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호] [여는글] 적(Enemy)과 빌런(Villain)
등록 2020.03.03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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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나 드라마에서 이야기의 중심인물인 악당인 ‘빌런’이 강력하고 멋질 때 멋진 주인공을 만들어 주며, 결과적으로 그 영화는 완성도나 흥행에 있어 성공 가능성이 높다. 재미있는 영화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매일 고민하는 일이 직업인 나로서는 이야기 속 악당에 관한 관심이 많으며, 매력적인 악당을 만들어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소설가 댄 브라운(Dan Brown)이 말하듯, “A Villain is a man who is doing the wrong thing for the right reason, 악당은 좋은 목적을 위해 잘못된 행동을 하는 사람”이 가장 적확한 표현일진대, 영화에서는 딱 거기까지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추악한 악당들은 주로 뉴스에서나 만날 수 있는 유형으로 굳이 이들을 영화 속 이야기나 인물로 가져오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영화가 후져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빌런’이 ‘적, Enemy’으로 전이될 때, 그 영화는 단순한 재미적 요소가 아닌 사회적 이슈로 전환될 수 있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불과 한 달 전인 1월 3일,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 솔레이마니를 미군이 드론을 이용한 미사일 공격으로 암살한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이는 2020년 새해에 국내외 톱뉴스를 장식할 만큼 충격적인 사건일진대, 내게 그 충격이 더 컸던 이유는 그즈음 보고 있던 미국 TV드라마 <홈랜드, Homeland>의 시즌 3 에서 미국 CIA가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암살하는 사건을 이미 그렸기 때문이다. 정상 국가의 유력 정치가를 암살한다는 드라마의 허황된 설정에 더군다나 죽어도 싼 악당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놀라운데, 불과 몇 년이 되지 않아 실제상황으로 벌어진 것에 아직도 그 놀라움이 가시질 않는다. 혁명수비대 사령관이란 직책이 같을 뿐이지, 드라마의 설정과 국제정세 속 이란의 현실은 엄격히 다르지만 말이다. 이 드라마는 2011년부터 방영이 시작되었고, 시즌 3은 2013년에 제작되었으니, 트럼프 행정부 이전부터 미국은 비밀리에 아니 공공연하게 ‘이란의 주요 정치인 암살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하는 억측이 들기도 하는 한편, 이 드라마의 과감한 상상력에 탄성이 나올 정도다.

<홈랜드>는 ‘본토’, 즉 ‘미국’을 의미한다. 장장 시즌 7에 이르기까지 ‘미국에 대한 애국심’이 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주제이며, ‘애국이란 무엇인가?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던진다. 이 시리즈는 오바마 대통령 임기 2기에 방영되었고, ‘오바마가 즐겨보는 드라마’로 마케팅을 했으며, 많은 미국인들이 손에 꼽는 인기 드라마였다. CIA 요원들을 주인공으로, 테러 위협, 이중 스파이, 요인 암살, 금융 공작, 도감청 등 실제 CIA는 물론 국가정보국 NSA가 실행하고 있는 작전들을 마치 장르라는 요리에 자극적인 향신료를 맘껏 버무리듯, 미국의 테러에 대한 두려움을 첩보라는 장르에 매우 영민하게 대입시키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홈랜드>가 영화적 상상력으로 잘 설계된 ‘빌런, 악당’이 아니라, ‘9.11 테러 사건’ 이후 미국에게 ‘악의 축’으로 규정당한 알카에다, 테러리스트라는 현실적 공포의 프레임을 드라마에 반영시키면서 이슬람 전체를 적대시하게 만드는 사악한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9.11 테러’ 직후 조지 부시가 일방적으로 제정한 '애국법'에 기초한 설정으로 ‘미국의 적은 테러리스트, 그들은 이슬람, 이슬람은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맥락 하에 드라마의 이야기에서 아주 중요한 ‘빌런의 공식’을 절묘하게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재미적 요소의 ‘빌런’이 아니라 공포적 존재로서의 ‘적, Enemy’를 설계하고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물론 이 드라마 속의 ‘적’에 대해 나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들 <바이스, Vice>, <아메리칸 스나이퍼, American Sniper>, <그린존, Green Zone>, <바디 오브 라이즈, Body of Lies>, <제로 다크 서티, Zero Dark Thirty> 등 소위 ‘9.11 테러’ 이후에 만들어진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 공격 등의 전쟁영화들을 보며, 미국의 이슬람 공격에 대한 자기 반성적 성찰이 이 영화들의 공통된 주제의식이라고 생각했었다. 심지어 나의 ‘반전 또는 반미의식’은 이 영화들에서 영향 받았다고 배포 있게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홈랜드>를 보면서 그것이 얼마나 순진한 망상이었는지 돌이켜본다. 결국은 이 영화들 모두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시리아, 이란 등을 악의 축으로 설정해놓는 거대한 프레임 안에서 결국 전쟁 또는 공격을 ‘애국’과 ‘평화’이라는 명분으로 합리화시키면서, 약간의 배려로 인간적으로 반성하는 면모를 살짝 비추기만 한 건 아니었을까? 그들의 사악한 저의는 이 영화들의 의미나 재미만큼이나 우려스러울 따름이다. 그럼에도 첩보장르로서 완벽한 서사를 갖춘 서스펜스 넘치는 이야기들이 진행되기에 <홈랜드> 시청을 멈추기가 어렵다. 딜레마인 것은 ‘적이 명확할 때, 첩보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1960년대 냉전(Cold War)이 극한에 이르렀을 때 당시 대중문화에서 첩보 장르가 가장 절정기였으며, 이는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질 때까지 호황을 누렸던 것을 상기해보자.

한편, 한국 영화 <청년경찰>, <우상> 등을 보면,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을 위협하는 빌런은 조선족, 즉 이민자다. 이 영화들에서 조선족은 여자들을 납치해 장기 밀매를 하는 조직이거나, 중국에서 살인사건을 벌인 후 한국으로 들어와 한국 중산층 가정을 위협하는 싸이코패스로 그려진다. 영화는 허구일 뿐이지만, 이미 뉴스 등을 통한 범죄 사건들에서 기시감을 느끼는 바, 관객들이 느끼는 영화 속 빌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은 더 확대된다. ‘이민자’들에 대한 사회적 공포감은 미디어와 대중문화로 더욱 강화되어 전파된다. 이는 편견을 넘어 ‘혐오’란 괴물로 더욱 키워가는 가는 것이다.

최근 들어 전국의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의 위기에 처해있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정국에서 이런 사태 역시 실감할 수 있다. 그간의 정치에 관한 가짜뉴스는 애교로 느껴질 만큼 생명과 직접 관련되는 바이러스에 관해 혐오를 조장하는 가짜뉴스는 마치 우리의 삶이 ‘인류멸망의 위기’에 다가온 것처럼 그 수위가 영화적 상상력을 뛰어넘기도 한다. 가짜가 진짜를 공격하고, 또 선동하며, 급기야는 가짜를 진짜로 믿고 진짜가 가짜로 몰락하는 그 무엇이 진위인지 그야말로 혼돈의 카오스인 것이다.

‘적’이 필요한 사회, ‘적’을 만들어내는 사회보다는 내가 물리칠 수 있는 정도 또는 재미로 봐줄 수 있는 정도의 ‘빌런’에 맞서는 삶이 그나마 낫지 않을까? 그 정도 ‘빌런’에 대해 지금 이 순간도 고민 중이다. 영화에서 유용하게 기능할 ‘매력적인 빌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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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민언련 이사, 영화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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