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호] [영화이야기]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시간과 국경을 가리지 않는다
-7명의 시위 주동자 ‘시카고 7’ 그리고 또 다른 주인공
등록 2020.10.27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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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30일 태어나신 분은 전쟁에 참전해야 합니다.”

 

커지는 베트남전 징병 문제와 더불어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의 암살로 인해 1968년 미국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거리엔 반정부적 분위기가 가득했고 베트남전에 반대하는 운동가들의 목소리는 커져갔다. 증폭되던 반권위 분위기는 시카고 민주당 전당 대회에 한데 모이게 된다.

 

톰 헤이든(에디 레드메인)이 이끄는 대학생 무리와 애비 호프먼(사챠 바론 코헨)이 주도한 히피 집단은 민주당의 새로운 대통령 후보에게 국민의 반전(Anti-War) 목소리를 들려줄 셈이었다. 애초에 평화롭게 계획된 시위였지만 정부의 반응은 달랐다. 시민들을 막기 위한 경찰과 방위군이 배치되었고 우발적으로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반전 시위가 유혈사태로 번지자 닉슨 행정부는 이를 기회로 보았다. 톰, 애비 등 반전 운동 인사 7인과 더불어 흑표당 대표 바비 실까지 억지로 끼워 넣어 법정에 세웠다. 시위를 공권력에 저항한 반역으로 보고 그들을 모의 죄로 기소하려는 검찰(조셉 고든 레빗)과 공권력이 먼저 부추긴 유혈 상태임을 증명하려는 변호사(마크 라이언스). 영화는 1968년 미합중국 대 시카고 7인의 법정 싸움을 통해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때로 법과 질서는 불순하다

‘법과 질서’는 혼란스러운 사회 분위기를 잠재우기 위해 1968년 닉슨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내세운 대안이었다. 핵심은 인종차별을 이용한 ‘범죄자 프레임’이다. 흑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해 백인 유권자들의 표를 모을 계략이었다. 시카고 7인에 대한 기소 또한 이러한 기조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반전시위를 법과 질서를 통해 교화되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보고, 흑인 기소자 바비 실을 내세워 부정적 이미지를 씌울 생각이었다. 이에 흑표당 대표 바비 실은 “나는 시카고 7인을 재판 전에 본 적이 없으며, 검찰에서 배심원들에게 겁을 주기 위해 흑인 피고인을 끼워 넣은 것”이라고 말한다.

 

법과 질서는 피고인의 변호 받을 권리를 보장했지만, 모순적으로 바비 실은 변호인 없이 법정에 서야 했다. 수개월이 넘게 진행되는 재판에서 그가 아무리 변호 받을 권리를 주장해도, 판사가 이를 저항이라고만 여겼기 때문이다. 끝내 그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발에 수갑을 채워 결박까지 한다. 남북시대 흑인 노예 모습으로 보안관에게 끌려 나오는 그에게 판사는 체제에 순응하라고 요구하지만, 바비 실은 자신의 발언권을 끝까지 고수하기로 한다.

 

다른 피고인들보다 더 높은 잣대로 그를 대하는 판사의 이중성에 기소를 부추긴 검사마저도 바비 실의 기소를 무효화 할 것을 부탁한다. 결국 판사는 정치적 역풍을 걱정해 기소를 없었던 것으로 결정한다. 법과 질서를 통해 사회를 순화하겠다는 의도가 얼마나 권위적이고 불순한 발상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끝내 자신의 목소리를 고수해 시스템의 부조리를 들춰낸 바비 실의 강건한 태도는 법정 안 여러 인물에게 귀감이 된다.

 

판사는 자신이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모두 이미 기울어진 법정을 느끼고 있었다. 다 짜인 고스톱판처럼 재판의 결과는 시작부터 정해져 있었다. 증인으로 나온 보스턴 공무원들, 경찰들, FBI 모두 정해진 각본대로 선과 악을 구분 지었다. ‘재판에는 민사재판과 형사재판밖에 없다’며 피고인들을 응원했던 컨슬러 변호사마저 시카고 7인에 대한 재판은 ‘정치 재판’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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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미국에서 열린 실제 재판을 소재로 만든 영화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출처=네이버 영화

 

