. 간첩과 경찰, 안기부 요원 사이 활극이 긴장을 고조하는 요소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야기 초점은 남파 공작원과 안기부장 딸 사이의 비극적 사랑에 있다. 극 중 주인공들이 마주치고 사랑을 키우는 무대는 드라마가 판타지임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80년대 여대생들이 개화기 ‘모던 걸’ 의상을 걸친 채 등장하는 다방과 레코드숍, 여대 기숙사는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무중력의 공간이다. 시공을 짜깁기한 골동품점 같은 세트장에서 남녀 주인공이 그려내는 비운의 사랑은 철저한 중립을 강요한다.

 

이들의 사랑을 위해 빌려온 사건의 모티브들에서 ‘하나회’와 ‘동백림 사건’과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등 실재한 역사를 연상하는 시청자들의 심리적 기제를 엄중히 꾸짖는다. 간첩인 남자 주인공과 안기부 요원 간의 추격 신에서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민중가요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배경음악으로 버젓이 사용하고도, 연출자는 불쾌감을 느끼는 시청자들을 되려 훈계한다. “독재정권과 대선 정국 외에 모든 인물과 설정은 가상”이며 <설강화>는 민주화운동이 아닌 “청춘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냈을 뿐이라고 말이다.

 

몰역사적 상상력과 역사적 해독

 

제작진이 간과한 것이 있다. 스토리텔링은 제작자가 새겨놓은 코드대로만 해석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주·조연의 캐릭터에 녹여 넣은 제작진 관점과 세계관은 때로는 거부되고 거센 저항에 부딪히기도 한다. 그게 시청자가 가진 독자적 권한이다. 작가가 구축하는 가상의 이야기 세계가 시청자 해석에 의해 붕괴되지 않으려면 사건의 인과관계나 보편적 진실을 거스르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시대물의 경우 역사적 사실의 인과성과 피해자-가해자의 관계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이 순서가 전복되면 필연적으로 역사 왜곡의 논란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시청자 경험 속에 각인돼 있고 사회적 합의로 정리된 역사적 사실을 밑천 삼아 스토리를 전개하겠다고 작정을 했다면, 함부로 사실관계를 짜깁기하거나 탈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드라마로, 판타지를 판타지만으로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 건 몇몇 네티즌들의 입방아가 아니라 제작진의 몰역사적 상상력이다.

 

시청자와 함께 찾아야 할 ‘한류 역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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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즈니플러스는 세계 최대 콘텐츠 기업인 디즈니의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로, JTBC 드라마 <설강화> 다시보기 서비스 독점제휴를 맺었다. Ⓒ디즈니플러스 홈페이지

 

걱정스러운 것은 이번 사태가 한 번의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 아니란 데 있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대성공으로 시작된, 분단을 소재로 한류 스타를 주인공으로 삼은 로맨스물은 글로벌 스트리밍 사이트가 반기는 하나의 포맷으로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한국에서 첫 서비스를 시작하는 디즈니플러스 측이 넷플릭스에 대항해 내놓은 드라마가 <설강화>라는 점도 단순한 우연이 아님을 방증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조건은 어느 나라도 흉내를 낼 수 없는 K-드라마만의 매력적인 서사와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토양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비슷한 줄거리는 반복될 것이다. 한류의 성공은 제작진과 배우들만의 것이 아니라 시청자의 적극적인 해독과 생산적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드라마가 가지는 사회적 맥락을 읽고 진실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청자와 공생하고 연대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대중문화가 가지는 ‘상상된 기억’의 역동성을 놓치게 되면, 시청자들은 더 이상 방송사와 제작진이 목표로 하는 구애의 대상이 아니라 싸움의 대상으로 돌변하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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