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2023)_

  -조선 동아 창간 100주년, 새로운 출발이 되길 바라며

두 ‘민족정론지’의 다음 100년을 위한 기회 
이명재 (민주언론시민연합 정책위원)
등록 2019.09.02 14:37
조회 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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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일본의 부당한 경제침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것은 일본이 왜 그 막강한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결코 국제사회에서 지도적 국가가 될 수 없는가, 라는 이유이다. 과거의 이웃 나라에 대한 침탈과 유린, 반인권적 범죄에 대해 진정한 사죄를 하지 않는 나라. 아니 자신들의 행위가 과연 용서받기 힘든 악행이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부터가 없어 사죄할 능력이 없는 나라이며 정부. 일본이 진정한 강국이 될 수가 없다고 한다면 그것의 한 뿌리는 반성 역량의 결여에 있는 것이다.

 

촛불 집회로 표출된 국민들의 분노에 의해 끌어내려진 박근혜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의 결정적인 이유는 물론 최순실과의 합작 국정 농단이었지만, 그 정부의 적나라한 실상을 집약해서 보여준 건 세월호 참사 때였다. 그 참사는 304명의 생명을 구해내지 못한 구조의 실패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그 이상으로 정부의 무능과 타락을 보여준 것은 그 재난과 비극에 대한 반성능력의 결핍이었다. 자식과 친구를 잃은 부모와 아이들이 진상을 밝혀 달라며 단식 하고 오열하는데 그들을 불순분자로 몰아 억누르는 파렴치를 보면서 많은 이들이 느꼈던 것은 정부라는 것의 존재가 오히려 그것의 부재를 드러내는 참담한 현실이었다.  

 

인간이 인간인 것이 이성이 있어서라면, 그 이성은 곧 반성하는 능력에 다름 아니다. 인간은 반성으로써 좀 더 나아지고 새로워지며 성숙한 존재가 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결국 ‘인간’이 돼 가는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 신문에 미래는 없다

 

기독교에서 회개는 단순히 과거 행동에 대해서 후회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회개는 결국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것이다.

 

공자의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즉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아야 한다는 말도  잘못을 반성하고 과거와 다른 행동을 보여야 참인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잘못에 대한 반성은 남에 대해서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다. 반성 없는 삶이란 곧 자기를 스스로 구속하는 것이며, 자신을 해치는 자해행위인 것이다. 반성과 회개는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자기구원, 자기해방이며 ‘거듭남’의 시작인 것이다.  

 

진정한 반성과 사죄는 용서를 낳는다. 인간에겐 반성하는 능력과 함께 용서하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지난달 23일, 노태우 씨의 장남이 광주 5·18민주묘지를 방문해 참배한 사실이 뒤늦게 공개됐었다. 그의 참배는 5·18 당시 신군부 지휘부의 직계가족 중 처음인데, 더욱 관심을 끈 건 이 얘기를 전하는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의 말이었다. 그는 “노씨 측이 진심어린 손을 내민다면 만날 의지가 있다”고 말했다. 그의 뒤늦은-너무도 뒤늦은- 참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이제라도 이뤄진 그 사죄는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출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의 두 대표 신문사, 사실상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으며 민족 대표의 정론지임을 자부하는 두 신문사의 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두 신문사는 벌써 과거 100년을 되돌아보고 미래 100년을 말하는 기획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과거 100년에 대한 진정한 성찰 의지는 찾아볼 수 없다. 

 

두 신문의 자축과 과시에 대한 많은 시민들의 응답은 ‘거짓과 배신의 100년’이며, 우리 사회의 과제는 그 치욕의 100년을 청산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주말마다 벌어지는 ‘아베 규탄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시민들이 집회를 마치고 행진의 종착지로 삼는 곳은 조선일보사 앞이다. 매국, 친일을 규탄하는 시민들의 분노의 함성은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신문에게 왜 현재가 없고 미래가 없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거듭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

 

매일 아침 배달돼 오는, 또는 인터넷과 핸드폰의 뉴스를 통해-게다가 지금은 TV 화면을 통해서까지-전하는, 강변을 넘어 궤변, 왜곡을 넘어 ‘가짜’의 수준에까지 이르는 이들의 뉴스라는 이름의 반(反)뉴스를 애써 외면하려고 하지만 어쩌다 접하게 될 때 느껴지는 것은 마치 얼굴에 오물을 뒤집어쓰는 것과 같은 불쾌감과 모욕감이다. 

 

두 신문이 지난 100년간 견지해 왔다고 내세우는 ‘정의옹호(正義擁護)’니 ‘민족’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은 결코 그들의 말이 될 수 없는 말, 결코 그들의 말이 돼서는 안 되는 말들이다. 

 

그 무례와 모욕, 언어의 타락을 그대로 두고 보는 것은 불쾌를 넘어 우리 자신이 능욕당하고 있다는 수치심이다. 그 수치를 씻어내는 것은 지금 우리 사회의 존엄 회복을 위한 숙제다.

 

다음 100년의 출발은 과거 100년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된다는 것,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이 합의하는 그 사실을 저 두 ‘민족정론지’가 스스로 돌아보고 회개하는 것. 그것이 두 신문의 ‘언론(으로의) 회복’의 첫걸음이다. 그것은 또한 이성의 회복, 양식의 회복이며 인간의 회복이다. 두 신문에 대한 시민들의 반성과 성찰의 요구는 그러므로 결코 그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음 100년을 위한 기회를 주는 것이다. 이 기회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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