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사 펠드먼 배럿의 『감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텅빈 거리를 홀로 걷고 있을 때다. 8차선 대로 옆으로 난 인도다. 구름 잔뜩 낀 일요일 오전, 차도 사람도 쉬는 듯했다. 옆으론 나지막한 산이 있고, 그 산을 깎아 만든 작은 공장 옆을 지날 때다. 어떤 물체가 쓱 다가온다. 깜짝 놀라 살펴 본다. 무릎 높이 크기의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바라보더니 마구 짖기 시작한다. 심장이 뛴다. 난 극심한 공포에 휩싸였다. 개 짖는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공포감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어릴 적 개에 물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공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살다 보면 공포를 비롯 슬픔이나 외로움 또는 경외나 황홀 등의 감정을 느끼게 마련이다. 사람에 따라 감정의 양상이 다르고, 사회나 문화에 따라 감정을 대하는 태도가 다를 순 있어도, 감정 자체가 개인이나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순 없다. 일어났다 그만 사라지고 마는 것이니 그저 지켜만 보면 되는 걸까?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내가 경험한 공포는 일어났다 이내 사라졌다. 지금은 공포가 아니라 조급함에 쫒기고 있다. 이 글의 마감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감정이란 이렇듯 순간순간 변하는 것이기에 믿을 수 없다고 여길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이들은 변덕쟁이 감정 대신 변치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이성을 바탕으로 삶을 꾸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삶의 준거로 삼아야 할 준칙을 순간순간 변하는 감정으로 삼는다면 감정만큼이나 변덕쟁이의 삶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성을 도구로 진리를 추구하는 삶에 대한 주장은 유구한 전통이 있다. 파타고라스가 대표적이고 근래엔 데카르트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근대를 낳은 준칙이다.
세상과 세상을 인식하는 주체가 분리된다는 바탕 하에 근대 과학이 탄생했다. 세상은 인간에 의해 표준화/수량화될 수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 변덕쟁이 감정이란 부차적인 고려였다. 오로지 이성과 과학만이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고 감정이란 이성에 의해 통제되어야 할 인간의 한 측면으로 치부되는 전통이 쌓아졌다. 그 결과 진리와 아름다움과 삶의 윤리가 통합되었던 고대의 지혜는 사장되었다. 오로지 과학만이 진리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아름다움과 삶의 윤리는 부차화되고 말았다. 이러한 서구 ‘근대’가 낳은 결과는 두 번에 걸친 세계 전쟁이며 지구 생태계 파괴다.
인류의 복지에 기여해야 할 이성과 진리가 인류를 파괴하는 도구로 전환되었을 때 인류는 경악했다. 뭔가 잘못된 게 틀림 없다. 어디서부터 인류는 잘못된 길로 들어선 걸까. 혹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이성’ 그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닐까? ‘합리적 인간’이라는 가정 자체에 뭔가 허점이 있는 건 아닐까?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근본 관점의 변화 없이는 전쟁과 생태계 파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 다는 ‘공포’가 변덕쟁이 감정을 다시금 보게 만들었다.
감정으로 번역되는 영어 표현은 ‘emotion’이다. ‘e(밖으로) + motion(동작)’의 합성어로, 인간 행동을 불러 일으킨다는 뜻을 품고 있다. 여기서 행동이란 물리신체적 행위뿐만 아니라, 언어를 통한 사유 작용 또한 포함된다. 이성적 사유라는 것은 감정에 의해 촉발된 행위 유형의 하나라고 본다면, 인간 이성은 감정과 모종의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또한 예술 행위의 필수 요소로서 아름다움에의 추구에서 중추 역할을 한다. 또한 감정이 인간의 행위를 불러 일으킨다면 윤리적 삶의 기초가 되기도 한다. 진/선/미의 통합이라는 오래된 지혜로 가는 열쇠는 이성도 실천도 아닌 감정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전쟁과 생태계 파괴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전쟁을 불러 일으킨 이성이 아니라 이성과 실천을 통합시키는 감정일런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인간 감정에 대한 탐구는 인류 운명의 방향을 결정지을만큼 중요한 영역이 된다.
리사 펠드만 배럿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내가 개를 보면서 공포를 느낀 까닭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까닭을 알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창조해낼 수도 있을 게다. 그가 밝혀낸 감정의 생성원리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인간인 우리는 감정의 설계자이자 창조자라는 것이다. 인간은 미리 설정된 어떤 감정을 복제하는 존재가 아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인간은 순간순간 감정을 구성해내고 있다는 걸 설득력 있게 논증한다. ‘네 자신을 알라!’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주문에 관심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
글 신호승 / 모임디자이너, 회복적서클대화협회 이사
[날자꾸나 민언련 2월호 PDF 파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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