당신은 이미 판결을 내리셨네요

반전 없이 끝날 것 같던 영화는 전 법무부 장관 램지 클라크(마이클 니튼)의 등장으로 새롭게 전개된다. 컨슬러 변호사는 법정이 열리기 직전에 직위 해제된 전직 법무장관을 찾아가 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껄끄러운 상황이지만 램지 클라크는 용기 내 증인으로 참석해 예비 발언을 한다. “몇 달 전 대통령이 반전 시위자들을 기소할 의향이 있냐고 물었을 때 저는 기소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법무부 형사국에서 수사를 진행한 결과 폭동은 경찰이 시작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전당대회 날에 폭력 사태를 일으키려고 모의했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재판의 결정적 증거였지만 판사는 이것이 효력 없는 발언이라 판단하고 그를 배심원 앞에 세우지 않는다. 실망한 컨슬러 변호사는 판사를 향해 “당신은 이미 판결을 내리셨네요”라고 분노하며 전직 법무장관에게 질문을 이어간다. “검찰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까? 닉슨 대통령은 전쟁 지지자가 줄어서 불만인 거죠?” 전 법무부 장관 클라크는 대답한다. “네. 맞습니다. 피고인들 때문에 지지자들이 더 떨어져 나가고 있죠.” 결정적 발언이 끝내 배심원들에게 닿지 못하자 램지 클라크는 컨슬러 변호사에게 말한다. “항소 준비하세요.” 판결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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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부 장관의 지시와 정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리처드 슐츠(조셉 고든 레빗) 출처=네이버 영화

 

디테일한 이야기꾼, 아론 소킨 감독

으레 법정 영화는 어두운 분위기에서 분노 섞인 톤으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할 것 같지만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다르다. 전작 <소셜 네트워크>로 아카데미 각색상을 받은 아론 소킨이 각본과 연출을 맡아 유머와 사회비판을 함께 지닌 법정 영화를 만들어 냈다. 판결 과정에서의 대화 역시 밀도 높지만 영화의 백미는 법정 밖 사회 운동가들과 법조인들의 대화다.

 

배경, 이념, 성격, 소신, 외모가 모두 다른 7명의 입체적 캐릭터는 진보세력 안에서 필연적으로 마주하는 방법론적 차이를 보여준다. 민주사회학생회(SDS)의 리더 톰 헤이든은 히피들의 기행적 행동이 진보정치의 이미지로 고정될까봐 두려워하며 진정한 혁명은 투표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히피를 이끄는 청년 국제당 리더 호프만은 고상한 척하며 체제에 순응한다고 해도 결코 진정한 혁명을 이뤄지지 않으며, 돈이 없는 상황에서 메시지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펼치는 자신의 쇼를 비난하지 말라고 한다. 진보라는 깃발 아래서 흔히 볼 수 있는 갈등을 현실 고증하는 대목은 감독 아론 소킨이 얼마나 디테일한 이야기꾼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미 결정된 역사적 판결을 되돌릴 순 없다. 판결의 유무죄의 정당성을 따지는 대신 감독은 시카고 7인이 서로가 증오의 대상이 아닌 의지해야 할 동료임을 보여준다. 서로를 비난했지만 결정적 순간 그들은 누구보다 상대를 잘 이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어리고 미숙하지만 1969년 미국 사회를 바꾸겠다고 나선 시카고 7인에게 판사는 체제에 순응하면 형을 감면해 주겠다고 유혹한다. 마지막 발언 기회에 피고인 7인은 무의미한 재판으로 희생당한 자신들의 이야기 대신 노트 하나를 꺼내 든다. 재판 기간 베트남전에 참전해 사망한 미국 청년 5천여 명의 이름을 하나하나 읽는다. 시카고에 모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전쟁의 무의미함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미국 대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점. 이 영화가 개봉한 것이 우연이기만 한 걸까. 특정한 나라를 떠나 여전히 인종차별과 공포심을 활용한 선거 전략은 유효하고, 정치적 목적을 위한 코드 기소는 지금도 시끌벅적한 뉴스가 된다. 같은 정치적 깃발 아래에서도 구성원들은 방법론을 두고 갈라선다. 이에 강건한 태도와 사회적 연대의 중요성을 보여준 주인공들만큼이나 주요한 인물이 있다. 바로 대중이 보여준 관심의 목소리다. 부끄러운 결정이 내려진 법원 밖에서 그들은 끊임없이 외치고 있었다. “The whole world's watching(전 세계가 바라보고 있다).” 이들 역시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재홍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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